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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51)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오삼계(吳三桂, 1612-1678), 자는 장백(長白), 무과 출신으로 군관이다. 명(明)나라 말기 요동총병(遼東總兵)을 역임했고 평서백(平西伯)에 봉해져 산해관(山海關)을 방어했다. 이자성(李自成)이 명 왕조를 멸망시키자 청병(淸兵)을 관내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섬서(陝西), 사천(四川) 등지의 농민봉기군을 진압해 청(淸)나라에 혁혁한 공을 세우면서 평서왕(平西王)에 봉해졌다. 강희(康熙) 12년에 청나라에 맞서 거병해 스스로 주왕(周王)이라 부르고 5년 후 황제에 자리에 앉았으나 오래지 않아 병사했다. 그를 따르던 장수들도 청병에 의해 소탕됐다.

 

만리장성의 제1관이 산해관(山海關)이다. 진황도(秦皇島) 동북쪽 15킬로미터 발해만(渤海灣) 끝머리에 있다. 명 홍무(洪武) 14년(1381) 위국공 서달(徐達)이 그곳에 성을 창건해 위병소를 세웠다. 성곽이 산해(山海) 사이에 있기 때문에 산해관이라 불렀다. 화북(華北)과 동북(東北) 사이의 요로로 지세가 험난하다. 역대로 군사상 반드시 점령해야 할 요충지였다.

 

 

 

 

산해관의 성곽은 사방형이고 4개의 관문이 있다. 동쪽 성문은 ‘천하제일관’으로 높이 12미터의 장방형 성대가 놓여 있다. 동서 방향으로 동쪽은 관외(關外)이고 서쪽은 관내(關內)다. 남북으로 장성과 연접해 있다. 성대 중간에는 거대한 벽돌로 된 아치형 문이 있고 관문은 여닫을 수 있다. 성대 위에는 높이 13미터 넓이 20미터의 누각이 세워져 있다. 위에는 ‘천하제일관’이라는 거대한 액자가 걸려 있고 누각 아래는 산해관의 동성문이다.

 

‘천하제일관’의 글자는 한 자의 높이가 1.6미터로 필력이 웅장하다. 과거에는 엄숭(嚴崇)이 썼다고 잘못 알려졌었다. 사실은 명 성화(成化) 8년(1472) 현지인 진사 소현(蕭顯)이 썼다. 원래의 편액은 누각 아래에 보관돼 있고 누각 위에는 광서(光緖) 8년(1472)에 모각된 액자가 소장돼 있다. 누각 밖에 걸려 있는 것은 1929년에 모각한 것이다.

 

산해관을 얘기하면 오삼계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명말(明末) 이자성이 명 왕조의 산해관 총병 오삼계의 관병이 지키고 있던 산해관 서라성(西羅城) 밑까지 위협해 들어갔다. 당시 관내를 지키던 명나라 군대도 봉기해 산해관은 목하 함락되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 오삼계는 청나라에 투항해 관문을 열고 도르곤(Dorgon, 다이곤多爾袞)을 맞이한다. 명나라 군대와 청나라 군대가 협력해 농민봉기군을 공격하고 이자성을 퇴각시켰다. 청나라 군대는 힘 들이지 않고 산해관을 통과해 중원으로 들어서면서 명 왕조는 멸망한다.

 

만청(滿淸)이 중원의 주인이 되는 과정을 보면 오삼계는 중요하면서도 독특한 역할을 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하였던가. 한간(漢奸)도 선천적이지는 않을 터이다. 객관적인 각도에서 오삼계가 투항하는 전 과정을 살펴보자.

