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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86)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역대인명사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연영(李蓮英), 청나라 순천(順天) 대성(大城) 사람이다. 원명은 영태(英泰)인데 나중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자는 낙원(樂元)이고 호는 영걸(靈杰)이며 작호(綽號)는 피초리(皮硝李)다. 소리자(小李子)로도 불린다.

 

아홉 살 때 입궁해 태감이 됐고 영합을 잘해 자희(慈禧)태후(서태후)의 총애를 받아 내정(內廷)총관에 발탁돼 이품정대(二品頂戴)를 하사받았다. 궁정에 50여 년 동안 있으면서 권력을 농단하고 조정 일에 참여했다.

 

유신파(維新派)를 모함했고 매관매직으로 뇌물을 받아먹은 등 당대 최고의 권감(權監)이었다. 광서(光緖)34년(1908) 자희태후가 죽은 뒤 궁밖에 나가 있다가 얼마 뒤 죽었다.

 

자희(慈禧)태후 곁을 지키던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총신(寵臣)은 태감 이연영(李蓮英)일 것이다. 그는 동치(同治), 광서(光緖) 2대에 걸쳐 태감대총관(大總管) 자리에 있었다.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 심지어 후궁 총비들도 그를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관련한 민간 전설이 많다. 그가 비명횡사했다는 사람도 있지만 역사 기록에는 찾아볼 수 없다.

 

이연영의 시체가 어디에 묻혔는지 사람들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북경 영정문(永定門) 밖 대홍문(大紅門)이라거나 청(淸) 동릉 자희(慈禧) 능묘의 곁이라거나 북경 해정(海淀) 등지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도대체 어디에 묻혔는지 그가 죽고 50여 년이 흘렀어도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1966년 북경시 해정구(海淀區) 은제장(恩濟莊) 61학교 중학부 교사 조광지(趙廣志)가 ‘추악한 사람’이라는 비평을 받고 그 학교 교장, 서기와 함께 노동개혁대에 가입해 감독을 받으면서 61학교 내에 있는 이연영의 묘를 파헤치라는 강요를 받았다.

 

조광지와 한 무리의 사람들이 힘을 다해 묘를 팠다. 놀라운 것은 분명한 이연영의 묘였다는 점이다. 묘에서 이연영의 머리와 많은 부장품 이외에 다른 유골은 없었다. 이는 분명 이연영이 죽을 때 몸과 머리가 분리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이연영은 어떻게 죽었을까? 『청패류초淸稗類抄․엄사류閹寺類』의 기록을 보면 이연영은 “효흠후孝欽后(자희태후)가 죽은 뒤 뜻밖에도 융유후(隆裕后)의 비호를 받았다.” “병으로 죽었다.” 그러자 융유후는 “특별히 은 2천 량을 상으로 내렸다”고 돼 있다.

 

이연영의 후손의 말에서 더 명확해진다. “우리 조부는 천수를 다했다. 향년 64세였다.” 그리고 “우리 조부는 급성 이질(痢疾)이 걸렸는데 치료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병으로 죽었다. 병을 얻고 4일 후에 세상을 떴다”고도 했다. 이연영의 생애를 기록한 『이연영묘장墓葬비문』에 이연영이 “은퇴했을 때는 이미 노쇠해 있었다. 공은 선통(宣統)3년 2월 초4일에 운명하셨다”고 돼 있다.

 

이연영은 “선통 연간에 병사하였다”는 설이 널리 퍼져있어 의문을 갖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연영의 묘에서 유골이 나온 후로는 비명횡사했다는 설을 논박할 수 없게 됐다.

 

동순(佟洵)은 『근대경화사적近代京華史迹』에서 이연영에 대해 기술했다. 그 서술에 따르면 이연영은 노쇠해 죽기는 했으나 남몰래 머리가 잘렸기 때문에 아무 탈 없이 죽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이 글의 근거는 북경 61학교에서 발굴된 묘장품(墓葬品)이었다. 동순은 조광지 등이 파헤치기 이전 이연영 묘는 석장, 석문, 담장 등 어느 것 하나 손상되지 않고 완전히 보존돼 있었다고 했다. 도굴된 흔적이 없었던 것이다.

 

조광지의 말에 따르면 이연영의 관을 열었을 때 “‘한 사람’이 이불에 싸여 그곳에 누워있었다. 이불은 주름 없이 쫙 펴져 이어 사람이 손을 댄 흔적이 전혀 없었다.” 이 말 중의 ‘한 사람’은 완전한 유골이 아니라 의복으로 염하여 입관한 ‘사람 모양’이었다.

 

그것 이외에 당시 조광지 등은 이연영의 묘에서 금강석 모자, 꽃문양 금강석 가락지, 진관주(鎭棺珠) 등 50여 개의 보물을 출토했다. 이러한 상황은 이연영의 묘는 그때까지 도굴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연영의 묘에는 머리만 묻힌 것이 된다.

