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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사회.경제적 변화 ... 제주도민 부역과 무조건 강제기부가 바탕

 

대동여지도를 보면, 제주도에는 제주성내(城內)를 중심으로, 남동으로는 성산포 및 정의읍까지, 남서로는 모슬포 그리고 한라산을 횡단하여 서귀포에 이르는 길과 기타 도로가 있다. 이 도로들은 한라산의 경사면과 직각 또는 평행을 이루고 있다.

 

1910년대 초 제주도내 도로는 성내를 기점으로 해서 성산포로 가는 길, 정의읍으로 가는 길, 대정읍을 거쳐 모슬포로 가는 길, 연안(沿岸) 각 마을을 거쳐 섬을 일주(一走)하는 길, 한라산 중턱을 횡단하여 서귀포로 가는 길 등 4~5개 노선에 불과했다. 이 도로들은 배수시설이 없고 교량이 가설되어 있지 않아 비만 오면 마치 하천과 같이 도로를 따라 많은 빗물이 흘러 내려 사람이나 마차의 통행이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이 ‘신작로(新作路)가 생겨났다. 신작로 즉, 제주도 해안 일주도로는 1912년부터 1914년간 당시 도당국과 경찰서가 협력해 일주도로 건설 계획을 세우고 지방비 보조와 도민의 부역환산금(夫役換算金)으로 건설됐다. 제주도민의 부역과 노선이 지나가는 곳이면 무조건 강제기부(寄附)에 의존해 도내 각 해안마을을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한 것이다. 이어 1914년부터 3개년 계획으로 일주도로 181㎞를 노폭 6m로 확장하여 자동차가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신작로가 건설되어 차마(車馬)의 왕래가 다소 편리해 지긴 했지만 그때 가설한 교량이 2~3개에 불과해 호우로 인해 건천이 범람하게 되면 매번 교통이 두절되고 도로가 훼손되기 일쑤였다. 또한 신작로 개통 초기에는 자동차가 제주도내에 충분하지 않아 자동차를 정기적으로 운행하지 못했다.

 

자동차가 제주도내를 정기적으로 운행된 것은 1924년 제주운송합자회사가 생겨나면서 부터이다. 1925년에는 최윤순(崔允淳)이 일본인과 합자해서 자본금 2만원으로 제주통운주식회사를 세워 자동차 운수사업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특정한 사람만이 자동차를 이용해 교통 발달의 파급 효과가 일반인에게 확산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동차회사들은 개업한지 5, 6년 동안은 적자를 면치 못하다가 그 후 점차 이용자가 증가하며 활성화되었다. 운송 노선은 대부분 모슬포, 성산포와 같은 해안지역을 경유하도록 편성되어 있었다. 요금은 60전 정도로 당시 노임이 1원 안팎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다소 비쌌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 신작로가 노폭 10m, 총연장 181㎞ 일주도로로 다시 단장되었다. 당시 제주도에는 제주통운회사, 남부운수회사, 동부자동차 등 3개 운송회사에서 택시 2대, 12승 1대, 28인승과 35인승 28대를 가지고 제주도내 운송을 담당하고 있었다. 1936년 제주도에는 자동차 27대, 리어카 21대, 자동자전거 5대, 자전거 1,192대, 손수레차 76대, 짐마차 22대가 있었다.

 

이처럼 자동차가 늘어나다 보니 자동차로 인한 사회문제도 발생했다.

 

본도에 자동차가 통행한지 아직 일년 미만에 만인(萬人)이 통행하는 공도(公道)를 맛치 자동차 전용도로가치 녁이고 통행하는 하축(荷畜)을 짐짓 경겁(驚劫)케 하야 하물(荷物)을 전복산란(轉復散亂)케 하고 노방(路傍)의 군축(群畜)을 감금 둔산망일(遁散亡逸)케 굴기를 희극(戲劇)으로 하며 행인을 무단(無端)히 구타(毆打)하고 심(甚)하야는 사형(私刑)까지 집행(執行)하는 등(等) 언어도단(言語道斷)의 폭행(暴行)과 법정(法定)한 서행 구역내(徐行 區域內)에서 함부로 급구(急驅)하고 백주(白晝)에 음부(淫婦)을 만재(萬載)하야 자동차 불통행의 구역(區域)인 촌리(村里)의 세경(細徑)까지 심입정차(深入停車)하야 방약무인(傍若無人)한 음행(淫行)을 연(演)하야 촌리(村里)의 풍기(豊機)를 기란(棄亂)하며 인가간(蹸家間) 교통까지 두절(杜絶)케 하는 등 난폭음행(亂暴淫行)을 함이 매거(枚擧)할 수 업스리만치 심다(甚多)함으로 공명(公明)한 교통계(交通界)에 문명이기(文明利器)를 악용(惡用)한다(동아일보 1925년 12월 9일).

