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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54)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청(淸) 태조(太祖) 누루하치((Nurhaci, 노이합적 努爾哈赤, 1559~1626), 아이신 기오로(Aisin gioro, 애신각라 愛新覺羅) 할라(씨氏)다. 건주(建州 현 요녕遼寧 신빈新賓)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무공을 좋아했고 활쏘기와 말 타기에 능해 무예가 남달랐다고 한다. 건주 좌위지휘직을 세습한 후 건주여진, 해서(海西) 여진 등을 연이어 정복해 만력 44년 대금(大金)을 건국했다. 천명(天命)이라 연호를 세우고 한(汗, 몽골어 칸Khan)이라 불렀다. 천명 원년(1618)에 명(明)을 공략한다. 수년 동안 무순(撫順), 요양(遼陽) 등의 성을 함락시키고 심양(瀋陽)으로 천도했다. 1626년 괴저병으로 애계보(靉鷄堡)에서 죽었다.

 

1616년 누르하치는 때가 왔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한의 지위에 올라 국호는 금(金)나라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대금으로 지었다(12세기 해서여진의 아구다Aguda가 세운 금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후금이라고 부른다). 여진의 이름도 만주(滿洲)라고 개칭했다(만주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불교의 문수보살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누르하치는 어르더니(Erdene)에게 명해 만주문자를 만들고 팔기(八旗)군 제도를 제정했으며 도성을 허투아라(hetuala 혁도아랍赫圖阿拉)로 옮겼다.

 

그중 팔기군 제도는 군사를 여덟 가지 색으로 구분했고 평상시에는 조세, 행정 등의 업무를 관장하다 전시에는 군대로 편성되는 유목민 특유의 조직이었다. 모든 만주족은 8개의 기 중 하나에 소속됐으며 후에는 몽골족이나 한족에 의해 편성된 팔기도 창설됐다. 이는 중국 중원을 차지할 때 강력한 군사력을 발휘했으며 훗날 중국본토 입성 이후에도 청나라 제도의 중심이 됐다.

 

 

 

 

누르하치는 자신이 계획하고 시작한 중국 본토를 향한 대업을 완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가 세운 기반 위에서 아들과 손자가 누르하치의 뜻을 이루었다. 8번째 아들 홍타이지(HongTaiji, 황태극皇太極)가 그의 뒤를 이어 2대 칸이 된다. 홍타이지는 나라 이름을 후금에서 청(淸)으로 바꾸고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했다. 본격적으로 중국본토로 들어가기 전에 명나라와 우호적이었던 조선을 침공해 병자호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홍타이지도 중국 본토에 입성하지 못하고 뇌출혈로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은 어린 순치(順治)제를 보좌하던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 도르곤(Dorgon 다이곤多爾袞)이 부왕이 돼 중국 정복을 완결했다. 그리고 마침내 1644년 북경에 여진족, 즉 만주족의 나라 청나라가 세워졌다.

 

청 왕조의 건립을 얘기하면 사람들은 먼저 청 태조 누르하치를 떠올린다. 대청大淸 왕조 300년의 강산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르하치 배후에 대청 천하의 기틀을 세우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 있다. 바로 누르하치의 친동생 슈르하치(Šurhaci 서이합제舒爾哈齊, 1564-1611년, 그의 차남 아민阿敏은 군사를 일으켜 정묘호란을 일으켰으며 여섯째아들 지르갈랑(Jirgalang, 제이합랑濟爾哈朗)은 정친왕(鄭親王))이다.

 

특수한 이유로 역사서의 기록은 많지 않지만 그의 자손들은 청 왕조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고 특별히 존중받았다. 청말(淸末) 함풍(咸豊) 황제가 열하(熱河) 피서산장(避暑山莊)에서 세상을 떠날 때 이친왕(怡親王) 재원(載垣), 정친왕(鄭親王) 서화(瑞華), 상서(尙書) 숙순(肅順) 등 8명에게 보정(輔政)하도록 유조를 내렸다. 이른바 ‘찬양정무왕대신贊襄政務王大臣’이다. 그중 서화, 숙순은 피를 나눈 형제로 세상 사람들은 ‘서삼숙육瑞三肅六’이라 부른다. 그들이 바로 슈르하치의 8대손이다.

