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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87)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증국번(曾國藩, 1811~1872)은 중국 근대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호남(湖南) 쌍봉(雙峰)이라는 외진 시골에서 태어난 서생으로 28세에 입경해 과거를 보고 진사가 됐다.

 

이후 그의 벼슬길은 탄탄대로를 걸었고 군기대신 목창아(穆彰阿)의 유능한 문하생이 됐다. 북경에서 10여 년을 지내면서 한림원 서길사(庶吉士)를 역임한 후 시독, 시강학사, 문연각 직각사(直閣事), 내각학사, 계찰중서과사무(稽察中書科事務), 예부시랑 및 서병부(暑兵府), 공부, 형부, 이부시랑 등의 직을 역임했다. 증국번은 학식이 남달랐고 벼슬길도 순탄했다.

 

증국번이 살았던 연대는 청(淸) 왕조가 건가(乾嘉, 건륭(乾隆)과 가경(嘉慶))성세에서 몰락과 쇠퇴의 길로 접어들면서 내우외환이 겹치고 핍박받는 시대였다.

 

증국번은 모친의 상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마침 태평천국(太平天國)이 호상(湖湘, 호남(湖南) 상강(湘江) 일대) 지역을 휩쓸고 있었다. 청 왕조의 통치는 아슬아슬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증국번은 고향에서 상군(湘軍)을 조직해 태평천국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그에 따라 일등용의후(一等勇毅侯)에 봉해졌다. 청대에 문인이 무후(武侯)에 봉해진 최초의 인물이다. 나중에 양강(兩江)총독, 직례총독을 역임하고 관직이 일품에 이르렀다. 사후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받는다.

 

 

증국번 일생의 공과에 대한 논쟁은 끝이지 않는다. 그는 공자(孔子), 주자(朱子) 이후 유학을 부흥시킨 성현으로 추숭되기도 하고 혁혁한 공훈을 세워 나라의 운을 바꾼 위대한 현인이라거나 청 왕조 함동(咸同, 함풍(咸豊)과 동치(同治))중흥의 제1공신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를 국적(國賊), 원흉, 한간(漢奸), 민족의 죄인, 권력을 남용해 무차별 살육한 ‘증대머리(증체두曾剃頭)’, 이름만 번지르르하고 덕이 없는 ‘위군자(僞君子)’라 욕하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비방과 칭찬이 각각 반반이다.

 

일찍이 증국번이 태평천국을 진압할 때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그 책임을 물어 ‘증대머리’라는 별명을 붙였다. 1870년 ‘천진교안(天津敎案)’(교회의 고아원 경영에 대한 의혹[소아 유괴, 학대]에서 발단했다. 프랑스 영사가 발포해 상인(傷人)한 사건이 방아쇠가 돼 폭발한 것으로 당사자였던 프랑스계 가톨릭교회뿐만 아니라 영ㆍ미계의 교회나 영사관도 불태워져 상인을 포함한 20명의 외국인이 살해됐다. 청조는 동수의 민중 처형을 약속하는 등 굴욕적인 조건으로 해결했으나 열강은 오히려 교안의 발생을 이용해 침략의 발걸음을 재촉했다)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매국노라 욕하기도 한다.

 

신해혁명(辛亥革命) 후 혁명당에 의해 “정법을 처음 열었다”고 매도당하면서 한간이라 배척당했다. 현 중국 건국 후 역사학계에서는 봉건지주 계급을 옹호한 위도사(僞道士), 지주 매판계급의 정신적 우상, 한간, 매국노,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살인을 저지른 망나니 등과 같이 평가하면서 그를 철저히 매도했다.

 

후대에 의문으로 남은 것은 증국번이 태평천국 운동을 평정하는 과정 중 강력한 군대를 대규모로 보유하고 지방 대권을 장악했을 때 청 왕조를 뒤엎고 자신이 통치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느냐이다. 그는 자신이 황제가 되지도 않았고 태평천국 운동이 진압된 후 자발적으로 상군을 해산시키고 동생 증국전(曾國荃)을 강제로 사직케 한 후 귀향시켰다.

 

증국번은 왜 그렇게 했을까? 일반적으로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여긴다. 하나는 그는 뿌리박힌 충군(忠君)사상이 그렇게 만들었다 본다. 그는 만청(晩淸) 이학(理學) 대사 당감(唐鑒)의 영향을 받았다. 군대를 일으킨 목적도 극히 명확하다. 하나는 명교 보위, 둘째는 지주계급 이익 보위, 셋째는 청 왕조 보위였다. 그 개인적 바람은 중흥의 신하로 봉직해 조상과 가문을 빛내는 것이었다.