 

한편 교통발달과 신작로의 개통으로 마을 간에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취락(聚落)이 이동하게 된다. 정의, 대정 등 고읍(古邑)의 행정적․경제적 기능이 점차 약화되고, 행정 소재지로 중심지 기능을 하던 중산간 마을의 역할을 해안 지역에 넘겨주게 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제주도의 해안지역은 경지면적의 작고 해산물의 경제적 가치가 지금처럼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반해 중산간 지역은 비교적 넓은 경작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목축 등 부업 생산활동이 왕성해 경제적으로 나은 형편이었다.

 

예전부터 중산간 지역에는 유림(儒林)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며 해안지역은 한말, 일제강점기 초기만 하더라도 주로 빈농(貧農)과 어민(漁民)들이 거주하였다. 또한 해녀물질이 천박한 작업으로 무시되었으며 해산물의 시장 가치가 낮아 해안지역의 해녀에 대한 사회적․경제적 인식이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작로가 개설되고 일본과의 왕래가 수월하여 제주도민의 도일(渡日)이 증가하게 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경제적 기회가 더 많은 해안지역으로의 취락 이동이 시작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 당시 해안마을은 한반도와 일본에 대한 출가 출발지이며 어업의 근거지이다. 일본을 포함한 외부로의 이동이 활발해 지면서 제주, 서귀포, 한림, 모슬포, 성산포, 김녕, 조천, 표선이 지정항(指定航) 또는 지방항(地方航)을 지정되어 해상교통의 중심지로 탈바꿈하게 되었던 것이다.

 

1924년 기준, 면소재지의 이전상황을 보면, 명월에서 한림, 평대에서 세화, 대정에서 모슬포, 홍로에서 서귀포, 의귀에서 남원, 정의에서 표선, 고성에서 성산포로 이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남원면사무소의 소재지는 남원 북쪽 의귀리(衣貴里)였다. 당시 의귀리는 300호수로 융성한 마을이었으나 신작로가 생겨, 1915년 당시 주거가 뜸했던 샛길 연변으로 면사무소가 이전함에 따라 점차 남원리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동하게 되어 이곳이 남원면 소재지가 되었다.

 

 

서귀면은 홍로(동홍, 서홍)에서 일주도로에 인접한 서귀포(솔동산지역)로 이동하였다. 대정면은 대정군청 소재지 보성, 안성, 인성에서, 남서쪽 4km인 모슬포로 면사무소를 이전함에 따라 보성 마을 주민들은 모슬포와 일과리로 인성, 안성 마을 주민들은 사계리와 상모리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해안마을은 신작로의 개설과 일본직항 개통 이후 일본으로의 도일(渡日)이 용이했고 어업 전진기지였기 때문에 주변취락의 계층분화와 직업분화에 의한 신도시화 경향이 활발히 일어났다. 이들 지역의 발달로 해당 지역은 물론 인근지역의 상업활동과 시장경제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또한 오일장이 열림으로써 주변마을에 비해 생필품을 구입하기가 편했고, 정보를 서로 교환하기에 유리했다.이러한 점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중산간 지역에서 해안지역으로의 취락 이동이 가속화 되었던 것이다.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제주대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고 동국대에서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2011) 학위를 받았다. 제주도 경제특보에 이어 지금은 지역산업육성 및 기업지원 전담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겸임교수로 대학,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등이 있으며『문화콘텐츠기술과 제주관광산업의 융복합화연구』(2010),『제주형 첨단제조업 발굴 및 산업별 육성전략연구』(2013),『제주자원기반 융복합산업화 기획연구』(2011) 등 보고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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