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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90)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장작림(張作霖, 1873~1928), 요녕성(遼寧省) 사람이다. 마적단 출신으로 러일전쟁 때 장경혜(張景惠) 등과 함께 일본군의 별동대로 비밀리에 활약했고 그 후 동삼성(東三省) 총독의 지배하에 들어가 순방(巡防)대장이 됐다. 중화민국 수립 후 봉천(奉天, 현 심양瀋陽)에 들어가 1919년경 봉천 독군(督軍) 겸 성장(省長)으로 동북의 실권을 장악했다.

 

1920년 화북에서 직례파(直隷派)와 안휘파(安徽派)의 군벌전쟁에서 직례파를 지지하고 중앙정계로 진출해 열하(熱河), 차하르(察哈爾) 등을 세력범위에 넣은 뒤 직례파의 오패부(吳佩孚)와 화북 쟁탈전을 여러 차례 벌여 강소(江蘇)에까지 세력을 뻗쳤다. 한때 형세가 불리하자 북동으로 후퇴한 다음, 1926년 직례파 군벌과 합세해 다시 북경으로 진출, 혁명군의 북벌을 저지했다.

 

1927년 열강의 묵인 하에 북경의 공사관 구역으로 군사를 투입하고 소련 대사관 수사 등 탄압을 가하여 이대교(李大釗) 등 20명을 처형했다. 그 해 6월 대원수라 칭하고 일본을 배경으로 북경정부를 장악했으나 북벌군에게 패배해 북경에서 철수 퇴각하던 중 1928년 6월 그가 탄 열차가 봉천 부근에 이르렀을 때 폭파돼 사망했다.

 

장작림의 세력 확대는 일본 정부의 “심혈을 기울인 육성(育成)”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일본인은 먼저 장작림이 동북(東北) 3성을 완전히 장악하게 도운 후 제2차 직봉전쟁(直奉戰爭, 직례파와 봉천파의 전쟁)을 도발하게 하여 오패부를 패퇴시키고 소(蘇, 강소), 환(皖, 안휘), 호(滬, 상해)를 공격해 점령하게 한다.

 

곽송령(郭松齡)을 사살해 봉천파 내란을 평정시켰다. 장작림은 만몽(滿蒙) 권익을 희생시킨 대가로 일본인의 ‘후애(厚愛)’에 보답했다. 장작림과 일본인 사이에 대단히 ‘유쾌한’ 관계를 맺었었다.

 

그런데 1928년 6월, 일본 관동군(關東軍)은 장작림이 동북으로 철수해 봉천으로 회군할 때 황고둔(皇姑屯)에 화약을 설치하고 장작림을 폭사시킨다. 일본인들은 왜 갑자기 태도를 바꿔 장작림을 악랄한 수법으로 죽게 했을까?

 

장작림은 봉천 해성(海城) 사람으로 빈한한 농가 출신이다. 난세를 살면서 장작림은 녹림(綠林)으로 들어간다. 수십 명을 모집해 단련(團練)을 조직한 후 보험대(保險隊)라 부르며 흑산(黑山) 남쪽 조가묘(趙家廟) 일대에서 약탈을 일삼았다. 1902년 관부로 들어가 재편된 후 신민부(新民府) 유격마대(遊擊馬隊) 관대(管帶)를 맡았으나 토비(土匪) 악습을 버리지 못하고 밖에서 강탈하기 일쑤였다.

 

1917년 무창(武昌)사변 이후 동삼성(東三省) 총독 조이손(趙爾巽)이 ‘봉천 국민 보안회’ 군사부 부부장 겸 중로(中路) 순방 총령으로 임명해 합동으로 혁명군을 공격했다. 장작림은 혁명군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원세개(袁世凱)에게 높은 평가를 받아 중용됐다.

 

장작림은 원세개의 환심을 사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본인과 결탁해 자기의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국가권익을 팔아 일본이 출병하는데 도움주면서 장작림은 북방의 최대 세력을 갖춘 군벌로 성장했다.

 

일본인들이 장작림을 육성한 목적은 동북3성을 멸망시킨 후 중국을 침탈하는데 앞장설 꼭두각시를 만드는데 있었다. 장작림은 일본인들의 끊임없는 요구에 점차 문제가 많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중국내 반일 물결이 용솟음치자 그는 대일 정책을 바꾸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일본인들에게 불만을 품는다. 장작림이 협력할 상대로 미국을 선택하려 하자 이를 알게 된 일본인들은 그를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당초, 장작림 부하 곽송령이 모반해 금주(錦州), 신민(新民) 등지를 점령하자 심양(瀋陽)이 다급해졌다. 그래서 장작림은 일본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남만(南滿), 동몽(東蒙)의 권익을 희생시키며 일본의 출병과 맞바꿔 동북지역 최고의 자리를 공고히 하려 했다. 일본인들은 많은 권익을 얻었지만 그들의 욕심은 끝도 한도 없었다.

 

1927년, 일본 정부는 만몽(滿蒙)에서 여러 특권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면서 답변할 수 없는 조건들을 내세웠다. 이는 장작림을 바꾸거나 무력으로 봉천 군벌을 없애기 위한 전략이었다. 장작림도 일본인들의 진정한 낯짝을 알아차리고 타협하지 않으면서 그와 일본인들 사이에 갈등이 심화됐다.

 

 

1928년 초, 장개석(蔣介石)은 풍옥상(馮玉祥), 염석산(閻錫山), 이종인(李宗仁) 각 노군(路軍)을 통솔해 북상하면서 봉천군을 토벌했다. 봉천군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황하 이북으로 철수했다.

