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80)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동치(同治, 1856-1875), 이름은 재순(載淳), 함풍제(咸豊帝)의 큰아들이다. 함풍11년(1861) 7월 황태자에 옹립되고 10월에 황위에 오르는데 그의 나이 여섯 살이었다. 동서(東西)의 두 궁의 황태후가 수렴청정하다 동치12년 정월에야 비로소 친정한다. 친정 이듬해 양심전(養心殿)에서 병사했다. 묘호는 목종(穆宗)이다.

 

청 왕조 목종 동치황제의 죽음에 대해 관방에서는 천연두를 앓자 급히 고치려 했으나 손 쓸 새도 없이 죽음에 이르렀다고 했다. 100일 이후 황후도 뒤따르면서 세상을 경악케 했다.

 

조야에서는 그 둘의 사인에 대한 의론이 분분했다. 황제와 황후 둘이 세상을 떠남에 2개월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정상적이지 않은 숨겨진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 여기게 만들었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기이한 소문이 나돌았다.

 

먼저 동치제의 전후관계를 살펴보자.

 

동치제가 즉위한 때의 나이는 겨우 여섯 살이었다. 처음에는 8대신(숙순(肅順), 어전대신 재원(載垣), 단화(端華), 경수(景壽), 군기대신 목음(穆蔭), 광원(匡源), 두한(杜翰), 초우영(焦祐瀛))이 보정(輔政)하고 오래지 않아 함풍의 황후 니오후루(뉴호록(鈕祜祿)) 씨 즉 동(東)태후와 예허나라Yehenala(엽혁나랍(葉赫那拉)) 곧 서(西)태후가 공(恭)친왕 혁흔(奕訢)과 연합해 정변을 일으킨다.

 

이후 자안(慈安)태후 니오후루 씨와 자희(慈禧)태후 예허나라 씨가 함께 수렴청정 했다. 동치 11년 두 황태후는 17세의 동치황제를 위해 황후를 선발하려 준비했다. 이 일은 본래 경사였다. 그런데 이로 인해 평지풍파가 일어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당시 황후 후보가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시랑(侍郞) 숭기(崇紀)의 딸이었고 다른 한명은 시랑 봉수(鳳秀)의 딸이었다. 자희태후는 봉수의 딸을 선택하려 했으나 자안태후와 동치제 본인은 숭기의 딸을 마음에 들어 했다.

 

결국 숭기의 딸 알터Alte(이로특(阿魯特)) 씨가 황후에 선택됐다. 자희는 대단히 분노했다. 이때부터 동치와 황후 알터 씨는 어려움에 봉착한다. 심지어 그들의 내궁 생활에도 태후가 간섭한다.

 

황후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 동과 서 두 궁의 태후는 의견이 달랐다. 자안태후는 몽골 정람기(正藍旗)이며 한림원 시강(侍講)인 숭기의 딸 알터 씨를 마음에 들어 했다.

 

숭기는 첫 몽골 장원으로 학자 가문이었다. 알터 씨는 그러한 가정에서 성장했기에 교양이 있고 학식을 갖추었다. 어릴 적부터 “정숙하고 단아하며 지혜를 갖추었고”, “용모와 덕성이 빼어났으며”, “예의를 잘 알고” 있어서 뛰어난 문화적 소양을 가지고 있었다.

 

자안황후는 분명 재순(동치)의 행복과 내전의 안녕을 위해 내린 생각이었다. 재순이 어리기 때문에 단정하고 정숙한 아내가 후궁과 비빈을 단속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현숙한 황후’를 선택하면 어머니인 태후의 근심을 덜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희태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서태후 자희는 먼저 알터 씨의 외조부 정(鄭)친왕 단화(端華)를 떠올렸다. 단화는 죽은 함풍제가 중용했었고 임종 때에 선정한 8명의 고명대신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신유정변(辛酉政變)’ 때 자희에게서 자진할 것을 명받아 죽은 정적이 아니던가. 자희는 황후의 자리를 자신의 정적의 외손녀에게 넘겨주기 싫었다.

 

그녀는 만주족 양황기(鑲黃旗)이며 원외랑 봉수의 딸 푸차(부찰(富察)) 씨를 마음에 들어 했다. 당시 14세밖에 안 됐지만 자희는 그녀의 총명함과 어여쁜 용모가 좋았다.

 

두 명의 태후가 각기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달랐으니 결국 선택권은 재순에게 넘어갔다. 자희는 비록 재순의 생모이기는 했지만 그녀의 아들에 대한 관심이나 사랑은 결코 자안을 뛰어넘지 못했다.

 

재순도 평소에 자희보다는 자안의 말을 따랐다. 다른 뜻을 품고 있는 두 명의 태후가 어쩔 수 없어 결국 재순을 불러 자신의 배우자를 선택하도록 해야만 했을 때 재순은 생모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자안의 뜻을 따랐다. 어쩌겠는가? 자안태후도 ‘국모’라는 위엄이 있었는데. 자희태후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알터 씨와 자희의 성정 및 취미는 전혀 달랐다. 알터 씨는 단정하고 예의를 갖췄으며 당시(唐詩)를 암송하기를 좋아했다. 자희태후는 희극(戱劇)을 즐겨 늘 황후를 데리고 함께 관람했다.

