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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회]명월리 유적들 ... 보도연맹사건 희생자 '만벵디 4·3묘역'

 

1990년대 말 처음으로 이곳에 들렸을 때 나는 속울음을 삼켜야 했다. 4·3 광풍으로 할아버지와 중부를 잃은 나는 가족의 비극이 제주의 비극으로 옮아가는 전율을 맛보았다.

 

한 서린 마음으로 살아온 지난날이 있었기에, 한수풀역사순례길을 만벵디 4·3묘역까지 내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교직원들은 만벵디가 어디에 있으며, 4·3묘역은 어떤 사람들이 묻혀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 상황에서 순례길을 개장하였으니, 내겐 그 감회가 남다르다 할 것이다.

 

보슬비가 내리는 추모제 행사장에는 당시의 제주시장께서도 직접 참석하여 조사를 하였다. 제주시가 해야 할 일을 학교가 대신하고 있다며, 관계당국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 학교측에 감사함을 전하기도 했다.

 

벵디는 넓은 들을, 만(滿)은 가득하다는 뜻이다. 예로부터 북망산천 가는 곳으로 비유되곤 하는 만벵디는, 비가 내리면 물이 많이 고인다는 의미를 지닌 지역이다. 이곳 주변의 많은 무덤 중에서도 4·3사건과 관련한 특별한 무덤군이 바로 1950년에 발생한 예비검속 희생자 집단묘역이다. 다음은 만벵디 4·3묘역 표지석에 쓰여진 내용이다.

 

만벵디 4·3묘역: 이곳 만벵디 묘역에 안장된 영령들은 소위 예비검속에 의해 1950년 8월 20일(음 7월 7일) 새벽 송악산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무참히 학살된 원혼들입니다.

 

1950년 한국전쟁(6·25)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이란 명목으로 사상이 의심스럽다, 4·3사건 당시 가족 중 누군가 희생되었다, 군·경·관에 비협조적이라는 등의 이유로 아무런 재판 절차도 없이 희생된 무고한 양민들이었습니다.

 

유족들은 시신 인도를 간절히 요구했으나 거절당하고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살아온 지 6년 만인 1956년 3월에 시신수습이 이루어져 이곳에 안장했습니다.

 

반세기가 지난 2001년 8월 제주도와 북제주군의 지원으로 위령비가 건립되고 묘역이 정비되어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교육의 장이 되고 있습니다. 당시 희생자 수는 62명인데 현재 이 장지에는 46위가 안장되어 있으며 그 외는 개인 묘지에 묻혔습니다. 2004년 8월 7.7 만벵디 유족회

 

한림읍 금악리 지경인 만벵디에 묻힌 이들은, 옛 한림어협 창고에 갇혔다가 재판도 없이 대정읍 송악산 섯알오름 탄약고 터로 끌려가 즉결처형을 당한 제주선인들이었다. 섯알오름에서 학살된 제주선인들의 시신은 군(軍)에서 수습을 금지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시신으로서의 존엄도 무시되었다.

 

사건발생 5년 9개월 만인 1956년에야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으나, 시신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일제의 탄약고였던 학살터는 바닥이 콘크리트로 되어 있어, 빗물이 고였기 때문에 시신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되어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다.

 

이때의 학살을 흔히 보도연맹사건이라고 부른다. 전향한 좌익 전력자들의 관제조직인 보도연맹은, 과거를 반성하고 회개하여 나라를 보위(保衛)하고, 새 조국 건설을 인도(引導)하겠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만들어졌던 관제조직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전쟁이 나자 이들을 몰살시켜버렸으니, 전국적으로 희생자의 수가 무려 30만에 이른다고 전한다. 다음은 만벵디 묘지의 위령비에 새겨진 강덕환 시인의 조시(弔詩)이다.

 

그대 기억 하는가 섯알오름 듣도 보도 못한 골짜기 / 모진 광풍에 쓰러지던 칠석날 새벽 / 부모형제 임종 지키지 못한 불효 / 천년을 가도 지워지지 않는다는데 / 뼈마디 하나 겨우 추스른 주름진 세월 / 몇 번이나 새로 돋았을까 저 풀들 / 시퍼렇게 날 세우고 진초록 물결로
/ 그 새벽 이슬길 몇 번이나 밟아 왔을까 / 옷은 얻어서 옷이고 밥은 빌어서 밥인데 / 얻지도 빌지도 못한 혼백 견우별, 직녀별로 피어올라 / 인연의 질긴 끈 놓지 못하는 사이 / 기다림에 지쳐 살과 뼈는 흙으로 돌아가고 / 체온은 햇빛에게 보태어 / 야만의 땅엔 날줄과 씨줄로 곱게 엮은 / 저토록 고운 벌판인데 / 가진 것 비록 적어도 더불어 사는 넉넉함으로 / 평화의 불씨 당겨 점화하오니 / 혜원의 향으로 타 오르십서 / 상생의 촛농으로 흘러 내리십서.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를 두고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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