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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86)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시대가 변하면서 영화나 드라마에 의해 태감(太監)이 무엇인지 갈수록 많은 사람이 알게 됐다. 중국 이천여 년이 넘는 봉건전제사회에서 태감은 역사발전사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왕조의 멸망이 태감의 손에 좌우되기도 했다. 태감에 대한 호칭은 많다. 환관(宦官), 사인(寺人), 엄인(閹人), 중관(中官), 내시(內侍)가 그것이다. 모두 거세(去勢, 엄할閹割)한 남성이다. 전문적으로 황궁에서 황실에 시중들던 인물들을 가리킨다.

 

태감은 남성이라 할 수 없었다. 수염도 없고 목소리도 높고 가늘었다. 그런데 그들의 행위와 목소리가 여성화된 경향이 있기는 했으나 그들을 여성으로 볼 수 없음은 분명하다.

 

어떤 의미에 있어 그들을 ‘중성인(中性人)’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대(漢代) 이후 태감들은 취처(娶妻)하기도 했다. 즉 장가를 갔다는 말이다. 태감의 처자는 대부분 궁중의 여관(女官)으로 그들의 결합을 당시에는 ‘대식(對食)’이라 불렀다.

 

생식 능력이 없는 태감이 어째서 취처했는가? 그 상황에 대해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의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오랫동안 연구를 거듭하여 그 문제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태감이 취처한 이유는 가사(家事)를 처리하기 위해서라는 관점이 그중 하나다. 궁정의 규칙에 다르면 태감 사이에는 삼엄할 정도로 엄격한 등급이 있었다. 대체적으로 총관(總管), 수령(首領), 어전(御前)태감, 전상(殿上)태감과 일반 태감으로 나뉘었다.

 

황제, 황후, 태후를 시봉하는 자는 총관과 수령이고 비빈(妃嬪) 곁에는 수령이 시봉했다. 각종 일을 관리하는 상층 태감은 자신의 주방과 화원 주택을 가지고 있어 안일하고 부유한 생활을 누렸다. 태감, 특히 상층 태감은 처리해야 하는 집안일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집안일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처자를 들여 일가를 이루는 것을 택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관점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저 집안일을 처리하기 위한 것이 태감이 취처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거반은 하녀를 고용했기 때문이다. “하녀를 고용하면 족하다. 어찌 정명으로 처자를 들여야만 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여러 황제들이 하사하니 처자 하나로도 부족하여 두셋을 처로 두니 이 또한 괴이한 일이다.”

 

그렇다면 태감이 취처한 이유는 무엇일까? 부부생활을 동경하면서 생겼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황제와 여러 비빈들이 부부생활을 하는데 태감들도 그런 것들을 많이 보고 들어 은연중 영향을 받게 된다. 그들을 동경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경사(敬事)태감은 더욱 그러했다. 경사태감이란 황제의 규방 일을 책임지는 태감이다. 황제의 비빈이 여럿이라 비빈을 골라 잠자리를 같이 하도록 해야 하는데 경사태감이 큰 역할을 했다.

 

매일 태감은 비빈의 이름이 쓰인 열 몇 장 내지 몇 십 장의 ‘녹두패(綠頭牌)’가 든 은반(銀盤)을 받쳐 들고 갔다. 황제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경사태감이 ‘녹두패’를 올리면 황제가 선택했다. 그런데 황제는 여러 비빈의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알지 못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경사태감의 의견을 물을 수밖에.

 

이런 까닭에 비빈들은 평상시에 태감을 구슬려 자신이 선택될 수 있도록 만들려고 노력했다. 비빈이 황제의 침궁에 들기 전 먼저 향수로 목욕하고 정성들여 화장한다. 당직을 맡은 태감이 우모(羽毛)로 만든 포대로 욱여싼 후 나체의 비빈을 싼 포대를 지고 황제의 침궁으로 들어간다.

 

태감이 용상에 다다르면 이불의 하단을 열어젖히고 총애를 받을 비빈을 이불속으로 들어가게 했다. 성관계를 할 때 밖에서 태감이 문을 지키고 있다가 일정한 시간이 되면 태감은 무릎 꿇고 “시간이 됐습니다!”라고 외쳤다.

 

규칙이 그러하니 어떤 황제는 손뼉을 치는 것을 신호로 태감에게 비빈을 이불로 싸 물러가도록 하기도 하고 어떤 황제는 마음에 들어 다른 일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총애하는 비빈과 하룻밤을 세우기도 했다.

 

 

오랜 기간 황제의 부부생활과 접촉하니 태감들이 자극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태감이 취처했다고 본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 1년 내내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비빈들이 무척 많았다. 그래서 경사태감들이 장기간 그녀들의 공경을 받게 됐다. 비빈들의 이름표가 은반에 놓일 수 있느냐 없느냐는 태감들이 도와줘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로 인해 경사방(敬事房, 황궁의 기구로 내무부에 예속돼 있었다. 황제의 침실 사무를 전담하며 최고 책임자를 ‘경사(敬事(房))태감’이라 불렀다. 그 임무는 황제와 황후, 비빈의 성교를 안배하고 기록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른바 “전문적으로 황제의 교구(交媾, 성교)의 일을 전담하는 자”다)의 태감은 그런 여성들에게 손쓸 기회가 많을 수밖에.

