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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60)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순치(順治, 1638~1661), 이름은 푸린(Fulin, 복림福臨), 홍타이지(황태극皇太極)의 아홉째 아들로 홍타이지가 죽자 여섯 살 나이에 황제 자리에 앉았다.

 

1653년 도르곤이 사냥을 나섰다가 사망하자 순치제의 친정이 시작됐다. 14세의 순치제는 도르곤이 정권을 찬탈하려고 했다는 역모 혐의로 추벌(追罰)했다. 그와 동시에 제왕(諸王)의 6부 관리를 금지시키는 등 제왕의 세력 억제를 꾀했고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는 정책을 취했다.

 

1659년 영명왕(永明王)을 운남(雲南)으로부터 미얀마로 내몰아 명나라 잔존 세력 대부분을 평정했다. 한인(漢人) 공신 오삼계(吳三桂) 등 이른바 삼번(三藩)이 난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면서 황제의 권력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평정했다. 명나라의 정치체제와 지배이념을 계승하고 한인을 등용했다. 명 말기의 폐정(弊政)을 바로잡아 인심 안정에 힘 기울여 중국 지배의 기초를 닦았다.

 

순치제의 치세 동안 안정화된 대청제국은 강희제(康熙帝)로 넘어가 가장 안정적인 국가의 기틀이 마련됐고 전성기를 구가하게 됐다. 순치 18년(1661) 천연두로 병사했다.

 

다시 말해 순치 황제 아이신기오로(Aisingioro, 애신각라愛新覺羅) 푸린은 청 왕조 개국 황제 홍타이지의 아들이며 만주족이 중원에 들어선 후 첫 번째 황제다. 6세에 즉위해 연호를 순치라 했다. 시작은 숙부 도르곤(다이곤多爾袞)이 섭정했으나 순치 7년 도르곤이 죽자 친정했다. 전후로 남명(南明) 복왕(福王), 당왕(唐王), 노왕(魯王) 등의 정권을 멸했다. 친정한 기간은 길지 않았으나 영민하고 용맹스러워 청대 근 300년의 통치를 위한 반석을 마련했다. 민간에 전해지는 순치 황제의 일사는 증손 건륭(乾隆)보다 많지는 않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순치 황제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출가해 승려가 됐다는 설이다.
 

 

 

청초(淸初) 문인 오매촌(吳梅村)은 그의 『청량산예불시淸凉山禮佛詩』에서 순치 황제가 오대산(五臺山)에서 출가했다고 에둘러 말하자 이때부터 “순치가 불문에 들어섰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그리고 몇 백 년 동안 꼬리를 물고 번져 나갔다. 오대산 진해사(鎭海寺)에 청백석(淸白石)으로 축조된 대탑이 하나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순치 황제의 시신이 그 탑 속에 묻혀있다고 한다.

 

위국조(魏國祚)는 그의 저서 『오대산』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순치 18년 정월, 순치 황제 나이 24살이 됐을 때 총애하는 도어(동악董鄂) 비(妃)가 죽자 마음이 답답하고 우울해 궁정 생활에 염증을 느꼈다. 황위를 버리고 오대산으로 출가했다.강희(康熙)는 태황태후의 명을 받들어 그의 부친 순치를 찾아 오대산으로 갔다. ……강희가 진해사에 도착하니 정전 앞에서 정원을 쓸고 있던 중년의 승려를 만났다. ……강희가 법명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나는 팔예(八乂)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강희가 남산사(南山寺)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八乂’는 ‘부(父)’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 승려가 그의 부친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그는 되돌아가 찾았으나 그 승려는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 절의 승려에게 묻자 승려의 대답이 더 묘했다. ‘우리 여기에는 당신이 찾으려는 승려가 없습니다.’ 강희는 문전박대당하고 실망해 사원을 나서면서 뒤를 돌아봤을 때 벽에 새로 쓴 시 한 구가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쓰여 있었다. ‘離俗當僧花山寺,不愼破碗被遷出,古有子債父來償,今希父債子來環(이속당승화산사,불신파완피천출,고유자채부래상,금희부채자래환)……’ 그 시의 뜻은 이랬다. 순치가 속세를 떠나 화산사에 출가하였을 때 부주의로 늙은 승려의 그릇을 깨뜨렸다. 옛날에는 아들이 부채가 있으면 아비가 배상했는데 지금은 아비의 부채를 아들에게 갚으라고 해야겠구나. 이 뜻은 아들이 배상하라는 말이었다. 시의 주제에 따라 강희는 강서(江西) 경덕진(景德鎭)에서 특별히 질그릇 사발을 만들어 오대산에 있는 절에 나누어 보냈다.”