 

누르하치에게는 5명의 형제가 있었다. 그러나 동복형제는 셋째 슈르하치와 넷째 야르하치(아이합제雅爾哈齊) 뿐이었다. 1583년 누르하치의 조부와 부친이 명(明)나라 군대에 의해 피살됐다. 누르하치는 부친의 직위를 계승해 건주를 다스리는 좌위도지휘(左衛都指揮)가 됐다. 당시 요동(遼東)을 다스리고 있던 진수(鎭帥) 이성량(李成梁)조차도 그리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때 누르하치는 25세, 슈르하치는 20세였다. 두 형제는 조부와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전투력을 증강시키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건주의 새로운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주변의 여진 수장들이 새로운 시작으로 대했을 뿐만 아니라 명 왕조와 조선도 두 형제가 지혜롭고 군사 지식이 많으며 지대한 꿈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당시 조선 정부는 그들의 소식을 접하자 누르하치는 스스로 왕이라 했고 그 동생은 선장(船將)이라 자칭해 “중원에 원수를 갚는다”는 뜻을 품고 있다고 명 왕조에 알렸다. 명 왕조 집권자들은 두 형제에 대해 관직과 재화를 주면서 회유했다. 누르하치는 도독(都督)으로 승진했고 용호장군(龍虎將軍)이란 칭호도 더했다. 슈르하치도 명 조정에서 도독이란 높은 직책을 하사했다. 그래서 건주 내부에서는 슈르하치를 ‘이도독(二都督)’이라 불렀다.

 

당시 군기대사는 누르하치 형제가 높은 곳에서 비밀리에 상의했다. 결정된 후 단호하고 신속하게 추진해 내막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1611년(만력 39)에 건주여진이 내부가 통일 됐다. 그리고 해서여진의 합달(哈達), 휘발(輝發) 2부를 멸망시켰다. 그렇게 수만의 정예병을 갖추게 됐다. 요동을 호시탐탐 노리고 중원을 바라보면서 제왕의 기세를 키우고 있을 때 슈르하치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청실록(淸實錄)』의 기록을 보면 1611년 8월 19일 슈르하치가 “훙(薨 죽음)하니, 48세였다”라고 돼 있다. 나중에 청대의 역사서에 슈르하치가 청 왕조에 위대한 공헌을 한 사실이 기록돼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의미심장한 무엇인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슈르하치는 어떻게 죽었는가? 역사 기록에는 그가 어떻게 죽었으며 상례는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고 있다. 당시 명 조정의 기록에는 “누르하치 추장은 그 동생 슈르하치가 강병해지는 것을 싫어해 계략을 세워 죽였다.”(왕재진王在晉 『삼조요사실록三朝遼史實錄』) “누르하치는 그 동생 슈르하치를 죽이고 군대를 병합했다.”(심국원沈國元 『황명종신록皇明從信錄』)라고 돼 있다.

 

명대 황도주(黃道周)는 그 골육상잔의 비극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추장(누르하치)은 동생이 딴 마음을 먹고 있다고 의심했다. 거짓으로 제1구를 굳건하게 만든다고 하며 낙성식 때 술상을 벌이고 동생을 연회에 불렀다. 침실로 들어가자 쇠사슬로 문들을 단단히 봉하고 구멍 둘만 남겨둔 채 음식을 들이고 대소변을 내놓게 했다. 동생에게 용맹하기로 소문난 비장(裨將)이 있었는데 추장이 동생을 보좌하는 것을 미워해 동생의 명령이라 거짓으로 꾸미고 집으로 끌어들여 요참했다.”(『박물전회博物典匯』)

