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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76)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가경(嘉慶)(1760~1820), 이름은 옹염(顒琰), 건륭제(乾隆帝)의 열다섯째 아들로 건륭65년(1798) 황태자에 책봉됐다. 부친은 정치를 물려주고 태상황으로 물러났다. 가경 4년 부황이 죽자 친정하기 시작하면서 처음 탐관오리 화신(和珅)을 사사하고 계속해서 백련교도(白蓮敎徒)의 봉기를 평정했다.

 

게으름을 경계하고 성실하게 정무를 봤으며 실제적이었다. 예를 준수하면서 모든 것을 민정과 민의를 체험하고 관찰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천조(天朝)는 부유사해(富有四海)”라 자처했다. 25년 피서산장(避暑山莊)에서 죽었다.

 

가경 25년 더운 여름, 가경제는 많은 수행원, 명배우와 예기, 기마와 수레를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목란위장(木蘭圍場)을 향해 출발했다. 얼마 없어 열하(熱河)에 당도해 피서산장에 안착한 후 목란추수(木蘭秋狩)를 시작했다.

 

가경제는 피서산장에 진주하는 것이 자기 일생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7월 25일 60세인 그는, 어떤 징조도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가경제가 죽자 열하의 행궁은 정보를 봉쇄했다. 피서산장의 대문을 굳게 닫고 출입을 제한했다. 27일이 돼서야 도성에 남아있던 왕공 대신들이 부음을 듣게 됐다. 8월 2일이 돼서야 도광(道光) 황제는 내각에 조서를 발표하면서 조정의 위아래에 알렸다.

 

당시 조선국 관원이 성경(盛京)(현 심양(瀋陽) 중강(中江)) 지역에서 청나라 관원들이 모두 소복을 입고 모자에는 화령(청대 관모(官帽)에 관직의 높낮이를 표시하는 공작의 깃)이 없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묻고서야 황제가 죽었다는 것을 알 정도였다. 멀쩡하던 황제가 어떻게 갑자기 사망했을까? 본래 궁궐의 일은 비밀을 지켰으니 청 조정도 당연히 민간에 사인을 공개하지 않았다. 정확한 사인을 전해 듣지 못한 민간에는 수많은 추측과 루머가 생겨났다.

 

 

첫 번째 설은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가경제는 피서산장에 도착한 후 조금 쉬고 나서 무장을 하고 대신과 팔기금군을 거느리고 대규모의 인마를 재촉해 목란위장으로 달려갔다. 사냥감을 쫓아 여러 날을 돌아다녔는데도 호랑이나 곰 등은 전혀 보이지 않고 토끼 몇 마리만 잡았다. 평소에 여러 곳으로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사불상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가경제는 흥이 사라졌다. 기간을 앞당겨 추수(秋狩)를 마치기로 결정했다.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날씨가 바뀌며 천둥과 번개가 교차했다. 대지가 진동했다. 갑자기 평지에 벼락이 떨어졌다. 그리도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직 황제만 벼락을 맞아 낙마했다. 개선 귀영이 호상(護喪) 귀경으로 바뀌니 만주 조정은 망연자실 질겁할 정도로 놀랐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도 전한다. 가경제가 산장에서 병을 얻어 침상에서 몸조리하고 있었다. 가벼운 병이라 별로 문제가 없었다. 정신이 말짱하니 일상적으로 정사를 처리했다. 하루는 열하의 하늘이 급변해 우레가 울고 번개 치다 곧바로 침궁에 벼락이 떨어졌다. 황제 혼자 벼락 맞아 죽었다, 등등의 소문이 생겨났다.

 

벼락 맞아 죽었다는 설 가운데에는 더 황당한 이야기도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가경제는 오랫동안 어린 태감을 총애해 쾌락을 쫓아 늘 함께 즐기니 근신과 대신들이 비방했다. 산장에 머문 후에는 본래보다 더 심했다.

 

황제 침궁에 ‘연파치상전(烟波致爽殿)’을 세우고 전 뒤에는 조그마한 건물을 지어 ‘운산승지(雲山勝地)’라 불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건물이 황제와 어린 태감이 밀회하는 장소라 한다. 어느 날 그들이 쾌락을 즐기고 있을 때 갑자기 벼락이 구름을 뚫고 내렸다. 그때 불덩이 하나가 작은 건물을 덮쳐 가경제의 몸 위에서 폭발해 비명횡사했다고 한다.

 

가경제는 벼락에 맞아 다 타버리니 원래 모습을 되찾을 수 없었다. 염을 해 입관할 수도 없고. 그 사실이 폭로되면 궁정의 최대 추문이 될 것이 뻔했다. 대신들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가경제와 비슷한 용모와 체격을 가진 태감을 비밀리에 교사시키고 옷을 갈아입힌 후 진짜 황제 시신은 관 밑에 놓고 위에는 가짜 황제의 시체를 눕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고 북경으로 귀환한 후 안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들은 세상에 광범위하게 유포됐지만 아무런 역사적 근거가 없는 헛소문일 따름이다.