 

상술한 순치 황제가 오대산으로 출가했다는 전설을 정말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역사는 어떻게 얘기하는지 알아보자.

 

순치 황제가 등극할 때 나이는 여섯 살에 불과했다. 숙부 도르곤과 지르가랑이 섭정했다. 순치 7년(1650) 섭정왕 도르곤이 죽자 순치 황제는 비로소 친정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이 열두 살이었다. 이듬해 보르지기트(Borjigit, 박이제길특博尔济吉特)를 황후로 삼았다. 순치는 황후를 싫어했으나 모친의 체면을 생각해 “사치를 즐겼다”는 구실로 혼인한 이듬해에 그녀를 ‘정비(靜妃)’로 강등시켰다.

 

순치 11년(1654), 황제 나이 열여섯 살 때 호르친(Khorchin, 과이심科爾沁) 버일러(패륵貝勒) 춰얼지(작이제綽爾濟)의 딸을 황후로 맞았다. 순치 황제의 비빈妃嬪은 동고(donggo, ‘돈고’라 하기도, 동악董鄂) 씨 황귀비(皇貴妃), 정비(貞妃), 숙혜비(淑惠妃), 공정비(恭靖妃), 단순비(端順妃), 영각비(寧慤妃), 각비(恪妃), 퉁쟈(Tunggiya, 동가佟佳) 씨, 묵투(Muktu, 목극도穆克圖) 씨, 파(巴) 씨, 진(陳) 씨, 당(唐) 씨, 뉴(鈕) 씨, 양(楊) 씨, 우수(Wūsū, 오소烏蘇) 씨, 나라(납나拉那) 씨 등이 있었다. 이렇게 많은 후비 중 순치 황제는 황귀비 동고를 가장 총애하고 신뢰했다.

 

동고비의 출신에 대해 민간에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청 왕조의 황귀비는 사실 강남의 유명한 명기 동소완(董小宛)이라는 것이다. 희곡 무대에서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전해져 온다.

 

 

명문세가이며 강남의 명사 모벽강(冒辟疆)은 강운루(絳雲樓) 주인 전겸익(錢謙益)과 그의 첩 유여(柳如)가 재촉하자 진회(秦淮)의 명기 동소완을 첩으로 들였다. 만청 군대가 남침하자 동소완과 모벽강은 헤어지게 된다.

 

만청에 투항한 명나라 장수 홍승주(洪承疇)가 동소완을 얻고는 그가 모벽강의 첩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동소완을 거짓으로 황실의 동고(董鄂)왕의 딸이라며 이름을 동고라고 고친 후 황궁으로 보내 버렸다. 순치가 동고를 너무 총애해 귀비에 봉했다.

 

모벽강이 알게 된 후 당시 예부시랑을 역임하고 있는 전겸익을 통해 태감을 매수하고 궁으로 들어갔다. 부부가 만나 서로 슬퍼할 때 황태후와 황후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 상황을 보고 대노했다. 결과는 동소완을 하얀 비단을 내려 자신케 했고. 순치 황제는 화가 치밀어 황제 자리를 내던져 버리고 오대산으로 출가해 버렸다. 모벽강은 고향 강소(江蘇)로 돌아가 평생 출사도 않고 고향에서 늙어 죽었다. 이런 내용이다.

 

그러나 사실상 순치의 총비(寵妃) 동고 씨는 결코 동소완이 될 수 없다. 두 사람의 연령 차이가 현격하기 때문이다. 동소완이 강남에서 잘 나갈 때 청 세조 순치는 고고성을 울리며 갓 태어났기 때문이다. 동소완의 남편 모벽강이 쓴 『영매암억어影梅巖憶語』에 동소완이 순치 8년(1651)에 세상을 떠났다고 명백하게 기록돼 있다. 그때 순치 황제는 열네 살에 불과했다. 동소완을 귀비로 삼을 수 없는 나이었다. 그렇다면 전기적 색채가 충만한 동고 비(妃)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동고 씨 황귀비는 원래 순치 황제의 동생 양(襄)친왕 보무보골(Bomubogor, 박목박과이博穆博果爾)의 왕비였다. 순치 황제 열여덟 살 되던 해에 동고 씨의 남편이 죽고 과부가 돼 집에 머물고 있었다. 만주족이 “형이 동생의 처를 받아들인다”는 풍습에 따라 8월에 그녀는 순치 황제에 의해 황궁으로 들어가 현비(賢妃)가 되고 12월에 황후 바로 밑의 황귀비에 봉해진다.