 

증국번은 중국의 전통 유가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고 공부에 열중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나날을 독서로 업을 삼았다”고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해 불치하문(不恥下問)했고 역사 공부를 했으며 이학을 중시했다.

 

시사고문(詩詞古文)을 두루 섭렵해 여러 방면에 능통했고 높은 학식과 경륜을 지니고 있었다. 여러 가지 서적을 두루 읽고 문헌을 섭렵했기 때문에 정치적인 면에서 자신의 독특한 관점을 가지게 됐다. 통치자는 ‘내성외왕(內聖外王)’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유법사상을 운용해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주이학(程朱理學)을 추숭해 천하 치리(治理) 방법을 제기했다. 관리들을 잘 다스려 청렴결백하게 만들었고 재목을 골라 재능 있는 자를 등용했다. 물질과 재용, 병력과 병법에도 능통했다. 부장 왕개운(王闓運), 증국전 등이 거병을 누차 권했으나 그는 매섭게 거절했다.

 

둘째는 황제를 칭할 조건이 구비되지 않았었다고 본다. 남쪽에는 증국번이 있었고 북쪽에는 성거린천SenggeRinchen(승격림심僧格林沁)이 있었다. 그 둘은 청 왕조가 기대고 있던 팔다리와 같은 유능한 신하였다.

 

커얼친Horqin(과이심科爾沁) 심(沁)친왕 성거린천은 청 왕조의 가장 신임 받는 인물이었다. 강대한 기병 위주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팔기군하고 달라 막강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군대는 중원 하남 요충지에 주둔하면서 동남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증국번이 경거망동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증국번도 명교를 보위하고 충성 보국한다는 기치아래 기병한 것으로 황제를 칭한다면 불충불의하게 되고 대역무도한 인물로 낙인 찍혀 인심을 잃게 될 것은 자명했다.

 

상군(湘軍) 내부를 보면 좌종당(左宗棠) 명의 아래 초군(楚軍), 이홍장(李鴻章) 이름아래 회군(淮軍)이 있었는데, 상군, 초군, 회군은 서로 연관돼 있었으나 상군은 실제 분열돼 있었다.

 

영국이 중심이 된 외국 세력은 청 정부를 유지하는 것으로 결정돼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을 증국번이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증국전 등이 여러 번 청 왕조를 대신해 칭제하자고 했으나 증국번은 끝내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증국번은 중국 전통문화의 영향을 받은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전형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공을 세울 필요가 없고 명예도 자신이 이룰 필요가 없다.” “공을 세운 뒤 물러남에 있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여겼다.

 

그는 옛사람들이 수신하는 사단(四端)이 효과가 있다고 여겼다. “신독(愼獨)하면 마음이 커지고 주경(主敬)하면 몸이 강해지며 구인(求人)하면 사람이 기뻐지며 사성(思誠)하면 귀신이 경복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증국번은 의약도 승무(僧巫)도 신선도 믿지 않았다. 독성(篤誠)하고 기교를 경계하며 도를 닦고 진실 되며 부귀를 쫓지 않았다. “인생에는 궁달(窮達)이 있으니 명(命)을 알면 걱정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들이 그가 청 왕조 중흥의 공신이 된 사상의 기초다. 증국번은 표면적으로 볼 때도 전형적인 지식인이었다. “남다른 용모를 지녔다. 눈은 삼각형으로 졸린 듯 하고 신체는 중키로 중후하게 걸었고 느리게 말했다.”

 

증국번은 칭제할 야심이 없었다. 그저 중흥의 공신이 되고자 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국가 통일을 유지하고 외침을 막는데 중추적인 역할은 한 것은 분명하다.

 

당시 태평천국의 수도 천경(天京, 현 남경(南京))이 함락된 후에도 30여 만 명이 각지에서 준동하고 있었다. 북방의 동서 염군(捻軍)은 서서히 힘을 축적해 거점 마련에 주력하고 있었다. 국내 동란은 빈번하고 외국 열강들은 중국을 동요시키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내우외환이 겹겹인 상황에서 증국번이 기회를 틈타 칭제했다면 전란이 다시 일어날 게 분명하고 통일 중국의 앞날이나 운명도 어려움에 봉착하게 됐을 것이다. 백성들은 또 다시 도탄에 빠졌을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증국번은 중국 민족에게 있어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을 터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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