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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지형, 조류, 풍향 등 영향으로 태평양 연안에 분포

 

일본인들의 한반도 연안 출어(出漁)는 1883년에 7월 25일에 조인된 ‘조선국(朝鮮國)에 있어서의 일본인민무역규칙(日本人民貿易規則)’ 제42조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밀어(密漁)가 행해졌으며 특히 제주도 주변에는 일본 잠수기업자(潛水器業者)들이 일찍부터 침범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제주지역에 출어하면서 제주도민과 충돌하게 되었고 급기야 일본 정부는 1884년 9월부터 1891년 11월까지 제주도에 출어 금지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 금어(禁漁)기간 중에도 밀어는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제주 근해의 어장은 급속히 황폐해 졌다. 이 때 일본인 잠수기업자가 채취한 것은 주로 전복과 해삼이다.

 

「한국수산지」 3권(1910)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전복은 연해안에 생산되지 않은 곳이 없고 거의 무진장이라고 할 만큼 풍부하였으나 일찍 일본 잠수기업자의 도래로 남획이 된 결과 지금은 크게 감소하였다. 예전에 토착잠수부들이 이를 채취해왔으나 지금에는 종일 조업을 하여도 1~2개를 얻는 데 불과하다. 잠수기업자는 약간 깊은 곳에서 조업하기 때문에 다소의 어획이 가능하지만 예전과 같이 큰 이익을 얻기는 힘들다. 특히 본도산은 모양이 거대해서 유명하지만 오늘날에는 대체로 소형이 되었다.”

 

제주 해녀들이 언제부터 출가(出稼)물질을 시작했을까? 전문가들은 오래 전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출륙금지령이 해제되고 제주해녀의 출가 물질이 본격화된 이유는 1880년대 말 제주연안에 나타난 일본인 잠수기업자들의 남획(濫獲)으로 인한 제주어장의 황폐화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제주 근해 어장의 황폐화가 제주해녀의 출가물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일본인 무역상의 등장으로 해산물의 경제적 가치가 상승하기 시작함에 따라 해녀들의 생산욕구가 강해졌고, 일본잠수기업자들에 의한 제주어장의 황폐화는 제주 해녀들을 새로운 생산현장으로 활발히 이동시켰다. 제주해녀의 출가는 생산영역이 확장과 생산 활동의 증가를 의미한다. 이때부터 제주해녀들은 쿠로시오(黑潮)를 타고 세계의 바당밭을 누비고 다녔던 것이다.

 

제주해녀의 출가물질은 1895년 부산 영도 앞 바다에서 최초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그 후 해녀들은 조선 전역과 일본, 대련, 청도까지 출가물질을 나갔다. 1910년대 전반의 출가자수는 2,500명, 1910년 말에는 부산, 울산까지 출가한 해녀수가 4,000명 이다.

 

조선에서 가장 큰 섬이오 가장 남쪽에 잇는 제주도(濟州島)에서는 사나이보다 여자가 만히 활동하야 물속에도 들어가고 멀니 본초로 쟝사도 단인다 함은 우리가 임의 들은지 오래이며 해녀(海女)의 활동으로 생산하는 돈이 일년에 수백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와 가치 매년에 바다에 나가서 해조류(海藻類)와 어류를 잡는 여자의 수효는 만여명에 달하고 그중에 매년 사월부터 구월까지 부산(釜山) 울산(蔚山) 등디에 나아가서 활동을 하는 여자의 수효가 사천명 이상이나 되며 륙칠장 이상이나 물속으로 들어가셔 뎐북과 기타 해조를 따내는 동시에 여러 가지 바다속의 발견도 만히 하얏다 .

 

이네의 수입은 한사람이 평균 삼백원 갑엇치를 생산함으로 사천명의 총수입은 실로 일백이십만원의 큰돈을 생산하야 실로 조선 수산계에 적지 아니한 수자를 차지할 뿐 아니라 적게 말하면 그네의 활동은 제주도의 생명이오 다시 말하면 조선 산업계에 중대한 현상이다(동아일보, 1920년 4월 23일).

