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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회] 천부적인 목마기술과 처가의 목마지도로 이룬 성공담

 

헌마공신으로 유명한 김만일의 부인도 남평 문씨다. 위의 경주 김씨 입도조인 김검룡의 7세손인 김만일은 남원읍 의귀리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정식 군인인 정병(正兵) 출신의 김만일은 혼례를 치를 때까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됨됨이를 알아본 당시 명문가 출신인 문시봉이 그를 사위로 맞아들이면서 그의 운명도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장인 문시봉은 1555년(명종 10년)에 일어난 을묘왜변을 앞장서 막아낸 주역 중 한 분으로, 자랑스러운 제주선인이다.

 

헌마공신 김만일(1550-1632)은 청년시절 처가에서 얻은 말 한 필을 시작으로, 1만여 필의 양마를 소유했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정묘호란으로 이어지는 국가적 위기에서, 김만일은 나라가 필요한 말들을 바침으로써 헌마공신의 칭호를 얻었다.

 

게다가 광해군으로부터 정2품 벼슬인 중추부 지중추부사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제수되고, 품계가 종1품의 승정대부에 이르렀으니, 조선시대 제주선인으로서는 최고위직에 오른 셈이다. 김만일이 쌓아올린 업적으로 후손들도 230년간 산마감목관을 세습하였다. 다음은 1841년 부터 2년간 제주목사를 역임한 이원조의 탐라지초본에 기록된 대목이다.

김만일은 정의현 사람으로 일찍이 한라산 숲속에서 수말 한 필을 얻었다. 하루는 그 말을 잃어버렸는데, 여러 달이 지난 뒤 암말 10여 필을 거느리고 돌아왔다. 해마다 새끼를 낳아 3, 4년 사이에 천여 필이 되었다.

 

이어서 제주출신인 김석익의 ‘심계집’에 실린 내용도 들여다보자.

 

김만일은 정의현 사람이다. 젊었을 때 한라산을 넘는데, 말 하나가 울면서 그를 따라오니, 그 말을 집으로 데려왔다. 그런데 그 말이 하룻밤을 지낸 후 사라졌다. 여러 달이 지난 뒤에 그 말이 80여 필의 암 말을 거느리고 돌아왔다. 해마다 새끼를 낳아 불과 3, 4년 사이에 천 여 필에 이르러 산야에 가득 차 통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산마 (山馬) 500필을 뽑아 조정에 바쳤다. 나라에서는 특명으로 그 자손에게 감목관의 벼슬을 세습하게 하였다.

 

 

 

실존인물인 김만일에 대한 성공담은 전설과 같이 여러 사람들에의해 전해지고, 내용도 다양하다. 그가 얻은 말이 암말이라는 기록도 있다. 결혼선물로 사위에게 준 수말이, 초자연적인 별인 방성(房星)이 보낸 말로 전설화 되어 여러 사람의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공통적인 기록으로는 한 마리 말을 3, 4년 사이에 천 마리로 키웠다는 사실이다. 그의 말 사육은 천부적인 경영기법에서 비롯된 듯하다. 1704년(숙종 30년) 10월 송정규 목사가 쓴 ‘해외견문록(일본 天理大學 소장)’의 ‘김만일목마(金萬鎰牧馬)’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말 한 필을 구하게 되자 다른 무리에 부쳐 길렀는데, 앞서 건초묶음을 만들어 한 집안 가득 채우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비웃었다. 말이 점점 번식해 수십 년이 지나자, 한라산 동쪽 100여 리의 땅에 말 떼가 가득차, 골짜기 단위로 그 수를 헤아려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해이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부지런히 일했다. 남에게 좋은 말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값을 따지지 않고 사들여 종마로 삼았다. 이로써 준마와 양마가 많이 생산되니, 세상 사람들은 김만일의 산마장에 들어가야 세공마와 어승마가 다수 나온다고 말했다. 전후에 걸쳐 말 천여 필을 바칠 때마다 조정에서는 이에 보답하니 관직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이처럼 크게 일군 데에는 천부적인 김만일의 목마기술에 더하여 처가의 목마지도도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경주 김씨 족보에는 김만일의 처가, ‘남평 문씨 시봉의 녀’라고 적혀 있다. 문시봉(文時鳳), 문가(文家)에서는 꽤 친숙한 이름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시봉의 아우인 원봉이다. 문씨 가문뿐만 아니라 제주 관련 역사서에도 등장 하는 문시봉은 말을 잘 부리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를 두고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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