 

희극을 보면서 음탕한 부분이 나오면 알터 씨는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자희가 무슨 말을 하던 그녀는 보지 않았다. 그래서 자희는 그녀를 뼈에 사무치도록 싫어하게 됐다.

 

알터와 동치의 관계는 대단히 좋았다. 황제를 만날 때마다 웃는 얼굴로 마중했다. 자희는 그녀를 더욱 질투하고 미워했다. 그렇게 재순과 알터 씨의 혼인은 처음부터 불행의 씨앗이 잉태돼 있었다.

 

전횡을 일삼고 방자했던 자희태후의 눈에는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은 그저 가시에 불과했다. 결혼 후 알터 씨는 자희태후 앞에서는 조신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자희는 며느리를 괴롭힐 일만을 항상 마음에 두었다.

 

재순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 혼인했기에 자연스레 황후의 궁으로 갈 일이 많았다. 어린 부부가 서로 사랑하면 어머니로써는 즐거워야 마땅했다. 그러나 자희는 반대였다. 어린 부부가 서로 사랑하면 할수록 자희의 질투는 더 심해졌고 오히려 반감만 더 쌓였다.

 

자희태후는 황제에게 혜비(慧妃)의 어질고 총명함을 칭찬하며 자주 혜비의 궁으로 가도록 했다. 그 둘을 친하게 만들기 위해 “황후는 어려 궁중 예절에 익숙하지 않으니 항상 배워야 한다”는 미명아래 재순을 황후의 궁으로 가지 못하게 하면서 사랑하는 부부를 갈라놓으려 했다. 그러나 재순은 혜비의 궁으로 가지 않았다. 나중에 아예 양심전에서 혼자 기숙했다.

 

황후는 비록 자희태후가 자신을 괴롭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은 분명 황후의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에 자기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자희도 어쩔 수 없을 것임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희태후에게 아첨하며 비위를 맞추지 않았다. 그러자 자희태후는 매번 알터 씨를 괴롭히면서 트집을 잡아 힐책했다. 어느 해, 자희는 알터 씨를 폐위하려 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종인부(宗人府) 종령(宗令)이며 도(悼)친왕인 혁량(奕諒)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나서 제동을 걸면서 알터 씨는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

 

하루는 동치제가 병이 들자 황후 알터 씨가 양심전으로 간병하러 갔다. 침대에 드러누워 부부가 서로 의지하며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나누다 황후가 고부간의 갈등을 얘기하면서 상심해 눈물을 흘렸다.

 

황제는 백방으로 안위하면서 “더 참고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빛을 볼 날이 올 거요”라고 말했다. 벽에도 귀가 있음을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이 말이 자희의 귓속까지 스며들게 됐으니. 커다란 재난이 닥쳤다.

 

자희태후는 황제의 내실로 뛰어들어 폭위를 함부로 휘두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여우같은 년이 또 황제를 꼬드겨!” 황후는 해명했다. “저는 봉황거를 타고 대청의 문을 통해 궁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천하가 다 압니다. 황제께서 병이 나 제가 간병하러 왔는데 이게 무슨 죄가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이 말은 기름에 물을 부은 격이 돼 버렸다.

 

자희태후는 황후가 자신이 수녀(秀女)의 신분으로 입궁한 빈천한 출신이라는 것을 비꼬는 것이라 여기고서는 황후의 머리카락을 잡고 매질을 했다. 황후가 어찌 되받아칠 수 있으랴. 자희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태감을 불러 “곤장을 갖고 와 봉행하라!” 소리쳤다.

 

 

동치13년(1874), 명의상 동서(東西) 궁의 태후가 황제에게 정권을 맡겼지만 실제로는 자희태후가 여전히 권력을 전횡하고 있었고 동치제는 괴뢰에 불과했다. 조정대사나 가정의 부부의 사생활에도 자희태후의 잔혹한 간섭이 자행됐다.

 

동치제는 자신의 성격이 연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반항할 힘이 없었다. 반항을 한다고 해도 모후(母后)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예 자포자기해 버렸다.

 

궁중에서는 동치제가 할 일이 없었다. 심심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태후들을 속이기로 한다. 청색 장삼으로 갈아입고 어린 태감 열댓 명을 데리고 일반 백성처럼 출궁해 도성 도처를 돌아다녔다.

 

그는 미복으로 놀러 나갈 때 왕공 대신들을 만나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그래서 큰 오락장소나 큰 점포, 큰 음식점에는 감히 갈 수 없었다. 그가 늘 가던 곳은 천교(天橋) 야시장, 한가담(韓家潭) 유곽, 그리고 한적한 거리의 차관이나 주점이었다.