 

물론 처녀는 함부로 다룰 수 없었다. 그런데 일단 황제와 사랑을 나눈 후 비빈들은 성에 눈을 뜨게 되니 성에 대한 흥미가 짙어질 것은 뻔했다. 그녀들이 욕념이 왕성하게 될 때 찬 밥 더운 밥 가릴 여유도 없이 태감을 선택하게 됐을 것이고.

 

분명한 것은 태감은 원래 남자다. 젊은 태감이 가까이 할 기회를 자주 얻게 되면 ‘상상(上床)태감’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건 이미 궁중의 공개된 비밀로 통했다. 그렇게 태감들은 자연스레 그런 것에 재미를 붙여 피로한 줄 모르게 되면서 그들에게 취처법이 정해지게 됐다고 본다.

 

그래서 일본 학자는 태감 취처의 문제를 연구했는데 “고독을 벗어나려는 심리”에서 비롯돼 태감들이 취처하게 됐다고 했다. 데라오 요시오(사미선웅寺尾善雄)는 태감을 연구한 역작 『환관물어宦官物語』에서 “태감이 여자와 가정을 이룬 중요한 이유는 고독을 벗어나려는 심리에 있었다. 그들은 세간에서 무시를 받았고 멸시 당했다. 그래서 처자의 따스함을 얻기를 바란 것은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태감의 처는 대부분 궁중의 여관(女官)이었다. 궁정 생활은 세상과 단절돼있기 때문에 궁내 여관만이 태감과 짝을 이룰 수 있었다. 그렇게 서로 의지했던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태감은 이미 거세됐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는 것은 당연했다. 비정상적인 신체는 변태적이라 할 정도로 비정상적인 심리를 가져오게 된다. 그들의 성격도 정상적인 관점으로 파악할 수 없다. 그들은 남성적이 흥미와 능력은 잃었지만 그렇다고 여성도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은 비틀리게 되고 그들의 마음도 의지할 곳을 잃게 돼 버린다.

 

그렇게 그들의 성격은 비정상적이었다. 그들은 아무 까닭도 없이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조그마한 일로 격하게 화를 내기도 했다. 화를 냈다가도 갑자기 노기가 사라지기도 하고. 그렇게 슬픔과 기쁨, 화냄이 정상적이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보다 강한 사람들을 보면 개가 꼬리를 흔들 듯 아첨하며 환심을 샀다.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듯이 비굴할 정도로 영합해 자신의 열등감과 연약함을 표현했다.

 

변태적인 성격은 사람들과 함께 모이거나 팀을 구성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어린이나 여성에게 애정을 표현하기도 하고 키우고 있는 개를 변태적으로 사랑하기도 했다. 고독했고 실의했다. 그들의 영혼은 공허했다. 그래서 그들은 취처해 자신들이 처한 고독에서 빠져 나오려고 했던 것으로 풀이한다.

 

 

다른 관점도 있다. 의학적, 생리학적 각도에서 출발해 태감이 취처한 것은 거세가 철저하게 이루어졌는가 여부에 따른 성적인 이유에서 기인했다고 보기도 한다.

 

청대(淸代) 태감 소덕장(小德張)은 어릴 적에 거세한 내시였다. 그런데 그는 사춘기가 되자 여성에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몇 명의 처를 거느리기도 했다. 이 일로 사람들은 거세를 했지만 철저하지 못해 남성적 흥미가 되살아났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중국의 의학박사 겸 문사가인 진존망(陳存亡)은 오랫동안 태감 문제를 연구했다. 그는 태감이 거세가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음경이 되살아나고 성욕이 생긴 것이라 생각했다.

 

궁정의 어린 태감은 3년마다 조사하고 5년마다 재검해 볼록하게 나온 신체 부위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게 궁정의 규칙이었다. 그러나 궁정의 일을 상식대로 이치대로 간단하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귀비가 젊은 태감에게 호감을 느꼈다면, 검사하는 태감에게 “그냥 됐어요”라고 한 마디만 하면, 그 태감은 검사를 받지 않아도 됐다. 그 태감이 신체에 돌출한 부위가 생겼고 자연스레 발달해 정상적인 음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 다른 경우도 있다. 다른 뜻을 가진 집안에서 자기 아들을 나중에 궁에 들여보내 태감이 되게 하기 위해 준비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아이가 강보에 싸여 있을 때부터 특별한 식모를 고용해 교묘한 수술을 받게 한 후 아이의 하체를 배배 꼬아 영아의 생식기를 움츠러들게 만들어 천연적인 기능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 아동 태감은 어린 태자나 공주와 같이 장난치며 자라게 되고, 그러다가 발육기가 되면 자연스레 성기능을 회복하게 되기도 했다. 그들과 어린 태자 사이가 친밀하게 되면 궁중의 검사 태감도 감히 그들을 자세히 검사할 수 없게 됐었다.