 

오삼계는 일상적으로 보이는 목숨을 아끼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파렴치한 저질의 한간은 아니다. 시인이 상상하는 “홍안(紅顔) 때문에 노기충천하여” 한 여인을 위해 적에게 투항한 인물도 아니다. 오삼계가 진원원에 대해 깊은 감정을 가졌다는 것은 의심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변방을 지키는 대장으로 군국대사(軍國大事)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어찌 한 여인을 위해 천고의 욕을 먹겠는가? 관내나 관외에 쌓이고 쌓인 게 미인이지 않던가. 권력을 잡은 자는 언제든지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 그런데 어찌 한 명의 가기(歌妓)를 위해 국가의 운명을 뒤바꾸는 도박을 벌이겠는가. 그리고 유종민(劉宗敏) 개인을 보면 이자성을 위해 처를 죽이면서까지 충성을 맹세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한 여자를 위해 군국대사를 그르칠 수 있겠는가.

 

심지어 “홍안 때문에 노기충천”했다는 말도 허구다. 왜냐하면 “국난 때 진원원은 아직 오삼계를 만나지 않았다”는 게 맞기 때문이다. 즉 이자성이 북경에 들어왔을 때 진원원은 아직 오삼계에게 시집을 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상관도 없는 미녀를 위해 총칼의 방향을 바꾼다는 말인가. 맞다. 진원원은 나중에 오 씨 집안에 들어갔다. 그러나 오삼계의 본처는 유달리 질투가 심해 그저 “별원에 독거”할 수밖에 없었다. 오삼계는 자신의 아내조차도 아쉬운 대로 참고 견디었는데 어찌 진원원을 위해 대사를 그르칠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본다면 이치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앞뒤 말을 그럴싸하게 둘러맞추기가 쉽지 않게 된다.

 

 

 

 

오삼계는 평생 말 위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명 만력(萬曆) 40년(1612)에 장군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부친 오양(吳襄)은 무관 출신으로 숭정(崇禎) 초년에 요동을 지켜낸 공으로 금주(錦州) 총병(總兵)으로 승진했다. 오삼계는 어릴 적부터 활쏘기와 말 타기를 배웠다. 나중에 무과에 급제하고 부친의 관작을 이어받아 도독(都督)에 봉해졌다. 그는 군에서 유격(遊擊), 부장 등 직을 역임하고 28세 때는 영원(寧遠)총병으로 승진돼 요동(遼東)의 요새를 지키는 중요한 장수가 됐다. “명말(明末) 날랜 장수”가 된 오삼계는 활쏘기와 말 타기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황은을 받았고 가정교육을 충실히 받은 충효절의(忠孝節義)가 몸에 밴 인물이었다. 수하 병사들도 명나라 군대 중 으뜸이었다. 전투력 또한 최강이었다.

 

오삼계는 명 왕조의 요동 장수들 중 주전파(主戰派)에 속했다. 청병(淸兵)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태도는 선명하면서도 일관됐다. 명과 청이 벌인 송금지전(松錦之戰) 이후 어려운 국면을 당하자 고급 장수들은 청나라에 투항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삼계는 여전히 청나라와 전쟁을 피하지 않고 진지를 고수했다. 홍타이지(황태극皇太極)가 투항한 명나라 장수 장존인(張存仁) 등을 보내 투항을 권했지만 내버려 두고 거들떠보지 않았다. 끝끝내 청나라 군대와 대항할 뜻을 버리지 않았던 장수였다. 이렇듯 너무나 그리도 쉽게 만청에 투항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인물이었다.

 

실제 오삼계의 경력은 복잡하기 그지없다. 그의 인생 전반부(1세에서 32세까지)는 명말 시기로 “구 왕조의 중진”이었고 후반부(33세에서 67세까지)는 청초(淸初) 시기로 “새로운 왕조의 공신”이었다. 그는 명 왕조를 섬기다가 배반했고 청 왕조에 투항했으나 반란을 일으킨 “여기저기서 다 욕을 먹는” 사람이다. 그러나 당시는 명과 청이 교체되는 시기였다. 관군과 도적떼들이 교전하고 외환과 내우가 겹치는 시기였다. 그가 처한 환경을 너무나 미묘했다.

