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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회] 을묘왜변의 전세를 뒤집고 김만일에게 말과 목축기술을 전수 한 인물

 

 

제주도를 왜구의 본거지로 삼으려는 데에서 비롯된 을묘왜변 초기의 상황을 들여다보자. 1555년(명종 10년) 6월 60여 척의 배에 1,000여 명의 왜구가 제주시 화북포구로 들어와 제주읍성을 공략 하였다. 조선 초기의 제주읍성은, 병문천과 산지천을 자연해자로 삼아 그 안쪽에 성을 쌓았었다.

 

을묘왜변시 왜군은 지금의 동문로 터리와 사라봉 사이에 있는 높은 언덕에 진을 치고, 제주성안을 내려다보면서 공격했다. 이런 지형지물을 이용한 왜군의 기습 공격으로 초기에는 관군이 상당한 열세에 처했다.

 

당시의 제주목사 김수문은 이러한 상황을 역이용하는 책략을 발휘하는데, 읍성을 방어하면서 별동대 70명을 조직하여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이 작전이 적중하여 왜선 9척을 빼앗고, 수백 명의 적을 사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내용이다.

 

제주목사 김수문(金秀文)이 왕에게 보고하기를, ‘6월 27일 무려 1,000여 명의 왜적이 뭍으로 올라와 진을 쳤습니다. 신이 날랜 군사 70명을 뽑아 적진 앞으로 돌격하여 30보의 거리까지 들어갔습니다. 정로위(定虜衛) 김직손, 갑사(甲士) 김성조•이희준, 보인(保人) 문시봉 등 4인이 말을 달려 돌격하자, 적군은 드디어 무너져 흩어졌습니다. 홍모두구(紅毛頭具)를 쓴 한 왜장이 자신의 활솜씨만 믿고 홀로 물러가지 않으므로, 정병 김몽근이 적의 등을 쏘자 곧 쓰러졌습니다. 이에 아군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참획(斬獲)이 매우 많았습니다. (조선시대의 군병으로는, 실제로 군무만을 담당하는 정병과, 병역 의무자이긴 하나 직접 군복무를 하지 않는 보인, 제주와 같이 변방 지역 수비만을 전담하는 갑사로 나눠졌었다.)

 

진을 치고 완강하게 버티던 왜적들이 문시봉 등 4명이 말을 타고 돌격하자 비로소 흩어졌다. 이는 제주에서 을묘왜변의 전세를 뒤집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문시봉은 말과 함께 적진으로 내달려 적을 섬멸한 데서 보듯 말을 잘 다루는 무인이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 추측한다면, 김만일은 처가에서 말 한 필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장인 문서봉(文瑞鳳)에게서 목축기술에 더하여 말에 대한 애정도 함께 물려받았으리라 여겨진다. 문시봉과 문서봉은 형제다. 이에 관한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처가에서 받은 수말이 어느 날 사라졌다가 며칠 후 암말 10여 필을 데리고 나타났다. 장인의 말들임을 직감한 김만일은 장인목장으로 말들을 데려갔으나, 다음 날 그 말들은 다시 김만일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는 곧 김만일이 말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를 읽은 장인은 사위에게 간 말들을 또한 결혼선물로 주었다. 김만일은 이를 기반으로 하여 3, 4년 사이에 1000여 필의 말들로 키워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제주에서는 여자의 생활력이 가정경제를 좌우했다는 점이다. 어려서부터 가정과 목장에서 말들과 생활한 문씨 부인의 내조가 또한 크게 작용하였으리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다. 한 필의 말에서 1만여 필의 말들로 늘어나게 한 것은, 결국 김만일 부부의 말에 대한 애정과 끊임없는 목축기술 연마에서 얻어진 결과일 것이다.

 

또 하나의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부친상을 당한 김만일 조부는 부친의 묘지로 삼을 명당을 찾아 나섰다가 호종단을 만났다. 호종단이 명당이라 정해준 곳의 지맥에서 비둘기 한 쌍이 솟아나와, 한 마리는 동쪽으로 날아가 앉고, 한 마리는 서쪽으로 사라졌다. 호종단은 “이곳에 아버지를 모시고,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가 앉은 곳에는 집을 지으시오. 집을 짓되 살아있는 나무를 그대로 기둥 삼아 지으시오. 그러면 국운이 다할 때까지 기운을 지탱할 것이오.” 하고 알려주었다.

 

이에 김만일의 조부 김보는, 호종단이 말한 곳에 아버지 묘를 모셨다. 김만일의 아버지 김이홍은 호종단이 말해준 의귀리 종가 터에 집을 지었는데, 김만일은 비둘기가 날아가 앉았던 곳에서 태어났다 전한다. 이 지역의 이름이 ‘반드기왓’이기에, 호사가들은 김만일과 관련된 전설을 ‘반드기왓의 전설’이라 전하고 있다.

 

 

 

김만일은 준마의 맥이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다는 판단으로, 말에 일부러 흠집을 내어 종마를 보존했을 정도였다. 김만일 생전에 제주에 유배 온 이건은, 그가 남긴 ‘제주풍토기’에 김만일이 수령들의 착취로부터 준마가 멸종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종마의 눈을 찌르고 귀와 가죽을 찢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적지 않은 목사들이 그러했듯, 제주에 온 관리들은 여러 이유로 김만일의 목장에서 많은 준마들을 빼갔다. 숙종 때의 문인인 북헌 김춘택은, 아버지 김진구에 이어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특히 김춘택은 5번의 유배형 중에 2번이나 제주와 기연을 맺는 특이한 기록을 갖고 있다. 다음은 김춘택의 시이다.

 

어쩌다 벼슬 내려오는 분네들 / 흐트러지게 놀다가 정신 못 차리는 구나 / 맛 좋은 술에 취해 호기를 더하고 / 분단장 여인 후려내 명성을 더하지만 / 늘 좋은 말을 빼앗고 / 진주도 남몰래 낚아채가는구나 / 그러니 섬사람들이 무엇을 바라겠는가 / 어사님께 추상같은 위엄 있기만을

 

제주는 예로부터 말의 별자리인 방성(房星)이 비치는 땅으로 알려져 왔다. 이를 증명하듯 이 땅은 문씨 부인의 내조를 받은 헌마공신 김만일이라는 출중한 인물을 낳아 크게 키웠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8준마 중 하나인 ‘응상백’이 제주산이듯, 준마가 탄생하는 고장이 제주의 운명이었다. 헌마공신 김만일과 정경부인 문씨를 키워낸 곳 또한 제주의 운명이고 숙명이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부인의 직급은 남편의 관직을 따르며, 정1품은 정경부인, 정2품과 종2품은 정부인, 정3품 당상관은 숙부인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를 두고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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