 

당시의 실제 상황을 근거로 추측해보면 가경제의 사인은 대체로 장기간 피로에 의한 심장 쇠약일 가능성이 많다.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후 황제라는 업무가 그를 초두난액(焦頭爛額)하게 만들었다. 업무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걱정거리들이 끊임없이 계속 생겼다. 그런 것들이 마음을 초조하게 하고 정신을 산란하게 만들면서 가경제 통치시기에 잠복해 있는 가장 큰 우환이 됐다.

 

가경 8년 2월 20일, 가경제는 수행원, 시위 등을 거느리고 말을 타 원명원(圓明園)을 나섰다. 신무문(神武門)으로 들어서서는 어가를 탔다. 그런데 신무문 서상방(西廂房) 남쪽 벽에서 갑자기 기골이 장대한 남자가 뛰쳐나와 곧바로 가경제가 탄 어가로 뛰어가는 게 아닌가. 급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시위와 어가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뛰쳐나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 사람은 순식간에 어가 앞에 당도했다. 그제야 황제의 수행원과 시위들이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남자의 손에 단도가 들려 있고 얼굴에 살기를 가득 품고 있었다. 가경제 어가 옆에 있던 정(定)친왕 면은(綿恩)이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고 여기고는 정면으로 달려 나가 막아섰다. 그 남자의 기세가 맹렬하고 칼도 날카로워 면은이 막아설 수 없었다.

 

이때 구룬(Gurun, 고륜(固倫)) 어푸(액부(額駙))친왕 라왕도르지(LavanDorji, 납왕다이제(拉旺多爾濟)), 어전 시위 단바도르지(DabaDorji, 단파다이제(丹巴多爾濟)) 등 5명이 함께 막아서서 격투를 벌였다. 격투 중 단바도르지는 무공이 강한 자객에게 찔려 상처를 입었다. 시위들은 황궁의 고수들로 평소에 훈련이 잘 돼 있었다. 5대 1이니 상대방은 점점 버티기 힘들어졌다. 몇 번의 회합을 거쳐 생포됐다.

 

흉수는 생활이 빈곤해 먹고 살기가 힘들어 죽으려 했으나 죽기 전에 경천동지할 일을 벌이는 것이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해서 황제를 살해하려 했다고 자백했다. 한바탕 벌어진 우발 사건일 따름일까? 자객은 제압됐지만 전대 황제들에게는 그런 괴이한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이와 비슷한 사건으로는 명대 말기에 ‘정격안(梃擊案)’이 있었으나 이는 명대의 정치적 부패에 의한 궁중 내의 총애를 얻기 위한 싸움에서 비롯된 추문이었을 따름이었다.

 

 

먼저 ‘정격안(梃擊案)’을 잠시 보자. 명대 만력(萬歷) 43년(1615)에 발생했다. 당시 신종(神宗)황후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왕공비(王恭妃)가 낳은 주상락(朱常洛), 정귀비(鄭貴妃)가 낳은 주상순(朱常洵)이 있었다. 처음 정귀비가 총애를 받아 신종은 “장자를 후사로 삼으라”는 조상의 교훈을 위배하고 주상순을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동림당(東林黨)의 반대에 부딪쳐 어쩔 수 없이 주상락을 태자로 책봉했다.

 

그때 장차(張差)라는 사람이 나무 몽둥이를 들고 태자의 거소인 자경궁(慈慶宫)으로 쳐들어가 문을 지키고 있던 태감을 때려 상처를 입혔다. 붙잡힌 장차가 심문을 받으면서 정귀비의 수하 태감 방보(龐保)와 유성(劉成)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자백했다.

 

사람들은 정귀비가 태자를 죽이려 했다고 의심했다. 그러나 신종은 그 일을 추궁할 생각이 없었다. 그 결과 미쳤다는 죄명으로 공개적으로 장차를 참살하고, 궁중에서 비밀리에 방보와 유성 태감을 주살하고는 사건을 종결지었다.

 

가경제는 자객이 자백했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을 살해하려는 이유를 믿지 못해 대신들에게 계속 수사하라 명령했지만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다. 가경제가 어찌 그런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자존심에 타격을 입었다. 가경제는 그 일을 수치로 생각했다.

 

가경제가 자객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사건에 대해 민간에서는 여러 가지 설이 나돌았다. 그 중 하나가 화신(和珅)의 도당이 벌인 일이라는 얘기가 전한다. 화신은 건륭황제 때 대단한 권세를 누렸던 인물이다. 가경 초기 건륭제가 태상황으로 물러나고 가경제가 등극했지만 화신은 조정대권을 틀어쥐고 패거리들을 포진시켜 가경제를 안중에 두지 않으면서 여러 차례 가경제와 마찰을 빚었다.

