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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회] 제주목관아지 주변의 역사유적 안내 글 모음

 

목관아가 복원되지 않았던 시절, 필자가 본 가장 오래되고 품위 있는 유적은 관덕정이었다. 그 후 2000년대 들어 도민들의 관심과 지원에 힘입어 이루어지기 시작한 제주목관아지 복원은, 제주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다리를 놓은 셈이다.

 

복원된 제주목관아와 관덕정 주변은 제주에도 소중한 역사문화가 숨 쉬고 있구나 하는 자긍심을 심어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역사 중에는 4·3의 직접 도화선인 1947년 3·1절 사건이 일어난 곳이고, 4·3 장두 이덕구의 주검이 효시된 곳 또한 관덕정 주변이었다.

 

관덕정(觀德亭)은 올바른 심신을 수양하기 위한 연무관으로 덕을 닦는 도장이란 의미를 지닌 곳이다. 관덕정 앞에는 숱한 세월을 건너온 돌하르방 4기가 묵묵히 이곳을 지키고 있으며, 정치·문화의 중심이었던 목관아지 부근은 오랜 세월 제주인의 삶과 역사를 지켜본 문화의 파수꾼 역할을 해온 광장이기도 하다.

 

제주목관아에는 여러 채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목사가 정사를 살피던 관아를 상아(上衙)라 했다. 반면 판관이 정사를 살피던 관아를 이아(貳衙)라 불렀다. 이아는 목관아에 버금가는 관아라는 뜻이다. 다음은 목관아지 주변의 역사문화 표지석과 안내판의 내용 들이다.

 

성주청 터: 설화의 내용을 보면 성주가 신라 때 처음으로 생겨난 관직이었다는 것은 추정되지만 이것이 제도화되고 정식 관청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고려시대 이후의 일이다.

 

탐라국은 1105년 고려에 병합되어 탐라군으로 재출발하게 된다. 이때부터 국가로서의 주권을 상실하게 되지만 성주제도와 성주청은 그대로 설치된 것을 볼 수 있다.

 

제주목관아: 사적 제380호로 지정된 제주목관아는 관덕정을 중심으로 동헌, 정무청, 홍화각, 애매헌, 귤림당, 청심당 등의 건물들이 있었던 곳으로 탐라순력도, 탐라방영총람 등 문헌기록이 전하듯 제주의 정치 행정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관덕정(보물 제322호): 제주가 걸어온 숱한 역사를 지켜보았던 관덕정은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쌓는다는 뜻이며,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좌위랑 터: 관덕정 앞에 길게 자리했던 좌위랑 터. 처음에는 객사 앞에 있었으나 1511년(중종 6년) 목사 김석철이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옛적에는 호남원병이 들어왔을 때 주둔했으나 원병제도가 폐지 된 뒤에 삼약방, 장춘원, 궁장방, 철장방, 영나졸방 등 여러 용도로 이용되었다.

 

우위랑 터: 관덕정 앞에 길게 자리했던 우위랑 터. 처음에는 객사 앞에 있었으나 1511년(중종 6년) 목사 김석철이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옛적에는 호남원병이 들어왔을 때 주둔했으나 원병제도가 폐지 된 뒤에는 무학청, 정갑청, 아병청, 영작청, 어변청, 출신청, 금군청, 삼학청 등이 들어와 여러 용도로 쓰였다.

 

찰미헌 터: 이아 동헌으로 지금의 제주대학부속병원 자리에 있었다. 창건 연대가 언제인지 기록이 없어 확실치는 않다. 판관이 정무를 맡아 보던 이아헌인 찰미헌 동쪽에는 판관의 회계 사무를 보던 목공수가 설치되었고, 그 동쪽에는 제주판관 휘하의 가솔들이 기거 하던 목가율청이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

 

찬주헌 터: 조선시대 찬주헌이 있었던 터. 1689년(숙종 15년) 목사 이우향이 창건하여 소장대로 삼고 찬주헌이라 명명하였다. 일명 소장대라고도 했다. 그 뒤 판관 사후 처로 유사시에 판관의 지휘소가 되었다. 조선시대 말에 헐리고 난 뒤 다시 복원되지 않았다.

 

풍운뇌우단 터: 풍운뇌우제를 지내던 제단 터. 풍운뇌우단은 처음 주 남쪽 3리 사직단 북쪽에 있었으며 1702년(숙종 28년) 목사 이형상이 헐었으나 1719년(숙종 45년) 목사 정석빈이 주민의 소청을 들어 이 자리에 옮겨 세웠다. 이곳에서는 음력 2월과 8월 두 차례 바람, 구름, 우레, 비의 신에게 제사를 봉행했다.(지금의 라마다 호텔 근처 바닷가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제주역사문화를 기록함은 제주의 정체성을 더욱 풍성하게 경작하는 옥토를 조성하기 위함이다. 요사이 목관아지 주변은 제주사람들 못지않게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주로 찾는 명소가 되고 있는 듯하다. 그들도 우리의 역사문화 현장방문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는 계기로 삼기도 할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를 두고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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