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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64)...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강희(康熙, 1654~1722, 얼허타이핀(ElheTaifin)), 이름은 현엽(玄燁), 푸린(복림(福臨))의 셋째 아들이다. 그리고 청나라 성조의 연호다. 61년간 중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쓰인 연호로 중국 역대 왕조 중 마지막 전성기인 강건(康乾)성세라는 치세이기도 하다. 강희는 평화로운 조화를 뜻한다.

 

오보이(Oboi, 오배(鰲拜))와 삼번(三藩 : 운남(雲南)의 오삼계(吳三桂), 광동(廣東)의 상가희(尙可喜), 복건(福建)의 경계무(耿繼茂)(죽은 뒤 아들 경정충(耿情忠)이 뒤를 이음))의 난 진압, 대만(臺灣) 복속, 몽골과 티베트 원정 등으로 청 왕조의 기틀을 세웠다.

 

옹정(雍正, 1722~1735), 아이신기오로(애신각라,愛新覺羅) 윤진(胤禛)이고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헌제(憲帝)다. 재위 때 사용한 연호에 따라 일반적으로 옹정제라 부른다. 강희의 넷째 아들이다. 강희제 말기에 황족과 조정의 신하 사이에 붕당의 싸움이 심해 즉위 후 동생인 윤사(胤禩), 윤당(胤禟) 등을 서민으로 강등시키고 권신인 연갱요(年羹堯), 퉁가롱코도(TongaLongkodo, 융과다(隆科多)) 등을 숙청해 독재 권력을 확립했다. 황제 측근의 군기처대신(軍機處大臣)을 두고 군기처가 내각을 대신해 6부를 지배하게 했다.

 

지방 관리의 봉급이 적어 양렴전(養廉錢)을 지급했으며 지방에 남은 천민의 호적을 제거해 양민으로 만들었다. 운남(雲南), 귀주(貴州), 광서(廣西)의 묘족(苗族)의 토사(土司) 통치의 반독립 상태를 철폐하고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인 유관(流官)이 다스리게 하는 ‘개토귀류(開土歸流)’ 정책을 펴 내지화(內地化)를 꾀했다.

 

대외적으로는 청해(淸海)를 귀속시키고 연갱요에게 23만 대군을 이끌고 티베트를 정벌케 한 뒤 주장대신(駐藏大臣)을 파견해 보호령으로 삼았다. 1727년 러시아와 캬흐타조약을 맺고 국경선을 정했다. 이 같은 옹정제의 업적을 바탕으로 뒤를 이은 건륭(乾隆)황제가 준가르와 위구르 등을 평정해 몽골을 제외하고는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갖추었다.

 

 

간단하게 말해, 강희가 붕어한 후 네 번째 황자 윤진(胤禛)이 극심한 황위 쟁탈을 끝내고 마침내 승리자의 태도로 황제의 보좌에 앉는다. 그가 중국 역사상 유명한 옹정 황제다. 옹정이 황위를 이어받은 것에 대해 민간에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온다.

 

어떤 이들은 강희가 임종 전에 ‘열넷째(十四) 황자’에게 황위를 넘기라는 유조(遺詔)를 남겼으나 넷째 황자는 외삼촌 퉁가롱코도(TongaLongkodo, 융과다(隆科多)) 등과 결탁해 유조 중의 ‘十’자를 ‘于’자로 고쳐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또 어떤 이들은 강희는 어떤 유조도 남기지 않았는데 롱코도가 수완을 발휘해 강희 임종 전에 열넷째 황자에게서 찬위해 넷째에게 넘겼다고도 한다. 아예 강희는 원래 넷째 윤진을 자신의 계승자로 삼았다고 하기도 한다. 이처럼 의견이 분분하다.

 

이런 논쟁의 원인은 강희의 유조가 친필로 돼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천하에 선포된 계승자가 과연 강희의 뜻인지 아니면 옹정 자신이 뜻인지 알 길이 없어져 버렸다. 만년의 강희가 황자들에게 어정쩡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까닭에 누구를 계승자로 생각했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는데서 기인한 문제이기도 하다.

