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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65)...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연갱요(年羹堯, ?~1725), 자는 양공(亮工), 한군(漢軍) 양황기(鑲黃旗), 강희(康熙) 39년(1700) 진사, 59년 정서장군(定西將軍)에 제수됐고 이후 티베트를 공략했으며 요충지를 지켜 옹정(雍正)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삼등공(三等公)에 봉해졌다. 무원(撫遠)대장군에 제수된 후 청해(靑海) 나복장단진(羅卜藏丹津)을 평정한 공으로 일등공(一等公)에 봉해졌다.

 

용맹하고 지략이 많아 조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나중에 남달리 공이 많음을 믿고 오만해져 ‘교종불법(驕縱不法)’(교만하고 방자하여 법을 지키지 않는다)했다는 평가를 받아 옹정 3년(1725)에 92개의 죄행을 씌워 옥에 갇히고 자진을 명받는다.

 

다시 말하면, 연갱요는 진사 출신이다. 관직은 사천(四川)총독, 천섬(川陝)총독, 무원(撫遠)대장군을 역임했다. 티베트를 공략하고 청해(靑海) 회족 반란을 평정했다. 옹정 2년 청해를 평정한 후 10월에 입경해 관직을 받는다. 당시 공이 천하를 덮을 만하여 대신들 중 가장 높은 관직인 일등공(一等公)에 봉해지고 그의 부친 역시 일등공에 태부함(太傅銜)이 더해졌고 아들 둘은 자작(子爵)과 남작(男爵)에 각각 봉해졌으며 집안 수하들에게도 모두 4품 부장 벼슬을 내렸다.

 

한때 대단한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1년도 되지 않아 옹정 황제에 의해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92개에 달하는 대죄를 졌다는 죄명으로 자살을 명받는다. 연갱요의 죽음은 이례적이다. 그는 왜 죽임을 당했을까?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은 연갱요가 옹정 황제 찬위 활동에 참여했는데 옹정제가 즉위한 후 독수를 써 살인멸구 했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강희제는 원래 열넷째 황자 윤제(胤禵)에게 황위를 물려주려 했었는데 옹정제가 조서를 거짓으로 꾸며 찬위했다고 보았다. 사천(四川)총독이었던 연갱요가 그 찬위 사건에 연루됐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옹정제의 사주를 받아 당시 사천에 있던 열넷째 황자 윤제를 초전에 무력으로 위협해 군대를 일으켜 자리다툼을 하지 못하게 했다. 옹정제가 막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에는 연갱요에게 크게 상을 내렸으나 그것이 바로 욕금고종(欲擒故縱, 큰 이득을 위해 작은 것은 과감하게 내어줌)의 계책이라는 것이다.

 

시기가 무르익었을 때 죄명을 씌워 토사구팽(兎死狗烹)시켰다는 말이다. 목적은 자신의 찬위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연갱요를 죽여 입을 막으려 했다는 것이고.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옹정제 즉위 당시 연갱요는 멀리 서북(西北) 지역에 있었던 관계로 조서를 거짓으로 꾸며 찬위하는데 참여할 수 없었고 궁정의 진행사정을 확실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연구자는 연갱요가 피살당한 까닭은 그의 오만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공이 많음을 핑계로 교만해지면서 권력을 휘두르고 현리(賢吏)를 아무렇게나 탄핵했고 부하들을 학대하면서 조야의 공분을 샀다.

 

『청사고淸史稿』의 기록에 “갱요는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 주상의 보살핌에 기대어 출사 후 누차 공로를 쌓자 교만해졌고, ……입조하여 알현할 시 총독 이유균(李維鈞), 순무 범시첩(范時捷)으로 하여금 길에 무릎을 꿇고 배웅하고 맞이하도록 했다.

 

일등 공경이 광녕문(廣寧門) 밖에서 무릎 꿇고 맞이했는데 갱요는 말을 채찍질하며 지나가면서도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말에서 내려 안부를 묻는 왕공에게도 갱요는 고개만 끄떡였을 뿐이다. 세종 앞에서도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돼 있다.

