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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61)...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윤잉(胤礽, ?~1724)은 강희(康熙, 1796∼1820)의 둘째 아들이다. 강희 14년(1675) 황태자에 봉해져 처음으로 정사를 맡고 중용되기 시작했다. 47년 강희는 “조상의 덕을 본받지 않는다”는 등의 죄명으로 태자를 폐위하고 수감시킨다. 수개월 후 또 태자에 복위시켰다가 51년 다시 폐위시키고 함안궁(咸安宮)에 구금한다. 옹정(擁正) 2년(1742)에 죽었다. 이밀(理密)친왕으로 추숭됐다.

 

윤잉은 효장문태황태후(孝莊文太皇太后)가 지정한 태자가 돼 어릴 적부터 부황 강희의 정성어린 양육을 받는다. 재능이 넘쳤다고 한다. 말 타기, 활쏘기, 언담(言談), 문학에 능해 10살이 되기도 전에 강희를 따라 순행을 나갔고 정사를 처리하는 방법을 배웠다.

 

강희도 위신을 세워주기 위해 태자에게 황태자 고유의 제도를 제정해 태자의 위험을 갖춘 복장, 의장(儀仗), 용품 등을 황제와 다름없이 체현토록 했다. 국가 3대 명절 중의 원단(元旦), 동지(冬至), 그리고 태자의 천추절(千秋節, 생일)에 왕공 백관들이 황제에게 조하(朝賀)한 후 태자 거처에 가서 같은 의식을 진행하도록 했다.

 

황제에게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청 황제에 대한 경례 방법으로 삼배구고(三拜九叩)라고도 한다. 궤(跪)는 무릎을 꿇는 것, 고(叩)는 머리를 땅에 닿게 한다는 뜻이다.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댄 다음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숙이기를 3번하고, 3번씩 되풀이했다. 가경(嘉慶) 때의 영국 대사 P.W.애머스트가 이것을 거부해 알현이 허용되지 않았다)의 예에 따라 태자에게 ‘이궤육고두(二跪六叩頭)’하게 했다. 조선(朝鮮)의 국서(國書)에 윤잉을 피휘(避諱)하지 않았다고 부당하다며 책망한 경우도 있었다. 강희가 세 차례 갈단(Galdan, 갈이단(噶爾丹), 서몽골 중가르(Zungar) 부족의 추장)을 친정(親征)할 때 윤잉을 경성에 남겨두고 정사를 처리하게 했다. 이런 점을 보면 강희는 태자 윤잉을 무척 신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윤잉이 태자의 자리에 앉은 지 33년, 강희는 갑자기 태자를 폐위시킨다. 그 결정은 조야를 진동시켰다. 더더욱 믿지 못할 것은 폐위시킨 지 반년 후 강희는 폐태자를 황태자로 다시 옹립했다. 좋은 날은 오래 가지 못했다. 강희 51년, 윤잉은 또다시 폐위된다.

 

강희 황제가 태자를 폐위하고 복위시키는 일을 반복한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윤잉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가? 이 문제는 대단히 복잡해 역사학계에서도 아직까지 설왕설래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윤잉이 결당(結黨)해 황위를 찬탈하려 했기 때문에 폐위됐다고 한다. 중국 봉건사회가 ‘부전자(父傳子)’, ‘가천하(家天下)’(역대 중국의 전통 왕조를 황제(皇帝) 일가가 지배)가 된 후 태자를 세우는 것은 어떤 왕조도 소홀이 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일이었다.

 

태자는 미래의 황제였기에 몇몇 관원들은 예비투자하기 위해 태자의 문하로 들어갔다. 관료집단 내부에 황권에 빌붙은 세력과 미래 황권과 결탁한 잠재적 위협이 되는 태자당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일단 태자가 책립되면 모반을 획책할 목적은 아닐지라도 호시탐탐 태자당에 가까이 다가가 태자 곁에 있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황태자라는 특별한 지위에 있던 윤잉은 부황, 여러 형제, 그리고 공신과 여러 신하들과 공정한 관계를 맺어야 했다. 그래야 조정도 순탄하고 자신의 등극도 순조롭게 이룰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대혼란이 야기될 수밖에 없었다. 윤잉은 젊었지만 오랫동안 태자의 자리에 앉아있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태자가 순조롭게 황위를 계승하려는 목적에 영합하는 소그룹이 형성됐다. 그 중심에 소어투(색액도(索額圖))가 있었다. 그는 윤잉의 생모 효성인황후(孝誠仁皇后)의 친숙부로 윤잉의 외종조부였다. 일찍이 강희 8년(1669)에 대학사를 역임했고 25년(1686)에 영시위내(領侍衛內)대신으로 있으면서 영사단을 이끌고 러시아로 가 네르친스크(Nerchinsk) 조약을 맺기도 했던 강희 전기의 중신이었다.

