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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74)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복강안(福康安, ?~1796)은 푸차(Fuca, 부찰(富察)) 씨로 자는 요림(瑤林)이다. 청나라 만주 양황기(鑲黃旗) 사람으로 푸헝(Fuheng, 부항(傅恒))의 아들이고 고종(高宗, 건륭제) 효현황후(孝賢皇后)의 조카다. 운기위(雲騎尉)를 세직(世職)으로 삼등시위(三等侍衛)에 오르고 거듭 승진해 부도통(副都統)까지 올랐다.

 

건륭 38년(1773) 아구이(Agui, 아계(阿桂))를 도와 금천(金川)을 공격했다. 49년(1784)에도 아구이를 도와 감숙(甘肅) 회민(回民)봉기를 진압했다. 버이서(Beise, 패자(貝子))에 봉해지고 양광총독(兩廣總督), 호부상서, 보화전(保和殿)대학사 겸 군기대신 등을 역임했다.

 

비견할 이가 없을 정도로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대단히 사치했고 상사(賞賜)를 남발했다. 가경(嘉慶) 때 명령을 내려 장수들이 지나친 포상을 삼갈 것을 지시하면서 사례로 늘 복강안을 들었다.

 

건륭제 시기 효현황후의 친정 푸차 가문은 그 당시 가세가 최고로 찬란했던 가문 중 하나다. 그 이유를 찾아보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건륭제가 효현황후가 죽자 비길 데 없이 애통해 했고 더 나아가 외척에게 정을 많이 쏟은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건륭과 푸헝의 부인 사이에 애매한 관계가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따라 푸항의 아들인 복강안이 건륭제의 사생아인지 아닌지 결정된다고 본다. 사생아일까?

 

 

건륭제와 푸헝 부부 사이에는 분명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복강안의 부친 푸헝은 건륭제의 부인 효현황후의 동생이다. 민간에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푸헝의 처는 만주족 출신의 미인이었다고 한다. 알현하려 입궁한 때 건륭제의 마음에 들어 둘이 사통해 낳은 아들이 바로 복강안이라는 것이다.

 

푸헝은 누나, 처, 아들이라는 3중 관계로 인해 건륭제의 총애를 받았다. 대신들 중 가장 관직이 높은 자리에까지 올랐다. 대학사가 되고 기밀에 참여 했으며 23년간 태평성대의 재상으로 재직했다.

 

건륭 34년(1769) 푸헝은 군대를 이끌고 미얀마를 공략하다 악성 말라리아에 감염돼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건륭제는 친히 푸헝의 저택으로 가 애도했다. 그가 효현황후의 동생으로 자기에게 충성했고 군대를 거느리고 원정하면서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서 무척 비통해 했다.

 

그를 ‘사직의 대신’이라 부르고 도망시에서 “평생 충용하고 집안 명예였고 그대 아들을 내 아들 두 배로 교육하였으니”라며 의미심장한 표현을 썼다.

 

푸헝에게는 아들이 넷이 있었다. 장자 복령안(福靈安)은 금라(金羅)어푸(Efu, 액부(額駙), 청대 종실, 귀족의 사위에 대한 봉호)에 봉해졌고 조혜(兆惠)를 따라 위구르 공략에 공을 세워 정백기(正白旗) 만주 부도총으로 승진했다.

 

둘째 복륭안(福隆安)은 화석(和碩)어푸에 봉해졌고 병부상서와 공부상서를 역임했으며 공작(公爵)에 봉해졌다. 셋째가 바로 복강안이다.

 

그의 형 둘은 모두 부마가 됐지만 그는 건륭제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공주와 결혼하지 않아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을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때 그는 병부상서와 총관(總管)내무부대신의 직에 있었으며 태자태보(太保)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푸헝의 넷째 복장안(福長安)은 호부상서를 역임하고 나중에 후작(侯爵)에 봉해졌다.

 

당시 온 집안이 최고의 관계에 있으면서 부귀를 누렸다. 푸헝은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고 수차례에 걸쳐 복강안을 공주와 혼인시켜 부마로 삼기를 요청했으나 건륭제는 그저 웃기만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의혹을 품었다.