 

옹정이 부친에게서 찬위(簒位)했다고 하기도 한다. 강희 심중에는 열넷째 윤제(胤禵)를 계승자로 생각했다고 보는 것이다. 강희가 윤제를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에 삼은 것이 그 증거라고 했다. 서정 전역(戰役)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중국의 반쪽 강산이 누구에게 속하느냐하는 중요한 문제로 청 황조의 안위와 직결되는 사안이었다.

 

강희는 그가 가장 신뢰하고 가장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을 선택해 대장군에 임명했다. 윤제의 임명은 그의 위신을 높여 여러 신하들이 믿고 따르게 만들었다. 강희가 새로운 방식으로 황태자를 선택하고 배양하려는 중요하면서 결정적인 선택이었다. 그런데 유조는 롱코도 혼자 선포했다. 그가 ‘十’자를 ‘于’자로 고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만은 없다. 자신의 외종질로 하여금 대통을 계승케 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설에 대해 반박을 하는 사람도 많다. 첫째, 강희의 유조는 만주어로 쓰여 있고 만주어로 선포된 것으로 한자처럼 고칠 수 없다. 둘째, 롱코도와 옹정은 깊은 교류가 없었다. 어찌 유조를 고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옹립하려 했겠는가? 유조를 위조해 찬위했다는 여러 가지 설은 정적들의 중상에 불과하다. 셋째, 윤제가 진짜 강희의 미래의 황태자였다면 어째서 오랫동안 변경을 전전하게 만들었다는 말이냐?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넷째, 『청성조실록(淸聖祖實錄)』의 기록을 보면 강희의 병환이 위급한 때 몇몇 황자와 대신을 침소로 불러 “넷째 윤진은 인품이 고귀하고 짐과 무척 닮아 대통을 능히 이을 수 있다. 짐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토록 하라”고 했다. 강희가 임종 전에 옹정에게 명해 교사(郊祀) 대전(大典)을 대행케 했다. 이로 보면 강희가 세우려고 했던 황자는 바로 옹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강희가 황자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결코 고정불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 소질에 근거해 방법을 조정했다. 그때마다 황자의 지위가 오르락내리락 했다. 강희 황제와 여러 황자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 그 역사를 한 번 보자. 그러면 누가 강희 황제의 심중에 가장 적합한 황태자였는지 판단해낼 수 있다.

 

 

 

태자 윤잉(胤礽)은 두 번씩이나 황태자에서 폐위됨으로써 정치적 강시가 돼 분명 황위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렇다면 장자 윤제(胤禔)는 어떤가?

 

윤제는 맏아들로 강희의 총애와 신임을 받았다. 세 번이나 갈단(Galdan, 갈이단(噶爾丹), 중가르(Zungar) 부족의 추장)을 정벌할 때 첫 번째는 그를 부장군에 임명했다. 그는 태자 이외의 여러 황자 중 유일하게 왕작(王爵)이었다. 그의 외삼촌 대학사 나라밍주(NaraMinju, 납란명주(納蘭明珠))는 한때 강희의 친신대신이었다. 송고투(Songgotu, 색액도(索額圖))와 당쟁을 벌이면서 강희에 의해 해직됐다. 이것이 그와 윤잉의 갈등의 시작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귀족들이 모여들었다. 강희의 외삼촌 동국유(佟國維)의 가족인 어룬다이(ELundai, 악륜대(鄂倫岱)), 롱코도, 순안얜(ShunAnyan, 순안안(順安顔)), 그리고 상급 3기(旗) 중의 대신 한 둘, 하급 5기(旗) 중의 왕자들이 있었다. 그는 라마(喇嘛) 바한가론(BaHangarRon, 파한격륭(巴漢格隆))을 이용해 염승술(厭勝術, 압승술(壓勝術), 주술을 쓰거나 주문을 외어 음양설(陰陽說)에서 말하는 화복(禍福)을 누르는 일)을 펼쳐 윤잉을 죽도록 저주(詛呪)했다. 윤잉을 유금 시킬 때 강희는 윤잉이 윤제를 해칠까봐 특별히 윤제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을 보호하는데 힘쓰라고 했다. 그런데 윤제는 오히려 강희에게 윤잉을 죽이자고 건의했다.