 

건륭제가 죽은 후 가경제는 즉각 화신을 죽이고 가산을 몰수했다. 그런데 화신의 패거리들은 조정의 위아래, 궁정 내외에 포진돼 있었다. 가경제가 화신을 죽임으로써 자기 자신도 많은 적을 두게 된 것이었다.

 

흉수가 누구인지는 이유는 무엇인지 불문하고, 앞서 얘기한 이야기는 가경제가 직면한 정국이 그리 안정적이지 않았음을 반영한다. 자객 사건에서 가경제는 아무런 육체적 상처를 입지 않았지만 심리적 타격은 상당히 컸다. 그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초조해 하던 가경제의 마음에 더 큰 부담을 안겨주게 됐다.

 

가경18년 농민봉기군이 공개적으로 정권 심장부인 자금성(紫禁城)에 쳐들어와 성루에 반기를 꽂고 직접 황후의 거처에 달려들어 금란전(金鑾殿)을 때려 부수려고 했다. 황궁은 황권의 상징이다. 황궁을 잃는다는 것은 통치기반이 붕괴됐다는 것을 뜻했다. 그의 통치능력이 극단적으로 멸시당한 것이었다. 통치력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봉기군은 진압됐지만 그는 또다시 자신의 무능을 감득해야 했다.

 

가경제는 부패를 말소하려고 있는 힘을 다했으나 이지러지는 제국의 면모를 일신할 수는 없었다. 탐관오리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었다. 공공이익을 해치고 자신의 이익만 탐했다. 재정을 독점해 상당히 엄중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심지어 탐관이 청관을 살해하는 황당한 일도 생겼다. 더욱 황당한 것은 위풍당당한 병부 행인(行印)(중앙 군사 국방의 최고 행정기관의 관인)이 놀랍게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잃어버린 것인지 도둑맞은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본의 아니게 소홀히 관리해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음모가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가경제가 악착같이 찾았으나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다.

 

가경제는 그 일을 통해 왕조의 관리들이 어느 정도까지 부패했는지 감득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나날이 심해지는 부패풍조를 시정할 수 있을지 방법을 찾지 못했다.

 

 

더욱 가경제의 골머리를 썩인 것은 사회불안이었다. 안정적이지 못한 조짐이 더욱 분명해지고 있었다. 직례(直隷), 산동(山東), 하남(河南0, 사천(四川), 안휘(安徽), 호북(湖北), 산서(山西), 흑룡강(黑龍江) 등지에서 민간종교 활동이 빈번해졌다.

 

종교교파의 이름이 수십이요 문도는 대부분 농민이었다. 절강(浙江) 영파부(寧波府)의 생원은 파화당(破靴黨)을 조직해 소송을 독점하고 관리를 억누르며 “심지어는 민중을 동원해 약탈하고 몽둥이로 사람을 상하게 했다.”

 

천재와 인재로 백성들이 삶을 도모할 수 없게 되자 소규모의 봉기가 계속 발생했다. 예를 들어 가경 23년, 산서(山西)성 교성(交城), 평양(平陽), 곽주(霍州) 일대에 유랑민들이 모여들어 산들이 잇대어 있는 곳에 들어가 왕을 자처했다. 화순(和順), 유차(楡次), 평정(平定), 요주(遼州) 등지는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이 도사리는 요충지가 돼 버렸다. 그들은 산 아래로 내려와 약탈하거나 성에 난입해 부자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도 했다. 내몽고, 경기와 직례 지역은 도둑으로 몰린 백성들이 무리를 이뤘다.

 

가경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부친 건륭이 다스릴 때는 천하가 태평했는데 자신이 강산의 주인이 되자 이리도 골치 아픈 일이 빈번히 발생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장기간 국가진흥을 가로막는 난제를 풀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온갖 수를 다 짜내며 25년을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러니 어찌 실망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며 우울하고 비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나날이 쇠퇴해가는 국가를 보면서 자신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세려야 셀 수 없는 공무에 휩싸여 빠져 나올 수 없었다. 이러한 과중한 부담은 그의 건강을 악화일로로 내닫게 했다.

 

가경제가 병으로 쓰러지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죽기 전, 어떤 징조도 없었다. 돌연사의 가장 큰 원흉은 피로 누적, 상심, 억압감, 고뇌, 우울과 초조였다.

 

그러나 사실적으로 얘기하자면, 몇 십 년 동안 봉건주의 대국을 다스리기 위해 전심전력하면서 모든 심혈을 다 쏟았기 때문에 얻은 병이었다.

 

그는 왕조의 퇴패를 호전시키려는 호기를 가지기도 했다. 국가를 진흥시키려 자임했던 웅지와 포부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재능으로 대청제국을 부흥시키기에는 불가능했다. 동요하는 전제주의 봉건 후기 사회를 이끌기에는 너무나 무기력했다.

 

시대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봉건주의 중국사회가 역사의 변화라는 거대한 물줄기 바로 위에 위태로이 서있었다는 말이 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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