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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바람과 말의 침입을 막기 위한 제주 돌담 ... 밭담, 울담, 산담, 올레담

지질로 말하면 이 섬은 전체로 원래 화산(火山)이엿든 관계상 전도(全島) 지하에 용암(熔岩)이 첩적(疊積)되여 잇을 뿐 아니라 전면적으로 돌밭을 일우고 잇다고 하여 과언이 아니다. 제주에는 삼다(三多)또는 사다(四多)라는 말이 잇다[석다(石多), 풍다(風多), 마다(馬多), 여다(女多)] 해안지대(海岸地帶)고 초생지대(草生地帶)고 할 것 없이 돌담은 이곳의 명물(名物)이다.

 

인적(人跡)이 간곳, 돌담 없는 곳은 없나니 우리 육지인의 안목으로서는 이것은 자기의 집, 자기의 밭(田) 자기의 평원(平原)을 둘러 싸어 노은 한 개의 사유를 표시하는 경계선(境界線)으로만 보여 지는 것이다.

 

예로부터 제주도의 명물인 돌담은 단순히 사유를 표시하는 경계의 의미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바람을 막고, 가축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은‘경지(耕地)’를 개간(開墾)할 평원(平原)을 방목(放牧)에 이용하고 교통로(交通路)를 만들기 위하야서 전면적으로 널여 잇는 돌덩이를 모아서 싸어 노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은 역시 이곳의 삼다(三多)를 형성하는 바람(風)과 말(馬)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다(동아일보, 1935. 10. 02).

 

 

제주도 전역에서 볼 수 있는 돌담의 경관, 밭 가운데에 용암(溶暗)의 현무암(玄武岩)을 쌓아 올린 돌담은 연중 방목되는 가축의 피해를 막기 위한 울타리로서, 방풍용(防風用)이기도 하다. 그 높이가 2m 이상 되는 것에는 바람의 저항을 적게 하기 위한 틈이 있어 제주도만의 독특한 기술이 엿보인다(마스다 이치지, 1934).

 

제주도의 돌담은 큰 돌 사이에 틈을 만들어 바람이 지나갈 수 있도록 하는 삶의 지혜를 고스란히 보여 준다. 그래서 제주도 돌담은 웬만한 태풍에도 끄떡없다.

 

취락안의 돌담은 높이 2-2.5m의 돌담에 둘러 싸여있다. 그것은 집집마다 둘러진 돌담이라고 할 수 도 있지만 가옥을 강풍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마스다 이치지, 1934).

 

 

산지항(山地港)에 상륙하면 제일 처음 인상되는 것은 우선 방언(方言)과 기운차게 발랄(潑剌)한 여인군(女人群)이요. 아울러 굵은 줄을 얽어 맨 지붕출입구도 분명치 안흔 석장(石墻)일 것이다. 제주속담(濟州俗談)에 삼다(三多)란 명물(名物)이 잇으니 여다(女多) 풍다(風多) 석다(石多) 마다(馬多)라 한다. 이 과연 그럴 듯하다. 지붕과 담은 방풍(防風)으로 출입구난 방사(放飼)한 우마출입(牛馬出入)을 금한 관계이다. 지금도 월장월장(越墻越墻)으로 인가(隣家)에 가는 것을 흔히 볼 수 잇다(동아일보, 1935.10.02).

 

 

이러한 삼다(三多)의 삼위일체(三位一體)인 돌담이 경작지(耕作地)나 주택(住宅)의 주위에서 경계선(境界線)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그다지 머지 안흔 옛날의 일이라고 하겟다. 어쨌든 이러한 돌담의 거리가 연장 수만리에 달한다고 하니 얼마나 토박(土薄)하고 바람이 강함을 알 수 잇는 동시에 이러한 자연에 대한 그들의 개척투쟁(開拓斗爭)의 역사가 역력(歷歷)히 보여 진다(동아일보 1937.08.29).

 

석담(石垣)이야기가 낫스니 말이 제주도의 돌담은 유규열도(琉球列島)의 석원도(石垣島)를 가보지 못햇스니 모르지만 타 지방에서 볼 수 업는 일대경관이 안일가 한다. 산지에는 목장의 석담(石垣) 해안지대(海岸地帶)에는 경지(耕地) 가옥(家屋) 주위는 물론이요 분묘(墳墓)의 근처까기도 사오척고(四五尺高 )의 석담(石垣)이 들여 싸혀 잇다.

 

밭에 쌓으면 밭담, 집 울타리는 울담, 산에 쌓으면 산담, 올레길에는 쌓으면 올레담이다. 밭담은 한 줄로 쌓은 담은 ‘외담’, 아랫부분에 작은 돌을 윗부분에 큰 돌을 올려놓은 담이 ‘잡굽담’ 이다. 큰 돌을 아래에 놓거나 반대로 쌓는 잡굽담은 자기 밭과 인접한 다른 밭과의 높낮이 차이 때문에 생길 수 있는 토양 유실을 방지하려는 삶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 사람들은 돌 사이에서 나서 돌을 줏고 돌담을 차코 한 평생 돌과 싸흐다가 맛참내 돌담속의 분묘(墳墓)에서 명목(瞑目)하는 것만 갓다. 안즈나 서나 누으나 께나 눈에 보이는 것은 돌담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돌 사이에서 태어나서 돌을 줍고, 돌담을 차고 한평생 돌과 싸우다 마침내 돌담속의 분묘에서 명목한다. 맞는 말이다.

