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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회] 한림지역의 명소와 명인 ... 이시돌 목장의 맥그린치 신부와의 만남

 

한국명으로 임피제인 맥그린치 신부를 처음 만난 것은 2014년 9월이었다.

 

한림공고 교장으로 부임한 필자는 한림읍민들이 추앙하는 인물인 맥 신부에게 부임인사하러 이시돌 목장을 찾았다. 안내 받아 간 신부관에서 턱수염을 기른 외국신부가 우리말로 자기는 말띠라고 소개했다. 나도 말띠인데, 우린 동갑내기가 아닌가. 일년 지기처럼 친해진 신부가 어디론가 전화를 하였다. 그러더니 맥 신부께서 나를 만나겠다고 했다며 자기 일인 양 즐거워했다.

 

비영리 재단법인인 이시돌 농촌산업개발협회 이사장직을 오랫 동안 수행하다 2011년에 모든 직을 사임하고 지금은 이시돌 목장 외진 곳에서 기거하고 있는 맥 신부는, 학교에 부임하는 교장이 자기를 찾아준 것은 처음이라며 나를 더욱 환대하였다.

 

두번째로 맥 신부를 만난 것은, ‘교육제주가 만나는 제주인’으로 필자가 맥 신부를 추천하여 인터뷰를 담당한 기자와 동행한 방문 때였다. 1시간 예정이던 인터뷰 시간은 1시간 반을 훌쩍 넘겼고 신부님의 건강을 염려한 이가 가급적 빨리 인터뷰를 마쳐달라고 메시지를 보낼 정도였다. 인터뷰를 마치려 해도 맥 신부께서는 하던 말을 마치고 싶다며 2시간 넘게 교육에 대한 애정을 피력하였다. 다음은 그날 인터뷰한 내용을 곁에서 주섬주섬 주워들은 내용들이다.

 

1928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맥 신부가 1954년 한림성당의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할 당시 제주도는 피폐한 삶 그 자체였다. 젖먹이 신자까지 포함하여 25명 정도, 다들 가난했고, 성당도 없는 처지였다.

 

집집마다 인분을 먹는 돼지를 키우던 시절, 당시 돼지고기를 완전히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먹은 제주사람들은 기생충을 몸에 달고 다니곤 했다.

 

맥 신부는 우선 이런 전염병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계몽하기에 바빴다.

 

‘모두 가난한 시절이었지. 그땐 집집마다 똥돼지를 키웠지. 제주에 와보니 뇌병변 장애를 가진 얘들이 많더군. 트리키노시스(선모충 감염증)였지. 그 병은 돼지고기를 완전히 익히지 않은 것을 먹을 경우 걸리지.

 

한림과 수원, 옹포, 대림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똥돼지가 위험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기에 바빴지. 천주교를 믿으라고 돌아다닌 것보다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똥돼지를 기르면 안 된다는 걸 알리려 다녔어.

 

파란눈의 20대 신부가 하는 말을 쉽게 받아 드리는 사람들이 없더군. 소의 목초를 재배하기 위해 5년간 마을을 돌아다니며 교육을 시켰으나 실패했지. 비웃음과 냉대를 뒤로 하고 새로운 일을 벌여나갔지.

 

해당 분야에 정통한 이들을 제주로 데려온 거야. 아일랜드에서 날아온 젊은 봉사자들은 트랙터를 몰고 양돈사업을 일으키는데 도움을 주었지. 숙식만 해결하고 전문적인 기술을 기부하는 그야말로 재능기부자들이었지.’

 

목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문가를 모셔오는게 필수였다. 마침 후진국을 돕기 위해 기술자를 보내는 콜롬보 플랜이 가동 중 이었다. 뉴질랜드에서 목초조성의 권위자인 조지 홈스라는 노신사가 은퇴를 하고 자신의 기술을 발휘할 땅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1960년대 한국인들은 목초를 잡초 정도로 인식할 때였다. 맥 신부는 초지조성을 위해 농수산부를 자주 오가곤 했다. 마침 제주도를 방문하는 청와대 비서가 이를 알고 목초조성 전문가인 조지 홈스를 연결시켜주었다.