 

그는 외손을 두둔하며 황태자의 의장과 위사를 황제와 같게 하려 애썼다. 더 엄중한 일도 저질렀다. 강희를 반대해 윤잉을 일찍 황제의 자리에 앉히려 했다. 강희는 황제의 자리를 보호하기 위해 태자당의 활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 쥐를 잡고 싶어도 주위의 기물을 깰까 봐 겁내는 것처럼 더 큰 손해를 볼까 봐 태자를 보호하기 위해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고 소수만 치죄했다.

 

태자당의 활동은 윤잉을 강희와 대립각을 세우도록 만들었다. 강희 47년 목란위장(木欄圍場, 하북성 동북부 승덕(承德)시 위장만족몽골족자치현(圍場滿族蒙古族自治縣)과 내몽골 초원 접경지역)에서 경성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윤잉은 매일 밤 강희가 머무르고 있는 천막 주의를 돌아다니며 틈새로 부친의 움직임을 살폈다. 강희는 그가 소어투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자신을 모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불안했다. 강희가 윤잉을 용인하는데도 분명 한계가 있었다. 47년 9월 마침내 태자를 폐위할 결심을 하고 신속히 실행에 옮긴다.

 

폐태자 사건이 발생한 후 황제의 장자 윤시(胤禔)와 여덟째아들 윤사(胤禩)는 태자가 폐위됐기 때문에 곳곳으로 돌아다니며 결당하고 황태자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그들의 활동은 강희로 하여금 사태가 엄중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즉시 여러 아들들의 결당을 제지했다. 동시에 만주족들에게 불법적인 여러 황자들과의 결당을 불허한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태자는 국본이 아니던가. 국가는 당연히 황태자가 있어야 했다. 강희가 태자를 세운지 이미 30여 년이 지났던 때라 조정의 대신들에게는 태자가 있어야 한다는 심리가 습관처럼 돼 있었다. 강희 본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시 태자를 세워야 대신들과 백성들의 심리에 부합되고 황자들 사이에 태자의 자리를 놓고 싸움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강희는 태자를 폐위하고 1개월도 채 되지 않은 시기에 다시 태자를 세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누구를 세워야 좋은가?

 

 

강희는 조정 대신들에게 태자를 추천하라고 명한다. 동국유(佟國維)와 마제(馬齊)의 뜻에 동조해 대신들 모두 윤사를 추천했다. 강희는 이에 대해 불만을 품고 마제를 처벌하고 동국유를 견책했다. 그러면서 윤잉을 재기용해 48년(1709) 3월에 복위시켰다. 그가 마제와 동국유를 견책한 것은 조정 대신들에게 황태자에 관해서는 상관하지 말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윤잉이 강희의 이상적인 태자는 아니었다. 복위는 시켰지만 그저 비어있는 황태자 자리를 보충함으로써 여러 황자들이 결당해 자리를 다투는 것을 방지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강희는 신하들이 황태자를 옹립하면 장래에 태자를 끼고 권력을 전횡하게 될 것이고 황권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청 왕조가 오래도록 안정되고 태평하기를 바랐다. 태자를 옹립하는 것을 황제 개인의 권력과 다른 사적인 일로 보았다. 결당해 황태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그의 권력을 침범하는 것이었다. 이는 조정을 위해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결당해 자리를 탐내는 자는 황태자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강희는 윤잉을 복위시키는 과정을 통해 결당하며 자리를 탐하는 자는 황태자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확하게 체득했다.

 

복위는 됐으나 윤잉의 지위는 공고하지 못했다. 윤잉은 그런 형세를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공고히 결당해 일찍 대권을 장악하려 했다. 강희에게 발각된 후 윤잉은 뻔뻔하기 짝이 없는 몰염치 한 인물로 돼 버렸다. 악랄한 소인들과 결당하고 복식 및 장식품 등 황제의 표준을 넘어 버렸기에 다시 폐위돼 구금됐다. 윤잉은 결국 또다시 태자의 자리를 상실하고 정치적 생명이 위험하게 됐다.

