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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회]목성을 석성으로 쌓아 개축 ... 가장 오랫동안 제주목사직 수행

 

절해고도 제주섬에는 조선시대 286명의 목사가 부임했다. 제주는 군사상 요충지이기에 주로 무신이 파견되었으나 더러 문신이 파견되기도 했다.

 

이약동, 기건 목사 등 몇 분을 제외한 대부분의 수령들이 제주를 자신들의 출세도구로 삼았었다. 자신의 품계를 높이거나 치부를 위해 뇌물을 써가며 제주의 목사직을 탐하기도 했을 것이다.

 

반면 이경록(1543-1599) 목사는 성웅 이순신(1545-1598) 장군과 비슷한 삶을 살았다. 두 사람 모두 서른 살을 넘긴 나이인 1576년(선조 9년)에 나란히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갔다. 또한 그들은 함경도 국경지역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이경록은 40대 중반인 1687년(선조 20년)에 종3품인 경흥부사가 되었다. 경흥은 함경도 두만강하류 지역으로 여진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종이 김종서를 시켜 설치한 6진 중 한곳이다. 그의 이전 직책이 종6품 현감인 것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이경록은 이순신보다 1년가량 앞서 만호로 부임했다. 만호란 요충지의 방비를 전담하는 무장으로 종4품 무관직이었다. 이순신은 부친상을 당해 3년간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이경록보다 진급이 다소 늦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경록은 여진족과 맞선 국경지대 고을의 수령으로, 이순신은 그 일대의 방비를 맡은 무장으로 함께 근무하였다. 경흥부를 포함한 함경도 북방 방위의 총책임자인 종2품 병마절도사 이일은, 여러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이순신의 병력지원 요청을 무시했다.

 

조선군 희생자가 발생하자, 이일은 자신에게 닥칠지 모를 책임을 피하고자 마치 이순신과 이경록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인 양 이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다. 결국 선조는 이순신과 이경록에게 백의종군을 명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에 앞서 첫 백의종군을 겪은 것이다. 하지만 선조는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 2월 이경록을 나주목사, 성윤문을 갑산부사(나중 이경록 목사 후임으로 제주에 와서 탐학을 한 목사로 알려짐), 이순신을 전라도 좌수사에 제수했다. 전라도 좌수영을 총지휘하는 수군절도사인 전라도 좌수사의 직책은 정3품 당상관의 자리이다.

 

나라를 운영하는 능력이 부족했다는 평을 듣는 선조이지만, 곧 일어날 임진왜란 때 두 사람이 쌓은 공적을 생각하면 이 인사만은 최선의 선택으로 평가된다. 이경록은 나주부사 재직시 임진왜란이 벌어져 왕이 피난하는 상황에서 의병장 김천일과 함께 왜적과 싸워 큰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선조는 이경록을 1592년 7월 제주목사로 임명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3개월이 지나고, 의병들이 봉기해 왜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선조가 긴장된 순간에 이경록을 제주목사로 임명한 이유가 궁금하다. 이전까지만 해도 조선의 관리들은 제주를 이매(魑魅) 즉 사람을 해치는 도깨비와 괴물이 사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제주를 일본이 침략하려 한다는 의도를 간파한 후, 조정에서는 늦게나마 제주도를 전략적 요충지로 인식하게 되어, 제주도를 왜적에게 빼앗겨서는 안되는 군사요충지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사)제주역사문화나눔 연구소장 김일우 박사는 진단한다.

 

이러한 이유로 조정에서는 기병 중에서 500명을 뽑아 제주에 원병으로 보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병력이 모자라면서도 원병을 300명으로 줄여 제주에 보낸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하겠다.

 

1592년 7월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경록은 제주의 방어시설들을 정비하는 한편, 제주에 있는 군사들을 훈련시켜 바다를 건너가 왜적과 싸울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선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제주목사 이경록이 군사 200명을 뽑아 바다를 건너 힘을 합쳐 토벌하고자 조정의 하명을 청하자,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조그만 섬이 현재까지 다행히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적이 아직 침범하지 않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만일 적이 침범한다면 일개 섬의 힘만으로 잘 지킬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데, 어떻게 주장(主將)으로서 진(鎭)을 떠나 바다 건너 천리 길을 올 수 있겠습니까. 이경록이 품한 그 충분(忠憤)은 가상하나 형편상 행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경록은 전쟁이 끝난 후인 1599년 초 제주에서 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7년가량을 재임함으로써 최장기간 제주목사직을 수행하는 기록을 남겼다. 선조는 절해고도에서 장기간 근무토록 한점이 미안했던지 1596년 다음과 같이 하명했다. ‘제주목사 이경록은 이러한 격변을 당한 때에 해외고도(海外孤島)를 수년 동안 홀로 지켰으니,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듣건대 늙은 아비가 있다고 하니, 승진 제수하여 그 마음을 위로하도록 하라.’

 

이후 이경록은 제주성 바깥에 도랑을 파고 성위에 제승정(制勝 亭)을 짓는 등 방어시설을 정비했고, 나무로 만든 성인 명월진성을 돌로 쌓아 개축했다. 특히 제주목사로 재임 중 부친상을 당하고도 전쟁 중이라 임지를 지키라는 명령때문에 제주를 떠나지 못했다.

 

제주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해 성산포에 산성을 쌓던 중 임진왜란이 끝나는 1599년 초 병으로 사망했다. 이처럼 이경록 목사는 여느 목사들의 재임기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오랫동안 제주목사직을 수행했고, 마지막까지 제주의 방어시설을 돌보다 병사했다.

 

선조실록과 광해군 일기에는 이경록 목사 이전과 이후에 제주목사와 판관으로 부임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들이 있다. 이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부정과 비리로 파직되었다.

 

이계선 판관은 이경록 목사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기는커녕 술잔치를 벌이고 백성을 침해하고 학대하였다. 이경록 목사 후임으로 온 성윤문 목사와 이계선 판관 후임으로 온 이정생 판관은 기생 한명을 두고 싸우는 해괴한 짓거리를 하고, 이정생 판관 후임인 안극효는 술에 취해 망령된 행동을 하고 법을 어긴채 가족을 데리고 와 갖가지 민폐를 끼쳤다.

 

이어 제주에서는 길운절과 소덕유의 역모사건이 일어나고, 이 사건에 관계된 제주선인들도 피해를 당하는데,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성윤문 목사를 파직시키지 않은 선조 임금의 방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역사가들은 평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를 두고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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