 

한반도에 출가한 제주해녀의 분포를 살펴보면, 동해안지대가 가장 조밀하며 북서부 해안지대가 그 다음이고, 남부해안지역, 북부해안지역 순서로 분포되어 있다. 주로 해안 지형 및 해저 지형, 조류, 풍향 등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이로 인해 일본으로 출가한 제주해녀는 동해안 지역에는 거의 없고 주로 태평양 연안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곳에 움막을 치고 잇는 제주해녀(濟州海女)의 그들의 일행은 모두 이십명인데 그중에 해녀가 열여덜이오 선부가 두명이외다. 매년 일차 뎡귀뎍으로 고군산에 와서는 다른 사람이 잡지 못하는 해삼(海蔘)과 전복을 잡아서 판다고 합니다. 일년이면 느진 봄부터 일은 가을까지 다섯달동안 이와 가티 나와서 벌면 한사람에 이백원식은 가지고 돌아간다는데 그들은 대개가 꼿다운 여자들로 나히 이십 이상으로 이십오륙세까지오 전부가 유부녀라 합니다.

 

대개 해녀선 한척이면 선부가 이삼인이 딸흐는데 그 남자들이 물주(物主)노릇을 하고 겸하야 서긔의 일을 보는 관계로 제주 자긔 고향에서 뎨일 품행이 단정하고 일촌사람이 모두 흠양하는 사람이라야 해녀들이 딸하 나선다고 함니다. 이리하야 선부는 자긔의 딸들과 가티 대접하고 처녀들의 자긔의 아버지와 가티 섬기어 돌아다니는 동안 일가족과 갓고 단란한 살림살이를 하며 생사존망을 가티함니다(동아일보, 1928년 6월 29일).

 

제주해녀의 출가는 객주의 모집에 의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객주가 절영도(絶影島)에 정착하며 일본인 무역상 밑에 있으면서, 매년 음력 12월경 제주도 각지에서 해녀를 모집하여 전대금을 건네주고 계약한다. 해녀는 기선으로, 뱃사공, 감독자 역(役) 남자는 어선으로 본토에 도항하여 부산에서 합류한 후 출가지로 떠난다.

 

독립 출가는 해녀의 남편 2~3명이 공동으로 어선을 매입하여 가족, 친척 등의 해녀를 승선시켜 출가지로 가는 것이다. 전자와 후자의 비율은 6대 4정도로, 객주의 모집에 의한 것이 많았다. 해녀 10명에 시중드는 남자 5명인 경우, 1어기(漁期) 수입은 대략 870원 정도이고 지출은 731원 50전으로 차액은 138원 50전이다. 이것을 균등 분할하면 1인 평균 9원 23전 정도다. 제주 해녀의 출가물질로 인한 소득은 1922년에 19만원, 1923년 22만원으로 1930년대 중반까지 날로 늘어났다.

 

1937년 제주도세요람(濟州島勢要覽)에 의하면 1937년 3월 한반도 연안에 2천8백1명 출가했다고 한다. 지역별로는 경남 1650명, 경북 473명, 전남 408명, 충남 110명, 강원 54명, 황해 50명, 함경남도 32명, 전북, 19명, 함북 5명 등이다.

제주해녀는 조업시(助業時) 테왁을 이용해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분동을 사용하지 않고 깊이 잠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분동해녀처럼 해녀배나 사공이 필요 없었다. 따라서 채취 비용이 싸다. 일본 이세(伊勢) 해녀는 1개월 조업 중 겨우 일주일밖에 견디지 못하는 데 비해, 제주해녀는 15일간이나 조업이 가능하였고(경상북도 울산군 포항 등지) 하루 조업 시간도 월등히 길었다. 이렇게 조업 시간이 길고 임금은 낮다는 경쟁력 덕분으로 1929년 이후 한반도에서 일본 이세(伊勢) 해녀들을 완전히 추출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제주해녀의 왕성한 출가 물질로 인해 출가지(出嫁地)에서 현지인들과의 크고 작은 분쟁들도 생겨났다.

