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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50)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진원원(陳圓圓), 생졸 미상, 명말청조(明末淸初) 사람이다. 원래 성은 형(邢)이요 이름은 원(沅)으로 소주(蘇州)의 명기(名妓)다. 그녀는 화용월태(花容月態)의 용모를 가졌고 남다른 기질을 갖춰 금기서화(琴棋書畵)에 두루 능통했다. 오삼계(吳三桂)가 사랑해 첩으로 들였다. 오삼계를 따라 오랫동안 운남(雲南)에서 살았다. 강희(康熙)가 삼번(三藩)을 평정한 후 종적이 모호하다. 도관(道觀)으로 들어가 적정(寂靜)이란 이름으로 살았다고 전하기도 한다.

 

진원원은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의 전기적인 여인이다. “홍안 때문에 노기충천한” 오삼계가 청병(淸兵)을 산해관 안으로 끌어들여 명나라 사직을 멸하고 강산의 주인을 바뀌게 한 것이 모두 진원원과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다고 한다. 이 말이 맞는다면 연약한 여인이 일세의 흥망을 결정짓게 만든 것이다. 왕조가 바뀐 사건은 그녀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다른 면에서 보면 봉건 사인士人들의 눈으로는 그녀가 포사(褒姒), 달기(妲己), 서시(西施), 초선(貂蟬)과 같은 부류의 여인으로 보기도 한다. 애련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고 욕하는 사람도 있다. 그녀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어쩌면 아름다운 용모와 뛰어난 예술적 재능 때문일지도 모른다.

 

 

 

 

뉴린(鈕璘)의 『원원전(圓圓傳)』을 보면 오삼계의 벼슬이 왕까지 된 후 곤명(昆明)에서 오화산(五華山) 영력(永歷)고궁을 점거해 진원원을 정비(正妃)의 자리에 앉히려 했다. 하지만 진원원이 완곡히 거절하자 오삼계가 다른 여자를 얻었다고 했다. 후처로 들어온 여인은 질투심이 극에 달했다. 아름다운 외모의 비(妃)들이 오삼계의 총애를 받으면 모두 죽여 버렸다. 그런데 진원원만은 그 뜻을 거스르지 않고 화려함을 뒤로 한 채 별원에 홀로 거주하며 시새움으로 티격태격하지 않았다. 오삼계가 반란을 도모하려 하자 진원원이 알아차리고 막으려 했으나 막을 도리가 없자 오삼계에게 나이가 들었다는 핑계를 대고 출가해 여도사(女道士)가 되겠다고 청하고 허락받았다. 나중에 궁궐을 뒤로 하고 산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약 탕기와 경전을 벗 삼아 조석으로 도를 닦으면서 조용하면서도 평온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원원전(圓圓傳)』은 또 오삼계가 반란에 실패한 후 가산을 몰수당할 때 진원원의 이름이 없었다고 썼다. 그녀의 행방에 대해서는 “천기가 선화하였는가? 홍실의 신선이 은둔하였는가? 그 아름다움이 마침내 연자루(燕子樓)에 이르렀는가? 알 수 없구나”라고 썼을 따름이다. 뉴린은 진원원의 구체적인 행방에 대해 서술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영웅을 무너뜨린 미인의 마지막은 어떻게 됐을까?

 

자살을 했다고 하기도 한다. 도광(道光) 연간 완원(阮元)의 둘째 아들 완복(阮福)이 부친을 따라 운남으로 가 진원원의 사인을 고찰했다. 그리고 『후원원곡(後圓圓曲)』 한 수를 지어 부친의 명에 따라 진문술(陳文述)에게 보냈다. 진문술은 그 시제로 칠언절구 10수를 지어 서와 주를 『이도당시선(頤道堂詩選)』24권에 수록했다. 서(序)의 대의는 다음과 같다 : 원복이 상산사(商山寺) 연화지(蓮花池)에 이르러 진원원의 묘를 고찰하고 운남에서 전해 내려오는 문헌을 얻어 시에서 서술한 진원원 최후의 사실을 입증했으니 오매촌(吳梅村)의 『원원곡(圓圓曲)』과 같이 전할 가치가 있다. 그 시의 주에 “신유(辛酉), 성이 함락되자 진원원은 스스로 영화지에 몸을 던졌다”고 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진원원은 오삼계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연못에 몸을 던져 자진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관점도 있다. 진원원은 오삼계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기 전에 이미 의욕을 상실했다. 이자성(李自成) 군대가 북경을 공격하자 숭정(崇禎) 황제는 매산에서 목을 매었다. 이자성 군대가 북경으로 들어간 후 대가를 받아내는데 급급했다. 진을 치고 새로운 왕조를 건립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유종민(劉宗敏)은 오삼계의 부친을 붙잡아 고문하고 오 씨 집안의 가산을 몰수해 버렸다. 그리고 진원원도 붙잡아 갔다. 오삼계는 노기충천해 청나라에 투항해 버린다. 이자성을 깨뜨린 후 추격하는 도중에 진원원을 되찾아 왔다. 이때부터 다시는 헤어지지 않기 위해 진원원에게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오삼계의 세력이 점점 더 강대해지고 운남에 주둔하게 되면서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일으켰다. 취호(翠湖), 연화지 등을 만들고 진원원과 함께 풍류를 즐겼다. 후에 오삼계가 또 ‘사방관음(四方觀音)’, ‘팔방관음(八方觀音)’ 등의 미인들을 집안으로 끌어들이자 진원원은 물러나 마음을 다스리며 오삼계와 함께 하지 않았다. 오삼계가 청 왕조를 반대하며 기병하자 진원원은 분명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 직감하고 낙담했다. 그리하여 절로 들어가 부처에 귀의했다. 청나라 군대가 오삼계의 군대를 물리치고 운남으로 공격해 들어올 때 진원원은 스스로 연화지에 몸을 던졌다. 일세 가인이 그야말로 ‘향소옥운’(香消玉隕, 향이 사라지고 옥이 떨어져 버림)하게 됐다는 말이다.

 

진원원의 사인에 대해 또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 진원원이 오삼계와 함께 청나라 군대에 의해 몰살당했다고 보는 것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오삼계가 운남에서 평서왕(平西王)에 봉해진 후 화려하기 그지없는 소대(蘇臺) 등을 세웠다. 진원원은 늘 ‘대풍지장(大風之章)’을 노래하며 오삼계에게 “신무가 일세에 그치지 않는다”며 치켜세웠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십년을 하루같이 오삼계의 사랑을 독차지 했고. 나중에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진원원의 “같이 하려던 꿈”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오삼계 반란이 실패하자 진원원도 청병에 의해 살해됐거나 죄수가 돼 처형당했다는 것이다.

 

 

 

 

진원원이 어떻게 죽었던지 간에 그녀의 일생은 비극이었다. 어찌 그녀 스스로 시대풍파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싶었겠는가. 어찌 평안하지 않는 삶을 선택했을 것인가.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권세가 있는 남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뺏기고 빼앗는 희생물이 되었음이니. 어쩔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음이니.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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