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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75)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화신(和珅)(1750~1799), 자는 치재(治齋), 만주 정홍기(正紅旗) 사람이다. 생원 출신으로 세직(世職)을 이어받았다. 건륭제 때 군기대신을 역임했고 호부상서, 의정대신을 거쳐 나중에 문화전(文華殿)대학사에 오르고 일등공으로 봉해졌다.

 

문예 방면에 재능이 있었고 용모가 준수했으며 안색을 살피는 데 능해 건륭제가 극히 총애했다. 그 집정 20여 년간 도당을 만들어 사리를 꾀하고 권모술수를 부려 재물을 탐했다. 가경(嘉慶)이 즉위한 후 건륭제가 죽기를 기다려 20조 항목의 죄목으로 옥에 가두고 자결을 명했다. 그의 가산은 몰수됐는데 황제의 재산과 버금갔다고 한다.

 

 

화신은 건륭제 시기의 제일 권신이다. 파벌을 만들어 사사로이 이익을 탐했고 권력을 휘둘려 정치를 혼탁하게 만들었다. 부패하고 타락했으며 횡령하고 수뢰했다. 권력을 독점한 20여 년 동안 거만하고 난폭했으며 제멋대로 굴었다. 이는 분명 건륭제가 총애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그렇다면 건륭제는 혼군(昏君)도 아니요 중국 역사상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성군이었으며 나라를 다스리고 국가를 편안하게 만든 인물이었는데 화신의 못된 행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말인가? 건륭제가 화신을 오랫동안 총애한 비밀은 무엇인가?

 

건륭이 처음 화신을 발탁했던 20년 전부터 그 이유를 찾아보자.

 

원래 건륭제가 20여 세쯤 됐을 때 궁에서 옹정(雍正) 황제의 비(妃)와 몰래 우스갯소리를 나누다가 모후에게 발각됐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 태자를 희롱한다고 생각해 자진하도록 했다. 건륭제는 부끄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손가락으로 그 비의 목에 수인을 찍으며 묵묵히 “내가 너를 죽게 만들었구나. 만약 영혼이 있다면 20년 후 다시 나와 만나자”고 약속했다.

 

건륭 중엽 어느 날, 건륭이 원명원(圓明園)에서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는데 수행원 중에서 어디서 만난 듯한, 입술이 빨갛고 이가 새하얀 미모의 소년을 발견하고는 어디서 봤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궁으로 돌아간 후 갑자기 20여 년 전 억울하게 죽은 후궁과 무척 닮았다는 걸 떠올렸다. 몰래 소년을 입궁시키고 일의 경위를 자세히 따져 물었다. 가만 보니 용모만 비슷한 것이 아니었다. 그 소년의 목에도 점이 있는데 손가락 자국과 닮은 게 아닌가.

 

불교를 신봉하고 있던 건륭제는 생사윤회를 믿고 있었다. 소년이 바로 그 후궁이 환생한 것이라 단정하고 더더욱 어여삐 여기고 아꼈다. 그 소년의 이름이 화신이다. 만주 정홍기 출신이며 관학의 학생이고 문묵(文墨)에 능통하다는 것을 알게 된 건륭은 곧바로 화신을 궁중 총관으로 발탁했다.

 

요직에 앉게 된 화신은 감격했다. 전심전력 충심으로 건륭제를 시봉했다. 건륭제도 늘 그를 옆에 두었다. 물으면 반드시 대답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황제의 뜻과 부합하니 건륭은 만족했다.

 

화신은 나날이 총애를 받았다. 건륭제는 거의 매일 밤 그를 불렀다.사랑하고 그리워함이 한(漢)나라 애제(哀帝)가 남총(男寵) 동현(董賢)을 그리는 것보다도 깊었다.

 

건륭제는 화신을 총애하면 할수록 자신 때문에 죽은 그 후궁에 대한 죄책감이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건륭제는 화신을 대하는 것이 일반 비빈들보다도 깊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늘 화신을 곁에 뒀다. 어떤 때는 그와 함께 어서방(御書房)에서 같이 잠자기도 했다. 바로 이런 과하다 싶을 만큼 이상한 관계 때문에 화신이 그렇게 단번에 높은 지위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화신은 시위(侍衛)에서 호부시랑, 군기대신으로 승진하고 문화전대학사까지 올랐고 일등공으로 봉해진다. 그의 동생 화림(和琳)도 그의 혜택을 입어 벼락출세해 병부상서에 오른다.

 

나중에 건륭제는 또 자기의 열 번째 딸 화효(和孝) 공주를 화신의 아들 풍신은덕(豊紳殷德)에게 시집보내면서 화곤과 건륭제는 겹사돈이 된다. 외인의 눈에는 화신 일가와 건륭제는 그야말로 한 집안으로 보게 되니, 어찌 화신이 잘못하고 있다고 반대하는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조정 대신들은 권력자에게 빌붙어 아부하려 했으니, 화신의 비위를 맞춰줄 수밖에. 대신들도 대부분은 화신과 패거리를 맺었다. 그는 일세를 풍미했다. 그의 가노들도 갖은 나쁜 짓을 저질렀지만 그 누구도 제지할 수 없었다.

 

건륭제 만년까지 줄곧 화신은 총애 받았다. 건륭 60년, 건륭제는 태자에게 선위하고 태상황이 됐다. 화신은 크게 놀랐다. 태자가 등극하고 난 후 자신이 화를 입을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건륭이 물러나는 것을 극력 저지했다. 이전의 건륭제라면 화신이 뭐라 하면 무조건 그렇게 따랐겠지만 이번에는 단호히 자기 결정을 따랐다.

 

건륭제는 그에게 “이번에는 내 결심이 섰다. 다시는 그것에 대해 말하지 말라. 나와 네가 인연이 있으니 이토록 오랫동안 함께 지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니더냐. 다른 사람이었다면 너처럼 그렇게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에는 좀 검소하게 사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건륭제는 화신이 뇌물 받고 법을 어겼으며 권력을 농단해 정치를 어지럽게 만든 행위를 몰랐던 것이 아니라 보고도 못 본 체 눈감아 줬다는 말이다. 그리고 화신은 건륭제의 황위를 불안할 정도로 위협적이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4년 후, 건륭제는 88세라는 고령으로 천수를 다하고 눈을 감았다. 그의 아들 가경(嘉慶) 황제는 즉각 화신이 20가지 대죄를 졌다고 선포하고 체포해 하옥케 한 후 자진할 것을 명했다.

 

화신의 가산을 몰수했다. 몰수한 액수의 엄청남에 조야의 상하 대신들은 크게 놀랐다. 진주보옥이 셀 수 없이 많았고 금은은 수백 량이나 됐다. 전당포가 수십 군데나 됐고 천이 넘는 건물, 천 경(頃)이 넘는 옥토, 몇 십 대의 큰 수레…… 화신은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대단한 탐관오리였다.

 

후대 사람들은 이에 대해 과장되게 묘사해댔다. 화신 집안의 재물은 8억 량이 넘는 백은이요, “화신이 쓰러지니 가경이 배가 불렀다”고 했다. 그렇게 청나라 태평성대라는 건륭시기,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었고 청나라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증명하는 이가 화신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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