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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회]봉세관 강봉헌과 결탁한 천주교 ... 과도한 세금 징수 와 심한 작폐

 

1901년에 발생한 신축교난(이재수의 난) 시 대정현의 유지와 유림으로 구성된 상무사는 각종 세폐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회(民會)를 개최하고, 그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제주읍성을 시위 방문하고자 했다.

 

이에 오대현과 강우백이 중심이 된 민회는 대정을 출발하여 제주읍성을 향하다가 명월진성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이때 까지만 해도 민회세력은 비무장이었으며 평화적으로 세폐(歲幣) 시정을 하소연하고자 했다.

 

그런데 1901년 5월 프랑스 선교사의 지휘 아래 이곳에 온 천주교도 800여 명은, 민회소의 주민들에게 발포하고 장두 오대현 등 6명을 납치해갔다. 천주교도들에 의한 명월진성 습격으로 민회편에 더 많은 민중들이 결집하게 되고, 평화적 등소운동은 무력항쟁으로 변해 갔다.

 

이재수가 항쟁의 장두로 나서게 된 것도 이곳 명월성의 기습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항쟁의 주도권이 토호에서 민중으로 이동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장두가 된 이재수의 비타협적 투쟁노선이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신축민란인 이재수의 난은, 명월진성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재수(1877-1901)는 대정군의 관노(官奴)였다. 당시 제주사회에서는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인 강봉헌의 남세(濫稅) 즉 세금을 함부로 거두어 드리고 있었고, 이와 결탁한 천주교의 작폐가 심했다.

 

 

이후 민군의 장두가 된 이재수는 천주교의 응징에 앞장섰다. 제주 성을 둘러싼 민군과 주성(州城) 안 천주교 신도 사이에 공방전이 벌어졌다. 성안에서는 부녀자 중심으로 천주교도에 대한 반대궐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성 밖에서는 은신 중인 천주교 신도들이 민군 측에 의하여 살해되는 사태도 일어났다. 이재수가 이끄는 민군이 입성한 후, 관덕정 앞에서 이재수에 의하여 3백여 명의 신도가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프랑스 함대와 일본군함까지 출동하는 국제 문제로 비화되었다.

 

결국 정부 진압군에 의해 이재수 등은 서울로 압송되고 주민들은 사후대책을 보장받음으로써 난은 진압되었다. 이재수는 고등재판소인 평리원(平理院)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살해된 신도의 매장문제는 프랑스와 협상 끝에 화북동 지경의 황 사평 천주교 묘지를 획정해 줌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를 두고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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