 

결당해 자리를 탐하는 것 이외에도 태자의 인물에 대해 강희는 불만이었다. 그것이 어쩌면 태자를 폐위시킨 원인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황태자와 황제는 한 걸음 차이밖에 없었다. 손쉽게 얻을 수 있는 황제의 보좌는 윤잉을 안하무인으로 만들었다. 유아독존으로 나만 따르면 된다는 식의 행보를 하면서 사치에 빠지고 성에 탐닉하는 일반 귀족 자제들이 빠지는 악습을 답보했다.

 

윤잉은 재물에 대한 탐욕이 강했다. 강희의 순행에 따라 갔을 때 외번(外蕃) 몽골이 진공한 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성격이 급해 자제를 못했다. 왕공 귀족을 꾸짖고 때렸으며 부황의 면전에서 관원을 물에 빠뜨리기도 했다. 강희는 너그럽고 인자하게 나라를 다스렸다. 이 점이 부자 사이를 어긋나게 만들었다. 강희는 윤잉을 보면서 국가를 재앙으로 몰아가고 백성을 위험에 빠뜨리는 인물이 되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강희는 ‘효(孝)’로써 천하를 다스리기를 원했다. ‘부자자효(父慈子孝), 형우제공(兄友弟恭)’은 그가 존중했던 윤리도덕이었다. 그 스스로 태황태후와 황태후에 효도했고 윤잉도 그러하기를 바랐으나 윤잉은 효도는커녕 부친이 죽든 살든 개의치 않았을 정도였다. 그래서 강희는 윤잉이 “군과 부에 충애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여겼다.

 

강희 47년, 황제는 윤잉과 몇 명의 황자들을 데리고 ‘목란추선(木蘭秋獮)’[‘木蘭’은 원래 만주어다. 한어는 ‘초록(哨鹿)’으로 ‘사슴을 잡다’ 뜻이다. 일반적인 상황은 매년 7, 8월 사이에 진행했기 때문에 ‘추선(秋獮)’(옛날에 가을에 사냥하는 것을 ‘獮’라 했기 때문에 ‘秋獮’)이라 했다. 봄에 사냥하는 것은 ‘수(搜)’, 여름 사냥은 ‘묘(苗)’, 겨울 사냥은 ‘수(狩)’라 했다. 청대 황제들은 매년 가을에 목란(木蘭) 위장(圍場)을 순시하고 무술을 연마했다. 이는 청대 황제가 말 타고 활쏘기를 훈련하고 시연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을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오는 도중 수행했던 열여덟째 황자가 중병에 걸렸으나 윤잉은 관심을 전혀 두지 않았다. 강희는 형제끼리 우애가 있어야 한다고 질책했으나 윤잉은 안중에 두지 않았다. 강희는 형제를 그렇게 무정하게 대하는데 그런 놈이 어찌 성군이 될 수 있겠느냐고 대노했다.

 

 

황태자를 세울 때 강희는 태자라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추어야 하다고 여겼다. 첫째 부황에게 충성을 다하고, 결당해 황위를 도모해서는 안 된다. 둘째 사람됨이 어질고 의로워야 장차 투명하고 태평하게 정치를 할 수 있다. 셋째 효도하고 우애가 있어야 황태자가 됐을 때 효도를 지킬 수 있다. 그렇다면 윤잉은 실제 강희의 표준에 부합되지 못한 것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윤잉의 급하고 미친 듯 날뛰는 성격도 강희가 싫어하게 된 원인이라 본다. 윤잉은 성격이 급해 아무 때나 주변 사람들을 매질했다. 평군왕(平郡王) 납이소(納爾素), 버일러 해선(海善), 공보기(公普奇) 등도 그의 심한 매질을 피하지 못했다. “분노가 폭발해 사람을 매질해 상하게 하는 일”이 여러 번 발생했다. 윤잉의 변태적 성격은 강희로 하여금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여기게 했고 마침내 태자 폐위를 결정하게 만들었다.

 

태자의 그러한 성격은 천성적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은 어쩌면 비틀린 황태자 자리일 수도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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