 

당시는 명(明), 틈(闖, 틈왕闖王 이자성), 만(滿, 만청滿淸)의 삼각지세(三角之勢)였다. 사마귀가 매미를 노리고 까치가 그 뒤에서 노리고 있는. 오삼계는 틈왕과 연합해 만청에 대항하기도 애매하고 만청과 연합해 틈왕을 평정하기도 힘이 들었다. 병력을 계산해 보면 틈왕의 군사는 100만이라 했으며 만청의 병사도 10만이었다. 오삼계의 병력은 4만에 불과했다. 누구와 연합해도 상대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어정쩡한 가운데 놓인 오삼계는 양쪽 모두 만족하는 계책이 없었다. 더욱이 명예와 절의에 대해 말하자면 틈왕에게 투항하면 주인을 배반하는 게 되고 만청에게 투항하면 명 왕실을 배반하게 되는 셈이었다. 이렇게 해도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고 저렇게 해도 욕먹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곤경에 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체득하기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

 

역사의 중대한 고비에 오삼계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반드시 선택을 해야 했다. 사실 그는 일반인들이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실험해 봤다. 최초 틈왕 군대가 수도를 에워싸니 숭정 황제는 영원 땅을 버리고 구원병으로 오삼계를 불러들일 결심하자 그는 무기들을 수습하고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명 왕조는 이미 멸망했으니 구하려 해도 이미 늦어 버렸다. 급변하는 형세에 직면한 오삼계는 심적 모순에 빠졌다. 그는 원래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부친의 서신을 받아보고는 새로 태어난 대순(大順, 이자성이 세운 나라) 정권에 대항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하여 자신의 군마를 이끌고 투항하러 서쪽으로 나갔다.

 

그런데 얼마 가지도 못하고 중요한 정보를 듣게 된다. 북경에 남아 있던 명 왕조의 3품 이상의 관원들 중 아주 개별적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체포됐고 부친 오양도 고문을 당했으며 가산도 몰수됐다는 소식이었다. 농민봉기군들은 자금성에 입성한 후 곳곳에서 항복한 관리들을 체포해 고문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는 행위를 자행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다. 부친이 고문을 당하고 애첩을 빼앗기고 친족들이 능욕을 당한 후 어쩔 수 없이 오삼계는 투항할 마음을 돌렸다.

 

오삼계는 죽음도 생각했으나 여러 장수들이 만류했다. 도학가(道學家)들에게는 자살이란 명예와 절의를 지킬 수 있는 상책이 돼 호연지기의 미담이 될 수도 있으나, 삼군을 통솔하는 장수에게는 가장 무책임한 행동이 될 수 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자성의 대군이 코앞에 들이닥쳐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자 오삼계는 청병을 끌어들일 결정을 하게 된다.

 

 

 

 

그때 상황도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오삼계가 청병을 끌어들일 때 투항한 것이 아니라 만청과 연합했을 뿐이었다. 위원대(威遠臺)에서 만청과 맹약을 맺은 내용은 명확하다. 명이 지킬 수 없는 경기(京畿)지역을 만청에게 내주고 청병과 연합해 틈왕을 평정하려 했다. 그렇게 하여 장강을 경계로 통치하는 남북조의 형세를 만들려 했다. 이는 남명(南明) 홍광(弘光) 정권의 입장과 완벽히 일치했다. “계급적 원한”이 “민족적 원한”을 초월한 것이요 “내부가 평안한” 것이 “외족을 물리치는” 것보다 앞선 판단이었다. 봉건 왕조의 정통 관념으로 볼 때 비단 질책을 당할 일이 아니고 보편적인 찬양을 받을 일이었다. 그렇게 오삼계는 산해관에서 도르곤과 연합해 이자성을 공격한다.