 

하루는 장작림이 마작을 하면서 울적함을 달래고 있었는데 일본 공사 요시자와(방택, 芳澤)가 급히 방문했다. 중일 합작으로 길회(吉會, 당시 만주 길림성 길림시에서 조선 회녕(會寧)을 잇는) 철로 계획을 제의했으나 장작림은 무리한 요구에 응대하지 않았다. 요시자와는 또 일본군이 출병해 북벌군이 황하를 건너지 못하도록 저지하겠다는 정치적 조건도 내세웠다.

 

장작림은 침착하게 “집안일에 이웃이 애쓸 필요는 없는 게지요. 북벌군에 의해 관내(關內)에서 쫓겨난다면 관외의 내 집에서 쉬면될 일”이라고 답했다. 요시자와는 장작림이 동의하지 않자 노기등등해 “봉천군 장종창(張宗昌)의 부하가 제남(濟南)에서 일본 교민을 살해 했소. 당신이 책임을 져야 할 거요!”라고 말했다.

 

장작림은 화를 참지 못하고 ‘퍽’ 탁자를 치자 손에 들고 있던 비취 담뱃대가 두 동강이 났다. 노발대발하며 “아무런 근거도 없는 그런 일을 내가 어찌 조사한단 말이오? 이런 경우가 어찌 있단 말이오! 나는 그런 책임을 질 수 없소! 난 내 이 더러운 몸, 없어지면 없어졌지 자손만대에 손가락질을 받지는 않을 거요”라고 말했다.

 

요시자와는 긴급하게 일본 정부에 장작림의 강경한 태도를 보고했다. 일본인들이 보기에 자신들이 양육한 봉천군벌이 자신들의 사주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분하고 부끄러운 나머지 장작림을 암살하고 일본인들의 말을 듣는 새로운 군벌로 바꾸기로 결정한다.

 

일본 관동군 고급 참모 고모토 다이사쿠(하본대작, 河本大作)는 명을 받아 암살 작전을 계획한다. 고모토는 장작림이 북경에서 기차를 타고 봉천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았다. 장작림의 전용열차를 폭파시킬 계획을 짰다.

 

폭파지점으로 심양 교외 황고둔 부근의 경봉(京奉), 남만(南滿) 철로의 교차점을 선택했다. 폭약의 기폭 스위치는 폭파지점에서 200미터 떨어진 은폐된 곳에 설치했다. 기폭 스위치와 예비용 버튼도 특별히 설치해 확실히 폭발하도록 준비했다.

 

고모토는 또 임시로 돌격대를 조직해 장작림이 폭사하지 않으면 돌격대를 동원해 장작림을 주살할 수 있도록 대비했다. 일본이 일을 꾸몄다는 진상을 은폐하기 위해 고모토는 중국인 아편쟁이 세 명을 찾아내 희생양으로 삼았다. 일본의 암살 작전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됐다. 북경 소식만 기다리면 됐다.

 

일본인들은 장작림의 행방에 촉각을 세웠다. 1928년 6월 3일, 장작림은 심양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기차가 출발하자 일본 특무는 장작림이 탄 객실 번호를 즉각 고모토에게 알렸다. 노선을 따라 일본 특무대는 운행 시간을 상세하게 고모토에게 보고해 폭파에 참고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했다.

 

6월 4일 새벽, 전용열차가 황고둔으로 들어서자 관동군 도쿠(동궁, 東宮) 대위가 기폭 스위치를 눌렀다. 화약이 터지지 않았다. 간다(신전, 神田) 중위가 급히 예비용 버튼을 눌렀다. 거대한 폭발음을 내며 장작림이 타고 있던 객실이 불탔고 장작림은 중상을 입었다.

 

도쿠는 장작림의 죽음이 의심할 여지가 없음을 확인하고 철수를 명했다. 그는 도화선을 없애 흔적을 하나도 남기지 않도록 하고 폭발 현장을 정상적으로 보이게 한 후 조용히 퇴각했다.

 

관동군은 총지휘부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여러 곳에 남방 편의대(便衣隊, 중국에서 무장하지 않고 적지에 잠입해서 후방교란을 주임무로 하던 비정규군 부대로 ‘편의’는 평상복이라는 뜻, 이들은 평상복을 착용하고 각종 모략·선전·파괴·암살·납치·습격 등의 게릴라 전법으로 정규군 작전을 도왔다)가 장 총사관을 암살했다고 퍼뜨렸다.

 

장작림은 중상을 입고 사령부로 실려 간 후 얼마 없어 세상을 뜬다. 일본인들은 긴밀하게 활동하면서 친일파 봉천군벌을 내세우려 했다. 봉천군 원로들은 관동군의 음모임을 간파하고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張學良)을 봉천군 총사령관으로 추대해 동북3성 보안 총사령 직을 맡게 했다.

 

장학량은 일본의 압박을 막아내며 동북 세력의 기치를 바꿔 남경 국민당정부의 지도를 받을 것이라 선포한다. 그렇게 일본이 봉천군을 이용해 만주를 휘어잡으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20세기 80년대, 일본에서 장작림이 황고둔에서 폭사한 편장 사진 30여 장이 발견됐다. 만주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 육군 특무대원이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었다. 그 사진은 장작림의 죽음이 일본 관동군이 철저한 계획에 의해 일어난 정치적 음모였다는 것을 실증하고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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