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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일제강점기 제주지역 인구 변동

 

해녀(海女)로 유명하야 장가만 들면 사내는 놀고먹는다는 남해의 거도(巨島) 제주도(濟州島)는 이번의 국세조사 결과 인구 이십만 팔천 삼백 이십오인 중 남자는 구만 육천 이백 십사인에 불과한데 여자는 십일만 이천 일백 십일인으로 넘치기가 일만 오천 팔백 구십칠이다(동아일보 1930년 12월 19일).

 

1911년 제주지역은 총호수 3만7130호, 총인구는 15만6778명이었다. 이 중 남자는 8만3801명, 여자는 7만2977명이다. 그러나 1912년에는 총인구 17만568명으로 이 중 남자는 8만4112명이며 여자는 8만6456명으로 여초(女招)현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난다(이 대목에서 1911년 인구조사 결과치의 신뢰성에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30년이 흐른 1941년 제주지역 총인구는 21만6081명으로 30년간 5만9303명이 증가했으나 1946년에는 총인구가 27만1379명으로 불과 5년 만에 5만5298명이 증가했다. 이는 해방 이후 일본 등 타지에서 거주하다 고향으로 귀환한 제주도민이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이다(해방 이후 추자도가 제주도로 편입되는 등 행정구역 조정이 부분적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45년 동안 제주지역 인구는 총 11만4601명이 증가했는데 이는 연평균 1.4% 증가했다.

 

인구밀도는 일반인구 111명, 농업인구 117명으로 다도해(多島海) 지역 207명에 비해 인구밀도가 낮다. 인구의 세대별 구성을 보면 1917년 5.0명으로 뭍지역 5.4명과 비교하여 별 차이가 없으나 이후 점차 감소하여 1934년 3.9명, 1936년 4.0명이 되었다.

 

남녀의 인구변동을 살펴보면, 여자가 많은 여초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남녀인구수의 차이는 1920년까지 일정하였고 1921년부터 1923년까지는 줄어들었으나 1925년 이후 다시 벌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제주도민의 도일(渡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도일 초기에는 남자 중심이었기 때문에 성별 차이가 급격히 벌어졌으나 도일이 심화될수록 가족중심 혹은 여성의 도일이 늘어나 남녀 인구수의 차이가 꾸준히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8년부터 1936년 사이 세대인구의 지역별 추이를 보면 제주, 한림, 모슬포, 서귀포, 성산포 등 항구를 가진 신흥 읍지역의 인구는 증가하고 있으나 농촌지역의 인구는 감소하고 있다. 즉 신흥 읍지역으로 인구가 집중되고 이로 인해 농촌지역 인구는 감소했다는 것이다.

 

 

전라남도내의 인구를 지난 십월일일 국세조사에 의하면 인구수 이백오십육천여명이라는 바 이것을 남녀별로 보면 남자 일백이십오만 사천명이라고 하며 여자 일백이십오만 이천명이라는데 이것을 소화 오년의 국세조사 당시에 비하여 보면 실로 십칠만 사천여명이 증가되엇으므로 매 일년에 평균 삼만 사천명씩이 증가되엇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부군도별로 보면 목포부(木浦府) 육만여 명 광주부(光州府) 오만 삼천여 명이라고 하며 제주도(濟州島)의 이십여 만 명이 제일수이며 구예군(求禮郡)의 오만여 명이 가장 소수이라고 한다(동아일보 1935년 11월 15일).

 

한반도 전체로 볼 때 근대적 위생관리법이 도입된 이래 사망률이 크게 하락하여 20세기 초에 연평균 인구증가율이 1%를 넘어섰다. 제주지역은 뭍지역보다 낮은 인구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일제강점기 제주지역 인구변동은 일본으로의 노동력 이동, 즉 제주도민의 도일(渡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27년 이후 인구가 줄어든 것과 1937년 이후 다시 인구가 늘어나는 현상이 이를 말해준다. 1926년부터 1936년에 걸쳐 제주지역 인구는 8835명 감소하였는데, 이는 도일 제주도민의 수가 증가했기 때문으로 보아진다. 그러나 1935년과 일본의 도항억제(渡航抑制)정책으로 제주로의 귀환인구가 증가하여 1936년에는 제주지역 총인구가 다소 증가했다.

 

이처럼 1922년부터 시작된 제주도민의 광범위한 도일(渡日)로 제주지역 인구변동의 폭이 결정되었다. 일반적으로 제국주의시대 식민지와 본국과의 경제적 관계는 생산요소(노동력 등)의 지역적 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소득이 높은 본국으로부터 소득이 낮은 식민지로 자본 유입이 나타나고 역으로 소득이 낮은 식민지에서 본국으로 노동력이 이동한다는 것이다.

 

방금 일본 대판(大阪)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수효는 무려 십만명에 달한다 함은 류차 보도되어 이미 다 아는 바이지 만은 그 십만명 속에는 근 팔만명이란 동포가 모가 제주도(濟州島)로 서부터 온 사람들인대 매월 이만이나 되는 다수한 조선인이 제주도에서 대판까지 왕래...(조선일보 1929년 9월 14일).

 

이를 1930년대 제주지역 농촌경제에 적용시켜 본다면 어떤 해석이 나올까?

 

당시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던 농촌노동력의 이동은 제주도내 임금 상승을 자극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증거들은 많지 않다. 이것은 당시 제주지역 농촌에 임고(賃雇)가 그리 활발하지 않았고 도일한 농촌노동력 대부분이 유휴노동력이기 때문이다(여기에서 유휴노동력이란 그 노동력 부재로 인해 광범위한 생산력 저하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오히려, 제주도민의 도일이 활발했던 1930년대 제주지역 농촌의 농업생산력이 증가했음을 입증시켜 주는 근거자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제주지역 농촌에 부분적으로 나타났던 광작(廣作)현상과 수확기에 불어 오던 태풍의 피해를 덜 받는 뿌리작물(고구마 등)의 재배가 확산된 것에 기인한 것이라 여겨진다.

 

1946년 인구가 급격히 증가한 것은 해방이 되면서 일본에서 많은 제주도민이 귀향한 데에서 비롯된다. 또한 여기에서 나타나지는 않지만 1943년 이후의 인구증가는 일본군의 대거 내도했던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쟁의 패색이 짙어진 일본이 제주도를 최종 방어기지로 정하고 대규모 병력을 제주도로 이주했었다는 기록이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제주대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고 동국대에서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2011) 학위를 받았다. 제주도 경제특보에 이어 지금은 지역산업육성 및 기업지원 전담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겸임교수로 대학,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등이 있으며『문화콘텐츠기술과 제주관광산업의 융복합화연구』(2010),『제주형 첨단제조업 발굴 및 산업별 육성전략연구』(2013),『제주자원기반 융복합산업화 기획연구』(2011) 등 보고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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