 

동고비는 자태가 아름답고 고울 뿐만 아니라 귀엽고 영리했다고 한다. 청 왕조의 황제들은 줄곧 불교를 숭상했다. 순치 황제는 선학(禪學)을 굳게 믿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동고비에게 참배하는 것과 참선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했던 동고비는 오래지 않아 불교에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다.

 

그래서 순치는 더더욱 황귀비를 총애했다.그녀는 순치 황제가 사치와 겉치레를 따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금옥과 같은 사치품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렇게 순치 황제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동고비는 순치 황제의 모친인 황태후에게도 효성을 다해 태후의 사랑도 받았다. 아침저녁으로 순치 황제와 함께 하면서 식사와 잠자리를 정성을 들여 뒷바라지 하며 어느 하나 소홀히 하지 않았다.

순치 17년(1660) 동고비가 아들을 낳자 순치 황제는 대단히 기뻐하며 황태자로 삼아 황위를 계승시킬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3개월밖에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그 일로 동고비는 너무 애통해 하다 병이 들어 8월 18일 승건궁(承乾宮)에서 병사했다. 그녀의 나이 22살이었다.
 

 

 

동고비가 병사하자 순치 황제는 비통해하며 동고비를 효헌(孝獻)황후에 봉하고 경산(景山, 현 북경의 경산공원)의 수춘전(壽椿殿)에서 추도식을 성대하게 치를 것을 명했다. 순치 황제는 8기군, 3품 관리들에게 21일 동안 경야(經夜)하도록 명했고 승려 108명을 소집해 참단(懺壇), 금강단(金剛壇), 범강단(梵綱壇), 화엄단(華嚴壇), 수륙단(水陸壇) 등의 법회를 열어 동고비의 망혼을 달래도록 했다.

 

순치 황제는 여러 차례 영전에 친히 제를 지내고 직접 『동고후행장董鄂後行狀』이란 애도문을 썼다. 수천 자에 이르는 애도사는 정이 넘치고 간절해 저절로 눈물을 흐르게 했다. 9월 9일 동고비의 유언에 따라 순치 황제는 불교의식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당시 유명한 승려 인계(茚溪)를 초청해 동고비의 화장을 집전하도록 했다.

 

동고비가 죽은 후 순치 황제는 비탄에 빠졌다. 아름다운 동반자를 잃었으니 자신의 인생에 아무런 의미도 남아있지 않다고 느껴 출가해 승려가 되려 했다. 그래서 동고비 장례 후 순치 황제는 동고비의 화장을 주관한 인계 화상에게 자신의 머리를 깎아달라고 했다.

 

인계 화상의 사부 옥림(玉林) 화상은 순치 황제가 삭발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10월 15일 친히 황성(皇城) 서원(西苑) 만선전(萬善殿)으로 나아가 출가하지 못하도록 순치를 만류했고 동시에 도반들을 모아놓고 인계 화상을 화장하겠노라고 언명했다. 그런 상황이 되자 순치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출가하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그러나 순치 황제도 원기를 회복하지 못했다. 비통에 빠져 과도하게 몸을 상하게 돼 동고비가 죽은 지 반년도 되지 않아 황궁에서 병사했다. 향년 24세였다. 임종 전에 그는 동고비와 마찬가지로 인계 화상이 화장을 집전하도록 청했다. 그래서 순치가 죽고 백일이 되는 날, 순치의 시신은 인계 화상에 의해 경산 수황전(壽皇殿)에서 화장됐다. 순치 황제와 동고비의 골회(骨灰)는 강희(康熙) 2년 하북성 준화(遵化)현 청동릉(淸東陵)의 효릉(孝陵)에 안치됐다.

 

 

사실상 순치 황제는 오대산에 가본 적이 없다. 영골도 진해사에 안치돼 있지 않다. 그의 아들 강희 황제는

다섯 차례나 “몽골 여러 왕들을 데리고” 오대산으로 참배를 갔지만 원래 목적은 오대산의 불교를 이용해 “몽골을 순하게 복종”시키려고 한 것이었지 부친을 찾거나 산수를 유람하려 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순치 황제가 오대산에 출가했다는 전설에는 어떤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순치황제어제동후행장』, 『청실록』, 『청사고』, 『인계어록』 등 사서에 보면 순치 황제가 승려가 되려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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