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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왕조의 ‘입’이었던 이홍장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88)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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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4.10  08:5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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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장(李鴻章, 1823-1901), 자는 소전(少荃), 안휘(安徽) 합비(合肥) 사람이다. 이홍장은 염군(捻軍, 1851년에서 1868년 사이 황하, 회하(淮河) 유역에서 발발했다. 염당(捻黨)이 변한 농민봉기군의 반청(反淸) 전쟁이다. 환(皖), 예(豫), 노(魯), 소(蘇), 악(鄂) 접경지역에서 독립된 대오를 형성하다가 나중에 연합했다)과 태평천국 군대를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강소(江蘇)순무, 양강(兩江)총독을 역임했다. 양무운동(洋務運動, 19세기 후반 청나라에서 일어난 중국 근대화 운동)의 제창자 중 한 사람이다.

1870년 이홍장은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을 역임하게 돼 청 정부의 군사, 외교와 경제의 대권을 장악했다. 이홍장은 국내적으로는 진보적이고 애국적인 군중 운동에 대해 피비린내 나는 진압을 서슴지 않았고 대외적으로는 타협하고 양보해 『마관조약馬關條約』, 『중아조약中俄條約』, 『신축조약辛丑條約』 등 치욕적인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 이홍장은 중국 군대사상 반동 및 매국 세력의 전형적인 대표로 평가받는다. 저서로 『이문충공전집李文忠公全集』이 있다.

이홍장은 증국번(曾國藩), 장지동(張之洞), 좌종당(左宗棠)과 더불어 ‘중흥사대명신中興四大名臣’으로 일컬어진다. 그런데 이홍장은 청 정부의 중요한 권신이면서 어째서 영토를 할양해 배상하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을까?

   
 

이홍장이 처한 만청(晩淸) 시기는 내우회환이 겹쳐 왕조가 추락하고 있던 때였다. 정치 위기를 구하기 위해 조정은 각 성에서 단련(團練)을 조직해 태평천국 군대를 진압하도록 지령했다. 지주계급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이홍장은 적극적으로 지주 단련을 조직하고 무장해 회군(淮軍)을 결성했다. 그리고 농민봉기군을 미친 듯이 진압했다.

이홍장은 상해에서 영국과 프랑스 군관을 고용해 서양의 총포를 구매한 후 회군을 무장시키고 훈련해 태평천국 혁명군대를 철저히 진압하는 무장 세력으로 육성했다.

1865년 회군은 6,7만 명으로 확충해 염군(捻軍)을 진압하는 주력이 됐다. 이홍장은 농민봉기를 진압하는데 “공로가 탁월해” 청 조정의 총애를 받아 강소무순, 양강총독으로 승진했다.

이홍장은 농민 혁명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외국 무장 세력과 ‘깊은 우의’를 맺는다. 악명이 높은 ‘양창대洋槍隊’(상승군(常勝軍), 에버 빅토리어스 아미(Ever Victorious Army), 19세기 후반 창설된 서양식 중국군대의 명칭. 청 왕조는 태평천국군의 반란에 대비해 상승군을 창설했다)가 그것이다.

상승군이란 1860년 상해(上海)가 태평천국 군대에게 위협받게 되자 상해의 거상 양방(楊坊)이 상인들로부터 자금을 염출해 미국인 선원 F.T.워드에게 양창대(洋槍隊, 서양식 소총부대)를 조직하게 한 데에서 비롯됐다.

나중에는 외국인을 지휘관으로 하고 수천 명의 유민(遊民)을 모집하고 훈련해 1862년 상해 방위전에서 성과를 거뒀다. 태평군을 거듭 패퇴시켰기 때문에 상승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형식적으로는 청조군(淸朝軍)의 일부로서 공인을 받았으나 영국·프랑스가 태평군에 대해 무력간섭을 시작하자 상승군은 이홍장(李鴻章)의 회군(淮軍)과 공동으로 각지에서 태평군을 격파했다.

1863년 영국인 현역장교인 고든(Gordon) 소령이 지휘관이 돼 강남의 각 성을 탈환하고, 상승군은 영국의 중국진출 정책의 도구가 됐다. 1864년 상주(常州)를 탈환한 뒤 해산됐다.

결국 그들은 이홍장과 결탁해 태평군 장병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함으로써 중국 인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다. 이홍장은 외국인과 왕래하는 과정에서 서양인을 숭배하는 태도를 가졌다.

외국인들은 선진적이고 강대해 맞설 수 없다고 여겼다. 외국인과는 타협하고 양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그들의 힘을 빌려 중국 인민들의 반항 운동을 철저히 진압했다.

당시 청 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자희(慈禧)태후(서태후)는 국내 봉기에 대해 적극적이면서 무자비한 진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외적으로는 굴복 외교를 해 혼자 권력을 쥐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태후라는 보좌를 유지하려 했다.

권신 이홍장은 그 비밀을 꿰뚫고 있었다. 농민봉기가 성공한다는 것은 청 왕조의 통치를 뒤엎는 일이었다. 정권이 전복되면 황친 귀척, 만조 문무는 모두 죄수가 될 것이고 목숨을 보전하기조차 힘들 것은 분명했다.

외국인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중국을 공격하는 목적은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노리는 것으로 영토를 할양해 배상하면 되기 때문에 강화만하면 됐다. 그러한 손실은 백성들이 감당하면 될 일이고. 청 왕조는 자신들의 통치를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니던가. 그래서 이홍장은 충실하게 자희태후의 자구 정책을 집행하면서 자희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했다. 마침내 대청제국이 대외 강화를 책임지는 전권 대표가 된다.