 

그런 자그마한 곳에는 왕공 대신들이 왕래하지 않았다.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자그마한 별천지였다. 그런 날이 길어지자 북경 성내에는 점차 동치제가 미복으로 출유한다는 소식이 퍼져나갔다. 단지 자희태후 혼자만 몰랐다.

 

동치13년 12월 동치제가 죽는다. 태의원(太醫院)은 그의 병을 ‘천연두’라고 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한가담 유곽에서 매독(梅毒)에 걸렸다고 한다. 당시에는 매독을 치료하는 특효약이 없었다.

 

태의원은 만세야(萬歲爺)가 매독에 걸려 죽었다고 하는 것은 불명예스럽기 때문에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고 사실을 덮었다고 한다. 친정한지 겨우 2년, 19세의 동치제는 양신전에서 세상과 이별한다.

 

재순이 죽을 때 후사가 없었다. 황제가 죽었으니 황위를 승계할 자를 찾아야 했다. 아들이 없으니 종실에서 ‘부(溥)’자 항렬의 인물을 찾아 계승시켜야 했다. 당시 왕공들은 제1대 공친왕 혁흔(奕訢)의 손자 부륜(溥倫)이 순서상 맞는다고 생각했다. 혁흔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지만 모두 일찍 죽었다. 손자로는 부위(溥偉), 부륜, 부유(溥儒) 등이 있었다.

 

그러나 자희태후는 순서에 입각해 황위에 앉히면 자신은 태황태후가 되기는 하겠지만 수렴청정 할 수 없고 그저 궁중에서 만년을 하릴없이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권력을 목숨과 같이 여겼던 자희거늘 어찌 쓸쓸히 여생을 보낼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자희는 순(醇)친왕의 아들 재첨(載湉)을 영입하도록 지정해 알렸다. 6세의 재첨은 재순(載淳)의 종제였다. 그는 자희의 친여동생의 아들이었으니 황실 혈통에다 외척 혈통까지 더한 셈이다. 그렇게 자희는 여전히 황태후로 행세할 수 있었고 계속 ‘수렴청정’하며 조정을 장악했다.

 

 

자희태후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정권을 안전하게 인수인계시키자 황후 알터 씨는 그저 ‘가순(嘉順)황후’라는 봉호만 받고 새로운 군왕의 과부 형수가 됐다. 권력도 세력도 없이 조정과는 무관하게 된 것은 당연하고.

 

재순이 죽은 후 100일도 채 되지 않아 세상과 영별하고는 동치제를 따라갔다. 황후 알터 씨가 그렇게 민감한 배경아래 돌연사 했으니 무성한 소문이 떠도는 것은 당연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동치제가 죽은 후 자희태후가 재첨을 황제로 앉히자 알터 씨는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단식하며 항의했다고 한다. 자희가 듣고 곧바로 알터 씨를 들라고 한 후 뺨을 때리며 “네가 내 아들을 죽여 놓고는 황태후가 되려고 생각한다는 말이냐?” 욕을 해댔다.

 

알터 씨는 무릎 꿇고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한참이 흘러서야 궁으로 돌아가도록 윤허가 내렸다. 그때부터 황후는 하루 종일 비통함에 눈물만 흘렸다. 두 눈이 붉게 물들었고 건강도 약해져 초췌해졌다.

 

어느 날, 알터 씨의 부친 숭기가 딸을 보러 궁으로 갔다. 상황을 보고서는 가슴이 칼로 도려내는 듯 아팠다. 곧바로 자희태후에게 보고했다. 자희가 듣고는 음험하게 “황후가 그렇게 비통해한다면 동치제를 따라가라고 그래라”고 말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궁에서 황후 알터 씨가 죽었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동치제가 죽은 지 2개월 반이 지났을 때였다.

 

이와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동치 황후는 자희태후의 강압에 의해 황금을 삼키고 자살했다고도 한다. ‘탄금자살(吞金自殺)’은 견디기 힘든 자살 방법이다.

 

홑원소 황금 물질은 인체에 독성이 없다. 황금의 비중이 커서 삼키면 장을 압박해 배출하지 못하게 된다.

 

치명적이지 않아 순식간에 죽음에 이르지 않고 참기 힘든 통증을 견디다가 고통스럽게 죽음에 이른다. 소화기를 찢어 죽음에 이른다고도 하고. 아무튼 인간으로써 행할 방법은 아니다.

 

황제의 자리에 있던 남편이야말로 알터 황후 자신을 알아주던 사람이었다. 남편이 죽자 궁중에는 자신을 이해해주던 유일한 사람이 사라졌으니, 그녀는 자신의 앞길에 아무런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자포자기 상태가 됐을 것이다.

 

자희태후의 전횡과 음험하고 악독함도 떠올렸다. 황후의 마음이 잿더미가 됐다. 그리고 금을 삼킨다. 그때 나이 22세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