 

청대의 옛 기록 『만문노당(滿文老檔)』에도 동생을 죽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1609년(만력 37) 3월경에 누르하치는 슈르하치가 자립을 도모한다는 이유로 누르하치의 아들 한 명과 부하 한 명을 죽이고 소속된 군민을 빼앗자 2년 후 슈르하지를 죽였다고 했다. 만약 당시에 슈르하치가 자신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누르하치는 계략을 세워 구금하고 동생의 측근들을 죽였을 것은 당연하다. 명나라 사람들의 누르하치가 동복형제를 살해했다는 말은 순전히 날조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누루하치가 자신의 동복형제를 죽였다면 왜 그랬을까? 도대체 무슨 이유로 가장 친했던 형제 둘이 골육상잔을 벌인 것일까? 물론 권력 투쟁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누르하치와 마찬가지로 슈르하치도 명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하사받은 건주여진을 관리하는 관원이었고 자신도 부하 장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가 형의 지휘에 복종만 했다면 누르하치와 아무 일 없이 편안하게 자신들의 꿈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슈르하치는 사납고 고집스러운 인물이었다. 강한 성격을 가진 동생이 형과 서로 대립하면서 여러 가지 모순으로 인해 갈등이 생겨났다. 형보다 강한 군대를 보유하지는 못했지만 슈르하치는 형을 떠날 결심을 했다. 누르하치에게 있어 슈르하치의 독립은 자신 신변에 또 다른 적이 생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 내부의 참살은 단순한 권력 투쟁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하기도 한다. ‘반명(反明)’과 ‘친명(親明)’의 투쟁이었다고 본다. 이는 명 조정의 ‘반간계’ 책략에서 비롯됐다. 명 왕조 정부는 슈르하치를 내세워 누르하치의 독립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곧바로 건주 우위(右衛)를 세워 동생에게 관직을 하사했다. 건주 우위가 다스리는 흑차목(黑扯木)은 요동 철령(鐵嶺) 동남쪽에 있었다. 형제를 양분시켜 요동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이른바 ‘이이제이’의 책략인 셈이었다. 결국 누르하치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중원으로 나아가려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동생을 죽였다. 분열로 인한 불확실한 미래보다 골육상쟁을 택한 것이다. 물론, 이런 이유가 전부일 수는 없다. 청 태조가 동생들 살해한 이유가 어찌 한둘일 수가 있겠는가? 여러 가지 중에 그나마 전술한 두 가지가 크다 볼밖에.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슈르하치가 그의 형 누르하치에게 피살됐다는 역사적 사실은 이미 공인된 상태다. 권력 투쟁에 의한 것이든 정견이 달라 생긴 갈등에 의해서건 명 정권의 음모에 의해서건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건 청 왕실의 기초를 닦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 슈르하치가 죽임을 당한 것은 사실이다. 슈르하치는 살아생전에 여진족의 미래를 위해 강성한 국가를 건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면서도 죽자마자 그의 이름이 사서에서 사라져버린 것은, 감히 그의 사인을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나라가 중원의 주인이 되고 나서 여러 왕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황제에 의해 명예가 회복됐지만 유독 슈르하치만은 누명을 벗지 못했다. 어쩌면 누르하치 후손들이 자신의 조상이 친동생을 살해했다는 오명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여진족들에게 있어 누르하치가 동생을 죽인 것은 왕업을 완성하는 과정 중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 일로, 그것으로 태조가 닦은 공공한 기반을 부정하고 싶지 않는 까닭일 수도 있다.

 

슈르하치의 아들 지르갈랑(Jirgalang 부친이 죽자 백부 누르하치가 키웠다)은 공을 세워 정친왕에 봉해졌고 청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왕작이 세습됐다. 이른바 ‘철모자왕(鐵帽子王)’이다. 그런데 부친의 오욕은 씻어주지 않고 그의 자손들에게 아버지의 음덕을 입게 만들어준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것일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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