 

섬을 도는 환상도로(環狀道路) 양측에 연(連)해 싸인 석담(石垣)은 맛치 소만라장성(小萬里長城)의 관(觀)이다. 이 환상도로(環狀道路)에서 자동차를 달리자면 각금 부근(附近) 휴한지(休閑地)에서 불법 월경(越境)한 우마(牛馬)들이 경적에 놀내 갈 바를 모르고 수삼십분 동안이나 소동을 일으키며 석담간차로(石垣簡車路)를 그대로 줄다름질 치는 양(樣)은 이 섬의 돌담으로 발생한 특이경(特異景)일 것이다.

 

 

상록삼림지대(上綠森林地帶)와의 경계(境界)에는 상장성(上場城)이라 칭(稱)하야 부근에 산재(散在)한 화산역(火山礫)을 주서 모아 석담(石垣)을 성(城)처럼 둘러싸고 하부중간지대(下部中間地帶)와의 교계(交界)에도 하장성(下場城)이라 하야 역시 돌담을 둘너 싸고 방목우마(放牧牛馬)의 타 지역의 침입을 방지하던 것은 지금도 상존(尙存)해 잇다(조선일보, 1937. 09. 05).

 

일부 남아있는 상잣성과 하잣성을 복원하여 상잣성길, 혹은 하잣성길 걷기코스를 조성한곳이 도내 몇 군데 있다. 이 잣성길은 과거 제주지역의 목축문화를 대변하는 하나의 문화콘텐츠이기도 하다.

 

 

방목(放牧)의 자유를 엇는 것도 이 석담(石垣)의 덕분이오, 삼림(森林), 경지(耕地), 농작물의 보호도 이를 답이며, 황가옥(況家屋) 주위의 돌담이랴, 이 석담(石垣)은 우마(牛馬)의 침입에만 이용한 것이 아니라 제주도는 위치적 관계로 전조선(全朝鮮)에서 바람이 제일 심한 곳임으로 이 바람을 막는데 더욱 긴요(緊要)한 것이다(조선일보, 1937. 09. 07).

 

 

제주도 흑룡만리 돌담밭은 ‘국가농어업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제주밭담은 2014년 UN 세계중요농업유산에 등재되어 그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제주도 흑룡만리(黑龍萬里)는 2만2000㎞가 넘는 현무암 밭담이 흑룡의 모습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편 서귀포시에서는 제주도 전통 돌담집의 가치를 재인식하여 돌담집 복원을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고마운 일이다.

 

바람도 태풍(颱風)의 통로가 됨으로 폭풍(暴風)이 많다. 물론 연중을 두고 부는 것은 아니다 농절(農節)인 하(夏)-추간(秋間)이 제일 심하다. 제주도에 바람이 심하다는 사실은 동아줄 가튼 굴군 색기로 집응을 챈챈 얼거멘 것을 보와도 알 것이다.

 

만일 제주도에 돌이 이처럼 만치 못햇던 들 자유스러운 방목(放牧)도 평화스러운 촌락(村落)도 발달하지 못해 슬 것이다(조선일보, 1937. 09. 07).

 

얼추 40여 년 전, 처음 우리 감귤 과수원을 조성할 때 일이다. 아버지는 동네 어르신들과 밭담을 쌓았고 나는 ‘골체’에 자갈을 가득 담아 근처 자박으로 옮겨 날랐다.

 

당시만 해도 제주바당은 ‘물반 고기반’이었지만 우리 밭은 자갈이 대부분이고 ‘흙먼지가 많다’ 싶을 정도로 흙은 드물었다. 아무리 주워도 줄지 않아 미워도 했었지만, 사실은 고마운 자갈이다. 자갈 많은 보리밭이 보리가 잘되고, 자갈 많은 감귤과수원 감귤이 더 달고 맛있다.

 

자갈이 많아야 비가 많이 올 때 토양 침수률이 높아 배수가 잘 되는 반면 비가 적게 올 때 자갈이 머금은 수분, 함수량이 많기 때문에 연중 토양 습도를 적절히 유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제주대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고 동국대에서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2011) 학위를 받았다. 제주도 경제특보에 이어 지금은 지역산업육성 및 기업지원 전담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겸임교수로 대학,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등이 있으며『문화콘텐츠기술과 제주관광산업의 융복합화연구』(2010),『제주형 첨단제조업 발굴 및 산업별 육성전략연구』(2013),『제주자원기반 융복합산업화 기획연구』(2011) 등 보고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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