 

절해고도인 전남 무안군 흑산도(全南 務安郡 黑山島) 주민이 제주해녀의 침습으로 생계를 일케되엇다 함은 긔보한 바어니와...주민 오십칠명의 련명으로 십칠일 오전에 조선총독에게 진정서를 뎨출하얏는데 그 진정서의 내용을 보면 태상도와 태중도(苔中島) 주민 사백여명은 순전히 바다속에서 채취되는 텬초(天草)로 겨우 호구하야 가는데 제주도 해녀가 일본사람의 발긔로 해녀조합을 만들어 가지고는 그것을 빙자하야 해마다 흑산도를 침습하야 도민이 채취하든 해산물을 모조리 캐어감으로 여러번 분쟁이 일어낫스나 림장하는 경비선들은 돌이어 조합측을 옹호함으로 호소할 길이 업서 총독부에 진정하는 것이라더라(동아일보, 1928년 5월 19일).

 

한편 일본으로의 해녀출가가 활성화된 계기는 1924년 일본과의 직항로 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제주해녀는 주로 기선(汽船)을 이용하여 출가하였는데, 기선에 의한 일본 본토로의 출가는 쓰시마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대판을 경유하였다. 당시 대판 제주간 항로에는 조선우선(朝鮮郵船), 니기기선(尼琦汽船), 녹아도상선(鹿兒島商船) 등 3개 회사 선박이 경쟁적으로 여객을 실어 날랐다. 이 기선들은 제주해녀들을 가장 값싼 운임으로 중간에 모지, 시모노세키 등지에는 기항 하지 않았고 일본 내륙까지 보내 주었다. 이후 제주해녀들은 철도로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였다. 제주해녀가 일본에 진출했던 최초의 사례는, 김녕 사공 김병선이 해녀를 고용하여 동경 미야케지마 지역에 출가하여 조업하였던 것이다. 1932년 당시 동경 미야케지마에 240명 해녀가 고용되어 작업했다.

 

제주지역 해녀가 육지나 타 지역으로 출가하려고 할때는 관계당국의 허가를 받아 출가증(出嫁證 )을 얻어야 했다. 이를 위해 1인당 3원씩을 납부해야 했다.

 

1937년 제주도세요람(濟州島勢要覽)에 의하면 일본으로의 출가해녀는 1,601명이리고 한다. 지역별로는 대마도(對馬島) 700명, 정강(靜崗)265명, 동경(東京) 215명, 고지(高知) 135명, 장기(長崎) 65명, 록아도(鹿兒島) 55명, 천엽(千葉) 51명, 덕도(德島) 10명, 도근(島根) 10명 등이다. 이들 중에는 일본에 정착한 경우도 있다.

 

이외에도 블라디보스토크에도 물질을 갔었고 칭따오에 80여명의 제주해녀가 물질 나갔다. 이들은 5월에 칭따오로 가서 8월 추석 전에 고향에 돌아왔는데 평균 300원 정도의 수입 올렸다고 한다(당시 소학교 교사 봉급이 40원이었다).

 

1929년 당시 제주도내 해녀 7,300명이 도내 연안에서 채취활동으로 약 25만엔을 벌어들인 데 반해, 일본에 출가물질 간 해녀 3,500명이 40만원을 고향에 송금했다고 한다. 이것은 일본으로 출가한 제주해녀들의 소득이 매우 높았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제주대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고 동국대에서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2011) 학위를 받았다. 제주도 경제특보에 이어 지금은 지역산업육성 및 기업지원 전담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겸임교수로 대학,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등이 있으며『문화콘텐츠기술과 제주관광산업의 융복합화연구』(2010),『제주형 첨단제조업 발굴 및 산업별 육성전략연구』(2013),『제주자원기반 융복합산업화 기획연구』(2011) 등 보고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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