 

이런 자연스런 상황 이외에 인위적인 상황도 존재했다. 태감을 거세하는 과정에서 나이 많은 태감들은 발육이 덜 이루어진 어린 아이를 데리고 와 엄방(閹房)에서 수술했다.

 

그런 상황에서 수술을 담당한 사람이 뇌물을 받으면 새로 들어온 태감을 거세할 때 철저히 하지 않고 부분 음경을 남겨 두게 만든다. 그렇게 새로 생겨날 희망이 있게 되는 것이다. 또 입궁하는 과정에서 검사도 뇌물을 받고는 대충하면 됐던 것이고.

 

의학적 관점에서 보면 발육의 채 되지 않고 거세를 깨끗하게 하지 않았다면 인체의 강력한 발육능력에 의해 음경을 되살릴 수 있다고 한다.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상황은 이렇게 생긴 것이다. 즉 태감은 이미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한 태감이 아닌 것이다.

 

잘생기고 귀여운 태감이 있어 궁궐 심처에 귀비를 시봉하도록 파견됐다면 오래지 않아 애정이 생길 가능성이 많다. 귀비는 심처에서 독수공방하면서 오랫동안 원망만 쌓였을 것이다. 태감도 어쨌든 남성이기에, 그것도 잘생기고 젊은 태감이니, 침대로 끌고 가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껴안고 하룻밤을 지새웠다면 외로움에 떨던 귀비에게는 상당한 정감을 느꼈을 것이고. 그렇다면 완전한 태감이 아니었다면 더더욱 바라던 바가 아닐까.

 

무슨 말인고 하면 철저하게 거세되지 않은 태감을 귀비는 더 원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완전하지 않은 태감이 양산될 수 있는 여지가 생겼을 것이고, 이런 관점은 그냥 추측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명대(明代) 필기 『조립잡조棗林雜俎』에 위충현(魏忠賢)의 “옥경(玉莖)이 다시 살아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생리학적 각도에서 보면 ‘유전자’ 활동에 의한 것이라는 관점과 관련이 있다.

 

이런 관점은 1988년 외국 의학계를 뒤흔든 사건과 유사하다. 어린 남자아이가 사고로 음경을 잃게 되자 여성으로 성전환을 시켰다. 나중에 성장하니 남성을 가까이 하지 않고 여성만을 찾았다. 즉 여전히 ‘남자’였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그렇다면 수술은 실패한 것이고.

 

다른 각도도 있다. 천성적인 기형인 ‘음양인(陰陽人)’도 있다. 체내에 남녀의 두 생식기관을 갖게 되는 경우다. 외면적으로는 남성(혹 여성)처럼 보이나 실제의 생식기관은 여성(혹 남성)인 것, 다만 결함이나 기형일 따름이다. 이러한 경우 의학적으로 수술을 하면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정상적인 남성을 인위적으로 완전하게 여성화시킨다는 것은 현대 의학으로는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개인의 성별은 단순히 생식기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성의 진정한 중심은 ‘시상하부’에 있다. 사춘기가 되면 시상하부에 의해 인체 내에 이미 정해진 성별(남, 녀)로 발전하도록 촉진한다고 한다. 즉 유전자가 추동해야 인체에 성별이 생긴다는 말이다. 유전자는 난자가 수정할 그 찰나에 결정된다고 하고.

 

 

이런 생리학적인 요인은 태감 취처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제시하기도 한다. 태감은 남성 생식기관을 잃었지만 여전히 남자인 상태로, 사춘기가 되면 여성에게 접근하려는 욕구가 자연스레 생기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학자 공헌장(孔憲璋) 등은 유전자의 추동이야말로 태감이 취처한 근본적인 이유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렇듯 태감이 취처한 문제에 대한 관점은 나름대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자신들만의 이유가 있고 자신들의 설을 그럴듯하게 합리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태감이 취처한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한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한쪽 방면으로만 해석해서는 결론을 도출하기 어렵지 않나 싶다. 이러한 문제는 역사, 환경, 심리, 의학 등 관련 과학들이 어우러져 심도 있게 연구해야 진정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태감의 존재다. 황제만을 위해 인간을 도구로 만들어 인간답지 않게 살아가야 했던 태감, 그들을 이천여 년 넘게 역사적으로 존재케 했던 전제주의를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아직도 뿌리 깊게 뻗어있는 동양의 봉건적 사고, 황제 중심의 전제주의와는 다른 의미라 해야 할까? 우리 몸속에 남아 있는 고쳐야 할 동양적 사고는…….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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