 

동순은 또 이연영이 1911년에 매장돼 1966년에 발굴될 때까지 55년이나 흘렀는데 머리는 아무런 손상이 없이 보존되고 다른 유골은 썩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됐다고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즉 시체가 썩은 상태를 보더라도 머리만 묻힌 것이 확실하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자 이연영의 사인에 대해 사람들이 주목하게 됐다. 관방의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고 민간에서는 이연영이 목이 잘린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이연영의 셋째 동생 이보태(李寶泰)의 묘를 지키던 하(何) 씨 후손은 “이연영은 천수를 다하지 못했다.” “이연영은 하북(河北)과 산동(山東)의 경계 지점에서 암살당했다”고 얘기했다는 이야기도 은제장 일대에 퍼져 있었다. 그리고 “이연영은 빚 독촉 때문에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이러한 설은 이연영의 사인에 대한 분명한 증거는 될 수 없지만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연영의 후손의 말에 의하면 이연영은 생전에 “재물이 많으면 재앙도 크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그가 생전에 상서롭지 못한 예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말이다. 자신의 막대한 재화가 화를 불러올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을 가능성이 많다.

 

『청조야사대관』의 기록을 보면 이연영이 죽은 후 “여러 엄관들이 그가 재물이 많은 것을 알고 탈취할 생각을 가졌다. 각자 심복을 보내 조사토록 했다. 새성원적과 각 은행에 보관하고 있는 것 외에 궁내에 보관하는 것은 현금 300여 만이나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서로 나누자고 공모한 후 분배할 양에 대해 싸움이 벌어졌다. 소덕장(小德張)은 상처를 입어 융유태후에게 상주하니 내무부 대신들에게 조사하도록 했다”고 돼 있다. 이는 이연영 사후 여러 태감들이 그의 재산을 놓고 다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연영은 생전에 한없는 재물을 모았다. 억만이나 되는 재산을 모았다. 그 재화의 출처는 더럽기 짝이 없었다. 거기에다 자희태후와 어울려 못된 짓을 일삼았다. 원수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자희가 죽자 의지할 후원자를 잃었으니 오래지 않아 암살을 당할 수밖에.

 

그의 조카는 그가 암살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머리밖에 거둘 수 없었다. 흉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조사할 방법도 없었다. 그의 명성을 생각하니 그저 그의 머리만 염을 하고 매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여 『이연영모장비문』에서조차 그의 죽음에 대한 말을 모호하게 만들어 이연영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안의민(顔儀民)은 「이연영신수이처지미李蓮英身首異處之謎」에서 마음속 깊이 숨겨 뒀던 60여 년의 실마리를 밝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희태후가 죽자 이연영은 출궁했다고 한다. 황제가 하사한 북장가(北長街) 주택에서 호국사(護國寺) 면화(棉花) 골목의 주택으로 이사한 후 방문객을 모두 사절하고 두문불출했다.

 

이때 선통 황제가 등극하고 광서(光緖) 황제의 융유태후가 수렴청정 했다. 소덕장이 태후에게 상소를 올려 청 황궁의 내무부에 명해 이연영을 조사토록 했다. 이연영은 그 소식을 듣고는 놀라고 겁이 나 벌벌 떨면서 급히 집사를 비밀리에 상장군 강조종(江朝宗)의 저택으로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강조종은 청나라 말기 최고 실력자 원세개(袁世凱)의 측근이었다. 자희태후가 죽기 전 이연영과 강조종은 서로 이용하는 상대라 친분이 있었다. 긴박한 상황에서 이연영은 자기의 재산을 강조종에게 끝도 없이 보냈다.

 

과연 돈이란 귀신도 부릴 수 있는 것이었다. 강조종은 소덕장을 부른 후 융유태후에게 이연영을 관대하게 봐주라고 전하라 했다. 원세개의 권력이 강대했던 까닭에 융유태후는 어쩔 수 없이 이연영에 대한 조사를 늦추도록 할 수밖에.

 

소덕장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서는 이연영과 맞서기 위해 자신의 보물들을 강조종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강조종이 어찌 오는 사람이나 재물을 마다하겠는가. 그가 비교해 보니 이연영보다 소덕장이 젊고 힘이 있었다. 그리고 융유태후의 측근이 아니던가. 그래서 강조종은 소덕장과 친분을 쌓는 것을 좋아했다.

 

 

이외에 안의민은 강조종이 이연영과 소덕장에 대한 사실들을 털어놓은 이야기들을 서술하기는 했지만 끝내 이연영이 피살당한 이유와 경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한 번은 강조종의 아들 강보창(江寶倉)이 “소덕장은 이연영의 철천지원수였다. 하루는 어르신(강조종)이 이연영에게 십찰해(什刹海) 회현당(會賢堂)에서 저녁을 같이 하자는 초정장을 보냈다. 이제까지 외출을 전혀 하지 않던 이연영은 시간에 맞춰 회현당에 나타났다. 그는 어르신에게 자신의 집안을 구해줘서 고맙다고 전했다. 식사가 끝난 후 이연영이 후해(后海)를 지날 때 토비(土匪)에 의해 암살당했다. 여러 곳을 뒤졌으나 후해의 기슭에서 이연영의 머리만 발견됐다”고 토로했다.

 

이외에 강보창은 이연영 사후의 상황도 얘기했다고 한다. 자기 부친과 관련된 사항은 제외하고. 작가는 “이연영이 죽음이 강조종과 소덕장이 소행이라고 독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강조종, 소덕장이 내막을 잘 알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했다.

 

지금 사람들은 이연영이 유골이 완전하지 않고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차치하고 그의 몸과 머리가 분리된 결과는 결국 호랑이를 위해 창귀(倀鬼)가 돼 나쁜 짓을 일삼은 응보이리라. 앞잡이가 돼 나쁜 짓을 저지른 이들의 후손들은 떵떵거리며 사는 곳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데 지하에서는 잘 지낼 수 있을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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