 

부황은 나서지 말라고 자신이 알아서 하겠노라고 했다. 강희가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사실로 보면 윤제와 윤잉의 갈등은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나 다름없었다. 윤잉이 폐위되자 윤제는 자신이 황태자가 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자신의 흉악한 면을 노출시켜 버렸다. 이는 강희로 하여금 자신을 싫어하게 만든 악수였다. 강희는 그를 선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평생 구금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와 결탁했던 인물들도 일망타진 되면서 철저히 실패로 돌아간다.

 

윤제의 바람이 완전한 실패로 돌아가기 전 자신이 황태자가 될 희망이 없다고 느끼자 여덟째 버일러(Beile, 패륵(貝勒)) 윤사(胤禩)를 강희에게 추천한다. 관상가 장명덕(張明德)이 윤사를 보고 “나중에 크게 될 인물”이라고 했다는 말까지 전했다. 황가(皇家)에서 중대한 일이 벌어지면 강희는 황자를 파견해 내무부 대신으로 삼아 집안일을 처리하도록 했다. 윤잉이 문제가 발생하자 강희는 윤사를 내무부 총관 서리로 임명했다. 그는 황자 중에서 가장 젊은 버일러였다. 이것을 보면 강희가 그를 무척 신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강희는 윤사를 무척 좋아했다. 그런데 윤사는 윤잉이 폐위가 되고 윤제가 질책 당하자 황태자가 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아홉째 윤당(胤禟) 등의 도당들과 힘을 합쳐 멋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또 조정 대신들이 그를 추천하기도 했다. 그의 노골적인 황태자 즉위 활동은 강희제의 불만을 샀다. 강희는 이를 갈며 다음과 같이 얘기한 적이 있다.

 

“여덟째는 비천한 신자고(辛者庫, 만주어 ‘신저쿠터러아하(신자고특륵아합(辛者庫特勒阿哈))’의 약칭. ‘밑의 양식을 관리하는 사람’이라 뜻으로 내무부(内务府) 관할의 노복(奴僕)을 말한다)의 소생으로 어릴 적부터 뜻을 높이 세우고 음험했다.

 

관상쟁이 강명덕의 말을 듣고 사람을 구해 둘째 형을 죽이려 했다. 그가 둘째를 죽일 생각을 품었다는 것은 짐을 죽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난신 도적들과 패거리를 만들어 비밀리에 음험하고 교활한 짓을 일삼았다. 짐이 나이가 많고 남은 날이 많지 않음을 보면서 찬위를 도모하기도 했고, 짐이 죽은 후를 기다려 여러 대신들이 보호하는 인물과 감히 논쟁하면서 스스로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일을 진행했다고 여겼다! 짐은 그의 불효 불의의 행위를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짐은 윤사와 부자의 의를 끊을 것이다.

 

……짐은 심히 분노한다! 그대들과 여러 형제들에게 특별히 말하노라. 짐의 자비로운 은혜를 생각해 짐의 뜻을 따르라. 이것이 대신들의 뜻과 합치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짐이 임종할 때 분명 짐을 건청궁(乾淸宮)에 놔둘 것이다. 그러면 그대들은 칼을 들고 다툼을 벌일 것이고. 윤사는 황태자 자리에 앉히지 않은 까닭에 짐을 뼈에 사무치도록 원망할 것이니 그의 위험함은 실로 둘째 황자보다 백배는 더할 것이다!” 이를 보면 강희가 윤사 그룹을 미워하고 싫어했음을 능히 알 수 있다.

 


 

셋째 황자 윤지(胤祉)는 나이가 있었으며 학식이 있었다. 강희와 사이가 좋고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강희

는 윤지에게 어느 정도의 사랑도 줬고 중용도 했지만 그는 정치 능력이 부족했다. 두 번이나 부하의 범죄 사건에 연루된 적이 있듯이 부하들을 거느리는 기량이 없었다. 정치적 원모(遠謀)와 행정 재간이 없었다. 그러한 사람이 어찌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강희는 그를 선택하기가 어려웠다. 윤지는 명을 받들어 일을 처리했지만 그것도 그의 신분적 지위와 관련된 것으로 황태자로 선발되는 것과는 특별한 관련이 없었다. 그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없이 그저 일반적인 참여에 불과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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