 

『청대일문淸代軼聞』의 작자도 “갱요는 공로를 끼고 교만함이 심해졌다. 갱요는 부하들을 잔혹하게 대했으며 능력이야 어떻든 자신과 가까운 사람만 임용했으며 현리를 제멋대로 탄핵해 공분을 샀다. 옹정제가 용납하지 않았던 까닭에 피살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도가 매우 심한 것은 연갱요가 자신의 공로를 너무 믿고서 공공연하게 친신들을 주요 보직에 앉혔다는 점이다. 호기항(胡期恒)을 감숙(甘肅) 순무로, 악주(岳周)를 서안(西安) 포정사(布政使)로, 유정침(劉廷琛)을 광서(廣西) 포정사로 삼는 등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니 옹정제의 의심을 샀다.

 

그는 황제가 연갱요를 감시하도록 파견한 정보원을 매수하면서 황제의 화를 불러일으켰다. 옹정제가 나중에 “큰 재능을 가진 자는 믿을 수 없으니 연갱요가 바로 그 본보기이다”고 주필 평어를 달 정도이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옹정제를 더더욱 참을 수 없게 만든 것은 그가 황제 앞에서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는” 오만함이었다. 멸시를 넘어 황권을 위협했고 스스로 황제가 되려는 마음을 품었다는 점이다. 연갱요는 황제가 되려는 망상을 품었으니 황제가 어찌 그냥 둘 수 있었겠는가? 죽음을 자초했던 것이다.

 

『청대일문』에 연갱요가 신임을 잃고 군권을 빼앗긴 후 “당시 모반을 권하는 막료가 있었다. 갱요는 오랫동안 묵묵히 있었다. 저녁에 천상을 관찰하고 크게 장탄식을 내뱉으며 ‘맞지 않다’고 말했다. 처음으로 그때부터 신하의 절개를 지켰다.” 이로 보면 연갱요는 분명 칭제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사정이 순탄치 않자 어쩔 수 없이 신하를 자청한 것이다.

 

옹정제의 질시를 받을 만큼 연갱요의 태도가 과한 부분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서안 총독부에 있을 때 문무 관원들로 하여금 5일 10일이 되면 원문(轅門)에서 조를 지어 원문과 고청(鼓廳, 북이 놓여 있는 방)에 네 발가락 용을 그리게 하고 취고수에게 망포(蟒袍)를 입게 했다. 그야말로 궁정과 다름이 없었다.

 

그는 또 옹정제가 파견한 시위들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르게 해 시봉토록 했다. 청 왕조의 제도에 따르면 조서가 도착하면 지방 관원들은 조서를 영접하고 삼궤구고(三跪九叩)의 예를 행한 후 무릎을 꿇고 황제의 안녕을 축원해야 했다. 옹정제의 조서가 두 차례나 서녕(西寧)에 도착했는데 연갱요는 그런 예를 행하지 않았다. 그는 독무와 장군들 사이에 왕래하는 교서에 마음대로 조서와 같은 문구를 사용해 황제를 모방했다.

 

더 심한 것은 그가 출자해 인쇄한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를 옹정제에게 바쳤는데 옹정제는 그것을 위해 서언(序言)을 쓰려 했다. 그런데 연갱요는 ‘성상의 마음을 번거롭게 하지 않게’ 한다는 핑계를 대고 옹정제를 대신해 황제의 필체로 서언을 쓰고 옹정제에게 천하에 공포하도록 했다.

 

참월(僭越)의 정도가 이 정도까지에 이르렀으니 옹정제가 오싹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건륭 시대 인물 소교(蕭交)는 『영헌록永憲錄』에서 연갱요와 정일(靜一)도인, 점성가 추로밀(鄒魯密)과 칭제의 일에 대해 의논했다고 언급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리고 옹정제에게 발각됐다면 그의 피살은 이상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어떤 계기로 옹정제는 연갱요를 사지로 몰아넣었을까? ‘호입연가(虎入年家)’(호랑이가 연갱요의 집으로 들어감) 사건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옹정 3년(1725) 12월초 호랑이 한 마리가 도성으로 들어와 연갱요 저택으로 들어가자 관병들을 동원해 사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연갱요는 출생이 호랑이와 관련돼 있어 백호가 환생했다고 했다. 지금 호랑이가 연갱요의 집에서 죽었으니 분명 하늘이 연갱요를 죽이라는 징조라 보고 옹정제는 연갱요를 처형하라고 명을 내렸다.

