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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회] 선정을 베푼 제주목사 ... 이약동.이종윤.심연원.이회.윤구동.양헌수 목사

절해고도 유배의 섬 제주에는 조선시대 286명의 목사가 부임했다. 재임기간은 보통 500여 일. 지금의 도지사에 해당됨직한 벼슬 아치인 목사들은 제주선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명종실록(1555년)의 한 구절이다. “근래에는 제주목사로 적임자를 가리지 않고 탐오한 자에게 맡기므로 침학(侵虐)을 극도로 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원망하기를 ‘차라리 왜놈에게 죽겠다.’라고 한답니다. 이로 본다면 백성들의 곤궁과 고통을 알 만합니다. 대정현 등의 고을은 현재 남아 있는 백성이 50, 60여 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주는 군사 요충지이기에 주로 무관이 파견되었다.

 

그런 영향으로 무관 목사들이 문관 목사보다 더욱 혹독한 형장을 자행하였고, 그게 문제가 되어 선조는 ‘방어가 긴요한 곳에 번번이 문관을 보낼 수는 없다 해도 이따금 문관을 차견하여 보내라.’라는 칙지를 내리 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관행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더욱이 화산회토로 된 척박한 토지, 자연재해, 과다수취와 더불어 말 교역 통제에 다른 경제기반 붕괴가 수많은 제주선인들을 출륙유량으로 내 몰았던 것이다.

 

급기야 1629년 출륙금지령으로 이어지는 원악의 섬 제주에는 제주선인의 원성을 실은 터우만이 떠다니곤 했을 것이다. 그 많은 목사와 판관 중에는 선정을 베푼 어진 목민관들도 있었을 것이니, 이들을 찾다보면 더러 만나기도 한다.

 

제주에 산재한 목민관의 선정비는 대략 300여 기라 한다. 233대 제주목사인 윤구동 선정비가 단연 13개로 제일 많다. 양헌수 목사가 9개, 장인식 목사 가 8개로 그 뒤를 잇고 있다. 한라산 정상에서 치르던 한라산신제를 산천단에서 지내게 한 이약동 등 여러 목사들을 추려서 소개한다.

 

 

 

이약동 목사: 1470년(성종 원년)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도민들의 교학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목민관이었다. 제주에 좋은 교수가 없어서 학문이 성숙대성하지 못함을 보고 몸소 경서를 교수하였으며 특히 문무를 겸비한 목사를 제주에 보내어 달라고 상계하였다. 산천단에 그를 기리는 커다란 비석이 울창한 소나무들과 어울려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이종윤 목사: 1490년(성종 21년) 제주목사로 온 그는 학문을 장려하고, 선정을 베풀어 그의 임기가 끝날 무렵 양효손 등 제주선인 300여 명이 간곡하게 유임시켜 줄 것을 진정하자,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유임하도록 하였다. 1494년(성종 25년)에 이곳에서 병사하니 도민들이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였다.

 

심연원 목사: 1534년(중종 29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심연원은 충암 김정의 제자인 김양필의 건의를 받아들여 향교의 명륜당을 중수하고, 성안 남쪽에 향학당을 설립하여 일반백성의 자제교육에도 힘쓰는 등 교학진흥에 힘썼다. 향시에 급제한 김양필을 교수로 기용하여 학문을 장려하였다.

 

이회 목사: 1658년(효종 9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회는 정사를 보면서 틈틈이 향교에 나가 경서를 유생들에게 가르치고, 우수한 자에게 시상하여 격려하니 교학이 크게 진흥되었다. 특히 명도암 김진용의 건의를 받아들여 장수당을 지어 훈학에 앞장서기도 했다. 가끔 만나는 유적 안내의 글에서 이회가 아닌 이괴로 적은 곳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는 한자가 비슷한 데서 오는 잘못으로 이괴가 아닌 이회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윤구동 목사: 문신으로 1815년(순조 15년) 5월에 부임하여 민폐를 없애고 재해에 대비하였다. 1817년 흉년이 들자 호남지방에서 곡식을 가져와 도민을 구제하였으며, 같은 해 10월에 형조참의에 임명 되어 제주를 떠났다. 윤구동 목사의 선정비는 외도동 월대와 화북 동· 와산리· 북촌리·김녕리·토평동 비석거리 등지에 13기나 있다. 

 

 

 

 

 

양헌수 목사: 본관이 제주 양씨이고 무관인 그는, 강화도에서 태어나 1864년(고종 1년) 3월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도임하여 1866년 8월 떠났다. 전 판관 백기호의 탐학(엄형 후 흑산도에 유배됨)을 징치하여 제주도민의 칭송을 받았고, 1864년 7월에는 태풍으로 기와가 날리고 곡식이 절종 상태에 이르자, 이를 둘러보면서 통곡하였다.

 

 

가을태풍으로 이재민이 생기자 장계를 올려 조정에 구원을 호소해, 내탕금 2000 냥을 하사받아 태풍피해를 복구하는 등 선정을 베푸니, 조정에서 1년 유임하여 도민구휼에 힘쓰도록 하였다. 그가 떠날 때에는 백성들이 길을 메워 석별을 아쉬워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를 두고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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