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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사일런스

스코세이지 감독은 ‘사일런스’ 전편에 걸쳐 고통스러운 ‘후미에踏み絵’ 장면을 배치한다. ‘예수상 밟기’다. 일본 선교에 나섰다 당국의 검색에 걸린 제수이트 교단 신부들은 물론 일본의 크리스천(기리시탄ㆍキリシタン) 모두 후미에 검증을 통과해야만 혹형과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어찌보면 대단히 단순하고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는 ‘요식 행위’를 둘러싸고 고통스러운 장면들이 연출된다. 예수상을 밟는 대신 죽음을 택하는 사람도 있고, 대수롭지 않게 지르밟고 목숨을 부지하기도 한다. 나가사키 지역 기리시탄의 리더격인 모키치는 단호하게 ‘후미에’를 거부하고 예수처럼 조수 간만차가 심한 바닷가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빠져죽는 ‘익사십자가형’을 받는다.

 

페레이라 신부와 로드리게스 신부도 결국 밟게 되는 예수상을 오히려 거의 독학으로 성경 말씀을 접한 일본의 일개 촌로村老 모키치가 목숨으로 지킨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다. 믿음은 배움과는 거의 무관하다. 악명 높던 ‘후미에’는 사실 도쿠가와 막부가 고안한 검증 절차가 아니라 네덜란드 상인들이 도쿠가와 막부에 제공한 아이디어였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시마바라의 난’ 이전까지 멀쩡하게 일본과의 교역을 통해 재미를 보던 네덜란드 상인들은 기독교 탄압이 시작되고 교역까지 막히게 되자 자신들이 결코 ‘예수교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건강한 상인’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자진해서 나가사키 관헌들 앞에서 예수상을 밟아보인다. 물론 상인들 대다수가 개신교도들이었지만 생계를 위해 그 정도 요식행위는 개의치 않는다. 아마도 예수상을 밟고 간단히 ‘회개 기도’를 하는 것으로 마음의 부담을 털어버린 모양이다. 대단히 실용적이다.

 

 

한때 세계 상권을 놓고 다퉜던 영국인들은 네덜란드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여긴다. 영국인들이 보기에 그들은 인색하기 짝이 없고, 돈 되는 일이라면 못할 짓이 없는 사람들이다. 같이 모여서 화기애애하게 밥 잘 먹고 밥값은 각자 먹은 만큼만 내는 소위 ‘더치 페이(Dutch pay)’라는 기묘한 짓을 하는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이고, 튤립 한 뿌리에 집 열채값을 투기하는 ‘미친놈’들이기도 하며, 돈이 된다면 수도 암스테르담에 세계 최대의 아프리카 노예시장을 만드는 대단히 ‘눈살 찌푸려지는 인간’들이다.

 

기독교인들이 ‘주(Lord)’라고 부르는 예수상을 네덜란드 상인들이 밟는 것을 보고 에도 시대의 사무라이들은 그들은 ‘예수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양이다. 주군主君을 향한 충성과 명분, 의리를 강조하고 걸핏 하면 배를 가르고 죽어버리는 에도시대의 사무라이들에게 자신의 주군 얼굴 그림을 밟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을 것이다. 예수상을 차마 밟을 수가 없어서 처형당했던 모키치를 비롯한 일본의 ‘기리시탄’들은 아마도 ‘일본정신’에 투철했던 모양이다.

 

모키치가 ‘일본적’이라면 키치지로는 ‘네덜란드적’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예수상을 밟을 수 있고, 돈이 된다면 자신의 고해신부인 로드리게스 신부마저 관헌에 팔아넘긴다. 또 걸리면 다시 ‘후미에’를 하면 그만이고, 죄를 지으면 로드리게스 신부를 찾아가 또다시 ‘회개’하면 그만이다.

 

도쿠가와 막부는 ‘후미에’ 절차를 거쳐 몇번이고 반복해서 키치지로를 방면하지만 키치지로는 예수를 마음속에서 모두 지우지는 못하고 어정쩡한 기리시탄으로 남는다. 좀비형 기리시탄이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몇번이고 되풀이해 키치지로를 용서하지만 그는 죄 짓기를 멈추지 않는다. 결국 키치지로는 제 버릇 개 못 주고 소매치기로 걸려드는데 운수 사납게도 소매치기한 주머니에서 십자가가 나와 ‘드디어’ 처형된다. 훔친 것일 뿐이라고 아무리 항변해도 이번에는 통하지 않는다. 비로소 ‘삼진 아웃’이 적용된 듯하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법원의 판결을 둘러싸고 말이 무성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논란도 여전하지만 온갖 흉악범죄를 관대하게 처벌한다는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강간, 살인에도 ‘심신미약’이나 ‘주취경감’의 감형 사유가 따라붙고 혹은 초범이고, 피해자와 합의하고, 반성하고 있다는 이유 등으로 그나마 형 집행이 유예되기까지 한다.

 

 

물론 개과천선하고 ‘새사람’이 되는 초범들도 있겠지만 관대한 처분을 받고 나와 또다시 동일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를 너무 자주 접하게 된다. 키치지로의 부질없는 회개인 셈이다. 우리 사회를 소위 ‘헬조선’이라 자조하는 많은 부분이 ‘패자부활전’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라는 살벌함에서 나온다.

 

조금은 기이하다. 범죄에는 관대한데 실패에는 엄격하다. 실패가 과연 범죄보다 용서받기 어려운 악인가. 범죄를 저지른 이는 너무도 관대하게 ‘새사람’으로 거듭날 기회를 받는데, 실패한 사람은 야박하게도 그 기회를 제대로 부여 받지 못한다. 범죄에는 엄격해도 실패에는 조금 더 관대한 세상이 되길 소망한다. /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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