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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회] 새별오름 ... 최영 장군 부대와 목호세력간의 치열한 격전지

 

제주역사의 커다란 분수령의 현장인 애월읍 봉성리에 위치한 새별오름은, 가파른 높이만큼이나 처연한 역사를 묻고 오늘도 등산객들을 품고 있다. 새벨오름·효성악(曉星岳)·신성악(晨星岳, 新星岳) 이라고도 부르며, 많은 사람들에게 들불축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제주에서 자주 회자되는 목호의 난은 고려 후기 공민왕 시절(1352-1374) 제주도에 살았던 목호세력이 주동해 일으킨 반란이었다. 공민왕의 반원정책으로 제주섬은 1356년부터 몽골족인 목호세력과 고려가 수차례 맞부딪치는 싸움의 현장이었다. 특히 명나라의 개입으로 1374년에 치룬 거대한 전쟁으로 목호세력은 최후를 맞이했고, 제주는 고려에 다시 귀속 되었다.

 

제주와 몽골의 교류가 이루어진 후, 제주마를 원나라의 말보다 더 선호한다는 평이 나게 되었다. 이에 명나라의 강력한 요구로 제주마를 공물로 바쳐야만 했다. 1374년(공민왕 23년)에도 명나라는 고려에 제주의 양마 2000필을 보낼 것을 요구했다.

 

이에 고려관리가 제주에서 말을 취하려 하자, 탐라목장을 관할하던 목호는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가 풀어놓아 기른 말을 명나라에게 바칠 수 없다.’면서, 300필만 내주었다. 명나라가 2000필을 재차 요구하자, 공민왕은 제주정벌을 위한 출정군을 편성하기에 이르렀다.

 

고려 정예군 2만5605명과 전함 314척으로 구성된 출정군의 총사령관은 최영 장군이었다. 이는 요동 정벌군 3만8830명과도 견줄 만한 최정예 전력이며, 당시 제주인구와 맞먹을 정도의 병력이었다. 출정군 이외의 예비부대가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지역에도 주둔했을 만큼, 고려조정은 목호와의 전투에 사생결단을 걸 듯 했다.

 

 

첫전투에서 출정군은 명월포에서 목호군에게 대패하였다. 목호군의 전투력에 대한 두려움과 제주선인들 상당수가 목호군 편이었던 것도 패배의 한 원인이 되었다. 목호세력의 수뇌부는 석질리필사, 초고독불화, 관음보 등이었다. 이들은 동·서 아막(阿幕)의 탐라목장 중 서아막을 관할하였고, 탐라목장의 주도권은 사실상 서아막 출신의 목호가 장악했었다.

 

기병 3천여 명과 수많은 보병을 거느리고 명월포에 포진했던 목호군에는, 당시 부락을 이루어 살았던 몽골족과, 이들과 결혼한 제주여자 사이에 태어난 반(半) 몽골족화 된 제주민과, 고려관리의 잦은 수탈에 반감을 품었던 제주사람 등이 가세해 있었다.

 

전투 초기에는 목호군이 명월포에 상륙한 출정군을 격퇴하여 기세를 올렸으나, 재차 벌어진 명월포 전투부터는 고려군이 승기를 잡았다. 이후의 전투는 목호군이 명월촌에서 새별오름 등지로 밀리면서 어름비 (애월읍 어음리), 밝은오름(한림읍 상명리), 검은데기오름(애월읍 봉성리), 새별오름, 연래(서귀포시 예래동), 홍로(서귀포시 서홍동) 에 이르기까지 밤낮으로 한 달여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전투에서 밀린 목호군 수뇌부는 서귀포 앞바다 범섬으로 대피했다. 최영 장군은 배 40척을 몰고 범섬을 압박해 들어갔다. 출정군의 압박으로 석질리필사는 처자식 등과 함께 항복하고, 초고독불화와 관음보는 벼랑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다.

 

범섬 전투 이후에도 동아막의 목호 등이 수백 명을 거느리고 계속 저항하자, 고려 출정군은 도망가는 무리를 전부 사살하였다. 고려의 토벌군이 제주도에 처음 상륙한 것이 8월 28일이고, 정벌을 마치고 제주를 떠난 것은 9월 23 일이다.

 

목호가 백 년 동안이나 제주선인들과 함께 살았다는 점은 목호세력의 지지기반으로 작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열녀조에 의하면, 정씨의 남편인 목호가 전사하자, 고려의 진압군 장교가 정씨에게 결혼하기를 강요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청혼을 물리치고 수절했다. 이러한 예에서 보듯 결국 몽골 지배 백 년 동안 몽골과 제주는 또 하나의 문화로 만났던 것이다. 그간 자행되었던 고려정부의 수탈도 탐라선인들을 자연스럽게 목호편에 가담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위의 사료 중 제주목 성씨 조에는 원나라와 관련된 성씨가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趙·李·石·肖·姜·鄭·宋·周·秦씨의 본관은 원이며, 梁·安·姜·對씨의 본관은 운남이다. 운남을 본관으로 하는 양· 안·강·대 4개 성씨는 원나라가 망한 뒤 명나라가 유배 보낸 원의 후손들이라 전한다.

 

새 별오름 입구에 설치된 안내판에는 다음의 내용의 글이 있다. ‘평화롭게만 보이는 이 들판은 고려 말 최영 장군의 부대가 여몽군과 일대 치열한 격전을 치렀던 역사의 현장이다.…’ 위의 문장은 ‘… 고려 말 최영 장군의 부대가 목호세력과 일대 치열한 격전 …’으로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안내판의 여몽군을 여몽 연합군의 의미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몽연합군은 최영 장군이 아닌 김방경 장군의 고려군과 몽고군 양군을 이르는 표현으로, 목호의 난 발발 100여 년 전 벌어진 삼별초 항쟁과 관련된 사건이다. 몽고의 잔당이나 몽고군의 여군 즉 같은 편으로도 해석이 가능 하나, 그런 의도가 깃들어 있다면 한자병기 정도는 해야 관광객들을 배려한 안내라 할 것이다.

 

최근 50여 명의 교사들과 순례길 안내차 찾아간 새별오름 입구에서 다시 안내판을 살폈다. 디자인과 글씨가 산뜻하게 바뀌었으나 역사적 내용 설명은 그대로였다.

 

목호의 난 이후 탐라선인들은 고려관리의 수탈과 행패로 여전히 어려운 삶을 이어가야 했다. 최영 장군의 목호세력 정벌 이후에도, 명은 탐라 말들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와 오히려 더 많은 말을 바쳐야 하는 부담도 져야 했다.

 

1379년(우왕 5년)부터 1392년(공양왕 4 년) 고려멸망까지 고려가 명에 바쳤던 3만 필 가운데 2만 필 이상이 탐라말이라 전한다.

 

제주역사의 커다란 분수령이기도 한 목호의 난은, 기존 제주사회의 공동체를 와해시킨 사건이자, 도민들의 큰 희생을 초래한 수난의 역사였다. 한편으론 몽골과의 관계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내다 보는 시선을 던진 사건이기도 하다.

 

다음은 몽골의 한 여인이 탐라에 간 남자를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로, 지금까지 몽골에서 불리고 있는 ‘지주호트(제주마을)’의 노랫말이다.

 

제주에서 가져온 비단으로 가지런히 수를 놓고 / 제주에 있는 임을 생각하면 이별의 아쉬움을 달랠 길 없네. / 제주에서 새로운 삶을 찾은 내 님 / 그리워함은 부질없구나.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를 두고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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