 

조지 홈스가 제주에 머무는 동안 숙식을 제공하는게 조건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목초재배는 대한민국 최초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했다. 2014년부터 중학교에서 자유학기제가 도입되었다. 하지만 아일랜드는 1970년대 이미 자유학기제를 넘어 자유학년제인 전환학년제를 도입, 1990년대에는 완전 정착시켰단다.

 

 

아일랜드는 여기와는 방학이 다르지. 우선 방학은 그야말로 방학, 진짜 방학이지. 학생들은 해수욕도 즐기고 노는 거야. 방학 중에 공부라는 건 없어. 그건 상당히 중요해. 한국 아이들이 밤 10시, 11시까지 학원을 다니는 걸 보면 불쌍해. 도대체 행복한 기억이 없을 것 같아.

 

시스템을 바꿔야지. 학원교육 없이 공교육에서 학생들을 맡아서 길러야지. 평범한 교사는 말로 하고 좋은 교사는 설명을 하고 더 좋은 교사는 모범을 보이고, 잊지 못할 교사는 감동을 준다지. 교사는 직업보다는 소명이지.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더니, 죽기 전에 제대로 된 호스피스 병원을 운영하고 싶단다. 현재도 이시돌 복지의원이 운영되고 있지만 좀 더 업그레이드 된 호스피스 병원을 말한다. 앓은 사람들이 고통 없이 떠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의사들은 고칠 수 없는 병이면 데리고 나가라고 한다. 이시돌에서는 호스피스 병원을 운영하기 위해 경주마도 생산하고 있다. 2천여 마리가 있으며, 여기에서 얻는 수익금은 모두 호스피스 병원에 투자할 계획이란다.

 

20대에 제주에 온 그는 9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장시간 인터뷰에도 그는 고마워하며 사진을 같이 찍겠다고 나섰다.

 

가난한 제주사람들을 위하여 지역개발사업, 교육사업, 복지사업 등을 추진하여 지역발전의 견인차 역할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석탑산업 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20대 중반의 신부가 1950년대에 초임 발령지를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한국을 선택한 것 자체가 도전이었다. 그 중에서도 변방인 제주도, 더군다나 한적한 시골이었던 한림읍을 선택한 것은 놀라운 도전정신의 발로로, 모두가 불가능하리라는 반대 속에서도 항상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돼지를 키우는 거구의  외국인 신부, 그것도 제주토종이 아닌 생전에 본적이 없던 하얀 돼지를 키우는 이상한 신부, 괴짜 신부로도 관심을 모았다.

 

당시 한림성당 초석을 다지는데 어떤 신자는 성담돌이라며 수레에 실어오기도 했단다. 아마 그 성담은 잣성이나 명월진성의 주춧돌, 또는 환해장성의 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손으로 우리의 역사를 허문이야기를 맥 신부에게서 듣다니….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색 건축물인 ‘테쉬폰’ 역시 맥 신부가 여러 채 지었다. 성이시돌목장 등에 10여 채가 남아있는 테쉬폰은 맥 신부가 산간의 황무지를 목초지로 개간하는 가정에서 도입한 건축 양식이다.

 

맥 신부는 고향인 아일랜드에서 배운 건축기술로 1961년 국내 처음으로 성이시돌목장에 숙소로 활용하기 위해 테쉬폰 건물을 지었다 한다.

 

이시돌 목장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가난한 농민에게 나누어준 스페인 성자 이시돌의 이름을 따서 1962년 세워졌다.

 

황무지를 개간하여 초원을 만들고, 축산업과 낙농업 등을 도입하고, 수직사와 이시돌 목장을 운영하고, 제주 최초의 한림신용협동조합 창립, 이시돌 양로원과 어린이집, 병원 등의 복지사업, 성이시돌 젊음의 집 운영 등 수많은 업적을 쌓으신 분이 맥그린치 신부이다. 평생의 삶을 제주사람들을 위해 바치신 분이다. 이러한 고마움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맥 신부와의 인터뷰 내용을 여기에 싣는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를 두고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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