 

그 연합은 오삼계가 먼저 출병해 공격하고 도르곤은 후원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도르곤은 오삼계에게 “군(오삼계)이 주(主)요 나는 객(客)이니 주가 앞장서고 객이 뒤를 받쳐 주는 것이 맞다”고 했다. 오삼계가 내란을 평정하는 것을 돕겠다는 뜻이 된다. 만약 오삼계가 만청에게 투항한 것이라면 드세고 오만한 도르곤이 어찌 오삼계를 ‘주’라 하고 자신을 ‘객’이라 했겠는가?

 

그러나 오삼계의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희망사항은 청병을 빌어 명 왕조의 세력을 계속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도르곤은 그렇지 않았다. 청병이 산해관을 넘어오기 이전에 오삼계는 그들의 힘을 이용해 이자성의 농민군을 공격하려 했었다. 명 왕조의 입장에 서서 청병과 연합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도르곤에게 구원을 요청한 서신에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나중에 청 왕조를 반대하며 기병할 때 강희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 “도르곤이 앞의 맹세를 배반했다”고 한 것으로 보면, 오삼계의 목적은 투항이 아니라 연합이었음을 분명하다.

 

만주족들은 북경으로 들어 온 후 화북지방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천하를 석권하려 했다. 정국의 흐름이 오삼계의 계획과는 반대로 흘러갔다. 그는 청나라 만주족들이 중원으로 들어온 국면을 되돌릴 힘이 없었다. 자신의 지위와 세력을 보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최초의 연정에서 투항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오삼계가 그런 험난한 길을 선택한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헤어 나오지 못하는 형국이 됐다. 변발을 하고 틈왕 이자성을 쫓아 서남으로 진군하게 되면서 청나라에 투항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항복한 한족 신하가 됐다. 틈왕은 평정됐다. 원수를 갚은 것이다. 그러나 명 왕조도 멸망했다. 명예와 절의도 사라졌다.

 

그런데 청나라에 투항이 오삼계의 본래 목적은 아니었다. 오삼계가 운남(雲南)으로 간 후 반청(反淸)을 준비했다. 예를 들어 군사상 그는 이자성, 장헌충의 남은 부대를 모아 충용(忠勇), 의용(義勇) 등 10영을 짜 훈련하면서 세력을 확충했다. 경제적으로 화폐를 주조하고 염전과 금, 동 광산 등을 독점하고 세수를 늘리면서 재력을 쌓아나갔다. 인사 방면에서는 인재를 불러 모으고 도당을 결성하면서 많은 골간들을 양성해 자기 조직의 구성원으로 삼았다. 이런 행위는 자본을 축적하고 청나라에 대항하려 준비했다는 것을 말한다. 정식적으로 기병한 후 즉시 “함께 대명(大明)의 문물을 들고 일어나 중하(中夏)의 건곤(乾坤)을 회복하자”는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엄하게 부하에게 “두발을 기르고 의관을 고쳐 입도록” 명했다. 이것을 보면 단순히 운남에서 ‘황제’가 되려 했던 것이 아니라 만주족 정권을 반대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만주족이 중원으로 들어온 지가 30여 년이나 됐고 사람들은 또다시 혼란이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았다. 뛰어난 황제라 평가받는 강희(康熙)의 통치 아래 중원은 정치상, 군사상, 경제상 발전을 구가하고 있을 때였다. 오삼계도 자신이 열세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삼계가 자신의 영달을 위해 청나라에 투항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개인의 부귀영화를 추구했다면 평서왕(平西王)이라는 높은 자리까지 앉은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기병했겠는가?

 

 

 

 

명 왕조가 멸망하는 데는 오삼계가 중요한 역할은 한 것은 분명하다. 명 왕조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망하는 것보다 틈왕 이자성에게 망하는 것이 좋았다고만 할 수 있을까? 명나라는 그 자체의 모순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 명 왕조는 상하를 막론하고 내홍이 끊이지 않았다. 자멸했다는 것이 맞다. 오삼계는 명 왕조를 구하기 위해 아무도 바라지 않았던 책략을 실행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명 왕조는 멸망했다. 이는 명 왕조가 회복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음을 역설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닐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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