   
 

1884년 중국․프랑스 전쟁이 시작된다. 프랑스 군대는 복건(福建) 수군 군함 7척을 침몰시키고 변경 요충지 진남관(鎭南關)을 점령했다. 노장 풍자재(馮子材)는 중국 군민을 지휘해 진남관에서 프랑스 군 1000여 명을 전멸시키고 승기를 틈타 월남(越南) 양산(諒山)까지 추격해 프랑스 군을 대패시켰다.

중국이 거듭 승리를 거두면서 사기가 충천했을 때 이홍장은 오히려 자희태후에게 “승세를 탔을 때 거두어 그 틈에 강화를 해야 프랑스 군대가 증병하지 않을 것입니다. 강화할 좋은 기회입니다”라고 상소를 올렸다.

그래서 중국과 프랑스는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맺었다. 월남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삼는 것을 승인하고 프랑스가 운남(雲南), 광서(廣西)에서 무역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세금을 감면해 줬으며 중국이 철로를 건설할 때 반드시 프랑스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것으로. 중국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음에도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던 것이다. 전국이 동요했다.

1894년에 중일 갑오전쟁(甲午戰爭)이 발발한다. 해군 제독 정여창(丁汝昌)이 북양함대를 이끌고 여순(旅順)으로 귀항할 때 일본 군함의 습격을 받았다. 중국 해군은 피어린 싸움을 시작했다.

기함 ‘정원(定遠)’호가 타격을 받은 후 ‘치원(致遠)’호 관대(管帶) 정세창(鄭世昌)이 북양함대를 지휘하는 중임을 맡았다. ‘치원’호는 일본 기함 ‘요시노(吉野)’호를 명중시킨 후 놓치지 않고 바싹 쫓아가다 어뢰를 맞아 침몰했다. ‘양위(揚威)’호는 방백겸(方伯謙)의 ‘제원(濟遠)’호와 충돌한 후 일본 함대에 격침됐다. 황해 해전으로 북양함대는 심한 타격을 받았지만 주력군은 남아있었다.

이홍장은 북양함대의 크고 작은 전함 16척, 어뢰정 13척을 위해(威海) 위군항(衛軍港)에서 출정하지 말고 대기하라 명령했다. 이른바 ‘피전자보(避戰自保)’(전투를 피해 스스로 보호한다)가 그것이다.

일본군은 25척의 군함, 2만여 명을 출동시켜 성산각(成山角)을 통해 상륙한 후 위해 위포대(衛炮臺)를 습격함으로써 북양함대의 출항을 봉쇄했다. 중국 수군은 유공도(劉公島)에 묶이면서 전멸 당한다. 제독 정여창, 관대 유보섬(劉步蟾)은 자살했다. 그렇게 이홍장의 소극적인 피전 전략은 북양함대의 전멸로 막을 내렸다.

이홍장은 강화를 맺기 위해 급히 일본으로 건너가 마관(馬關, 시모노세키)에서 담판을 벌였다. 일본 수상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가 한 발짝 한 발짝 들이대며 바짝 압박을 가하자 이홍장은 일본의 위협 속에서 양보하고 타협했다.

너무 가혹하다 싶은 『마관(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했다. 요동반도, 대만, 팽호(澎湖)열도를 할양하고 2억 량을 배상하며 사시(沙市), 중경(重慶) 등 4개의 개항장을 개방해 일본인들이 자유로이 공장을 세울 수 있도록 했다.

이홍장의 노비처럼 굴종하며 치욕적인 강화를 맺음으로써 열강들이 중국을 삼키려는 야심을 부풀려 놓았다. 중국은 반식민지의 와중으로 빠져들어 갔다.

1901년 이홍장은 또 청 정부를 대표해 8국 연합군 총사령관 발데제(Waldersee, 와덕서瓦德西) 및 11국 공사와 아편전쟁 이래 가장 불평등한 조약인 『신축辛丑조약』을 맺는다.

전쟁 배상액 4억 5000만 량, 북경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의 12성진(城鎭)에 외국 군대가 주둔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동교민항(東交民巷)을 대사관 지구로 설정했다.

개인의 권익을 위해 이홍장과 자희태후는 이렇게 외국인의 앞잡이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국가와 민족을 돌보지 않고 조상들에게 부끄러운 조약을 체결하고 자손들에게 망국의 치욕을 가져다준 강화를 아무 스스럼없이 진행했다.

   
 

이홍장이 서양인들에게 노예와 같은 치욕적인 조약을 맺은 이유는 외국의 지원을 받아 그의 ‘양무(洋務)’를 창건해 ‘서양 돈’을 벌려는 데 있었다.

   
▲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이홍장이 외국인들에게 양보를 하자 외국인들은 만족해하며 그가 관리가 되고 돈을 벌 수 있도록 만들었다. 침략자의 도움 아래 이홍장은 강남제조총국, 금릉제조국 등을 창건했고 윤선초상국, 개평매광, 상해기계직포국, 천진전보국 등 민간 기업을 세웠다.

그럼으로써 이홍장은 군사, 경제 방면에 대대적으로 세력을 확대할 수 있어 최고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됐다.

이홍장은 굴욕적인 외교를 맺으면서 중국인들에게 욕지거리를 당하다 마침내 ‘매국노’라는 욕을 먹고 분을 참지 못해 죽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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