 

다른 얘기도 있다. ‘조건석척(朝乾夕惕)’과 관련된 문자옥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조건석척’이란 현대 중국어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힘써 일하다. 하루 종일 근면 성실하게 일하다” 뜻으로 쓴다. 이는 『주역周易․건乾․구삼九三』“君子終日乾乾,夕惕若,厲无咎.(‘夕惕若厲,无咎’라 보기도 한다)”에서 유래했다.

 

무슨 말인가? ‘건건’은 자강불식(自强不息)이다. ‘척(惕)’은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다” 뜻이다. 그렇다면 “군자가 종일 쉬지 않고 애쓰며 저녁에 반성하면,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허물은 없으리라”라고 할 수도 있고 “군자가 종일토록 힘쓰고 힘써 저녁까지도 두려워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은 없으리라”라고 할 수도 있다. 의미는 통한다. 원래 이 말의 유래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조건석척’이 문제가 된다. 이른바 문자옥이다. 옹정 3년 2월에 ‘일월합벽(日月合璧)’과 ‘오성연주(五星聯珠)’ 현상이 일어났다. ‘일월합벽’이란 지구가 태양과 달 사이에 있거나 달이 지구와 태양 사이에 있는 것을 말하고 ‘오성연주’란 오성이 구슬을 꿴 것처럼 일렬로 늘어섰다는 뜻이다.

 

모두 좋은 일이 일어날 징조임을 이르는 말이다. 길조이니 하늘의 아들인 천자에게 축하하는 것은 당연할 것. 연갱요도 축하를 보내기 위해 원래는 ‘조건석척’이란 말로 옹정제가 정무를 잘해 좋은 징조가 생겼다고 찬미하려고 했다. 그런데 글자를 잘못 쓰면서 끝내 옹정제가 연갱요를 처벌하는 핑계거리가 되고 만다.

 

그럼 어떻게 잘못 썼을까? 이 또한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조건석척’을 ‘석척조건(夕惕朝乾)’이라 잘못 썼다고 한다. 만약 이렇게 썼다고 해도 어의에는 별 차이가 없고 문법 상 그리 큰 잘못도 없다. 그런데 억지를 부리면 다음처럼 된다.

 

‘朝乾夕惕’은 낮부터 저녁까지 황상의 은총과 표창을 받았는데 밤에 내 스스로 반성하면서 자신이 부족한 점이 없었나를 경계했다는 뜻이 된다. 그럼 좋은 뜻이다 ; 반면 ‘夕惕朝乾’을 억지로 왜곡하면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도 있다. “나는 매일 밤 먼저 경계해야 할 것과 방비해야 할 것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나서 낮에 황상을 만난다.”

 

그렇다면 ‘朝․夕’ 두 글자 순서에 따라 뜻이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그래서 황제가 대노했던 것이다. 그런데 꼭 이렇게만 해석해야 하는가는 문제가 많다. 어의 상 큰 문제가 없는 것은 분명한데 억지 해석을 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석양조건(夕陽朝乾)’으로 썼다고 하는 설이다. 이렇게 썼다면 말이 안 된다. 어떻게 봐도 통하지 않는 말이다. 그런데 옹정제는 이 글을 대대적으로 활용한다. 다음과 같이 : 연갱요는 결코 부주의할 인물이 아니면서 ‘조건석척’을 ‘석양조건’으로 쓴 것은 “그야말로 ‘조건석척’ 네 글자를 짐의 귀에까지 들어오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이 오류에 결코 아무런 의도도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청세종실록』권30)라고 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물론 억지로 만들었다고는 하나 절치부심 기다리던 연갱요 제거작업에 착수한다. 그는 조정과 지방 관리들에게 연갱요의 죄상을 신고하라고 명한다.

 

결국에는 형부(刑部) 등 아문(衙門)에서 종합된 죄목이 92조에 이른다. 응당 능지처참(陵遲處斬) 시켜야 하는 대죄다. 그런데 옹정제는 짐짓 아량이 넓다는 듯 특별히 연갱요에게 자진할 것을 명한다.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연갱요의 죽음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한다. 공이 너무 높아 군주를 놀라게 했기 때문에 야기된 필연적인 결과라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주종 간에 오랜 원한이 먼저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연갱요의 죽음은 청 왕조를 위해 전장을 헤매며 쌓은 너무 높은 공 때문 야기됐다. 공이 없었다면 문제가 됐겠는가. 공이 많으니 군주가 의심을 하게 되고 군주 자신의 안위를 위해 죽음으로 몰아간 것일지니.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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