 

복강안이 어릴 적부터 건륭제의 사랑을 받았는데 어째서 건륭제는 유달리 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내 지위 높은 어푸(액부(額駙))를 삼지 않았는가? 정말 복강안이 원래 용종(龍種)이어서 그런가? 황실과 혈연관계에 있어서 그런가?

 

사실 건륭제 자신도 복강안과의 감정이 한 집안의 부자 관계와 같다고 인정했다. 은총이 각별했다. 복강안은 건륭 18년(1754)에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건륭제는 그를 궁실로 데리고 와 친히 교육시키는 등 친아들처럼 대했다. 복강안이 성인이 된 후 건륭제는 더더욱 중임했다. 생전에 버이서(패자貝子)에 봉했고 사후에는 군왕을 하사해 일대 최고의 총신이 됐다.

 

복강안이 19세 때 최고의 시위총병으로 삼아 정서대장군 온복(溫福)과 함께 대금천(大金川)을 공략했고 이후 길림(吉林)장군, 성경(盛京)장군, 성도(成都)장군, 사천(四川)총독, 섬감(陝甘)총독, 운귀(雲貴)총독, 민절(閩浙)총독, 양광(兩廣)총독, 무영전(武英殿)대학사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대소금천(大小金川)을 평정하는데 참가했고 대만 임상(林爽)봉기를 진압했으며 구르카(Gurkha, 곽이객(廓爾喀))의 침략을 패퇴시키는 등 중요한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복강안은 용감하게 전투에 임했고 지혜롭고 지략이 대단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사치한 생활로 그가 거느리는 대군이 지나간 곳의 모든 지방관들은 거액의 재물을 바쳤다고 한다. “풍악을 울리고 노래를 부르며 온 밤을 셌다.” 그리고 심지어 전쟁터에서도 그렇게 했다고 한다. 전선이 온통 피바다인데도 복강안의 군영은 노래와 음악이 흘러나와 밤낮없이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도 건륭제는 이에 대해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았다.

 

 

청나라 때, 초기 오삼계(吳三桂) 등 각지 반항 세력을 평정하면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장군과 몽골 등 소수민족 영수들 이외에 성(姓)이 다른 인물을 왕으로 봉한 것은 복강안 혼자뿐이었다. 복강안이 죽었을 때 건륭제는 너무 슬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문양(文襄)이란 시호를 내리고 가용(嘉勇)군왕으로 추숭했으며 태묘에 배향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건륭이 북강안에게 내린 특별한 은총에 대해 감탄하면서도 두 사람 사이에 심상치 않은 특수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의심했다. 어떤 사람들은 복강안이 건륭제의 사생아라고 추론하기도 한다.

 

건륭제가 일찍부터 그를 왕으로 봉해 다른 여러 황자들과 똑같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하고자 했으나 가법에 위배돼 뜻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복강안에게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가해 군공을 세우도록 하고 왕으로 봉할 기초를 쌓도록 했다는 말이다.

 

복강안이 출정할 때마다 건륭제는 세심하게 장성들을 선발하면서 정예 부대를 뽑아 반드시 승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다른 장군들도 건륭제의 뜻에 영합하기 위해 일부러 승전의 공을 취하지 않고 복강안에게 돌아가도록 했다.

 

건륭제는 먼저 그를 버이서에 봉했지만 복강안이 끝내 왕에 봉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자 군왕의 위를 하사했다. 어떤 사람은 시를 써 풍자했다. “한 가족 제비가 후궁을 여러 번 찾아가니 용종은 까닭 없이 하계로 내려왔네 ; 황후 친족을 몇 번이나 버이서에 봉하니 복안강은 천추의 수수께끼 됐어라.”

 

그러나 복강안이 건륭제의 사생아라는 설은 직접적인 증거가 턱없이 부족하다. 사생아라 결론지을 수 없다. 건륭제와 푸헝 부인 사이에 진정 어떤 말 못할 사연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건륭과 효현(孝賢)황후 사이에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쩌면 복강안이 효현황후의 친조카이고 개성 또한 건륭제와 맞았기 때문에 황제가 특별히 아꼈던 것은 아닐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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