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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91)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오패부(吳佩孚, 1871~1939), 자는 자옥(子玉), 산동 봉래(蓬萊) 사람으로 북양군벌 직계(直系, 직례파直隷派)의 총수다. 젊었을 때 군대에 들어갔으며 뒤에 보정(保定)의 무비학당(武備學堂)을 졸업하고 원세개(袁世凱) 부하였던 조곤(曹錕)의 휘하로 들어갔다.

 

중국정부 성립 후 벌어졌던 군벌들의 혼전 중에 직례파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920년 일본의 후원을 받은 안휘파(安徽派)의 단기서(段棋瑞)에게 승리를 거두고, 1922년 역시 일본의 영향 하에 있었던 봉천파(奉天派) 장작림(張作霖)에게 승리를 거둔다.

 

뇌물 선거로 조곤을 대총통에 당선시키고 영미(英美)계 군벌인 직례파의 최고 거두가 돼 북경 정계를 지배했다. 1923년 경한선(京漢線)의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자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고(2·7사변), 공산당원 임상겸(林祥謙)을 불태워 죽였다. 이와 같은 잔학성은 군벌들 중 단연 으뜸이었다.

 

1924년 다시 봉천파와 싸웠으나 풍옥상(馮玉祥)의 배반으로 장작림에게 패배하고 하남(河南), 화북으로 후퇴했다. 1926년 북벌군에 패해 사천성(四川省)으로 퇴각했다. 그 뒤로 오랫동안 정계를 떠나 1932년부터는 북경에서 살았다. 중일전쟁 중에 병사했다.

 

청말(淸末) 수재(秀才)다. 젊었을 때 아편을 피우기도 했다. 하루는 아편관에서 부주의로 현지 토호 옹흠생(翁欽生)에게 미움을 사 두들겨 맞았다. 며칠 후 오패부는 떼거리를 데리고 옹흠생의 노모 생일잔치에 뛰어들어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옹흠생이 관부에 고소하자 오패부는 그날 밤을 틈타 도망쳐 회군(淮軍) 섭사성(攝士誠)의 군대에 가입했다. 아편관에서 발생한 사건이 오패부의 인생을 뒤바꿔 놓은 것이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오패부는 동북지방으로 건너가 러시아 군사정보를 캤다. 그 ‘공’을 인정받아 방통(幇統)에 기명된다. 1906년 북양 육군 조곤 부대의 관대(管帶)가 됐고 중임받기 시작한다. 나중에 여단장에 올랐다. 원세개 토벌 운동이 일어나자 오패부는 부대를 따라 사천으로 건너가 채악(蔡鍔)이 이끄는 운남(雲南)호위군을 진압했다.

 

1917년 7월 역군서로(逆軍西路) 토벌에 선봉이 돼 장훈(張勛) 복벽 토벌에 참가했다. 같은 해 손중산(孫中山)이 호법군(護法軍) 정부를 결성했다. 단기서는 조곤, 장회지(張懷芝)에게 군대를 지휘케 하고 남하해 토벌하도록 했는데 오패부는 제3연대 대리연대장 겸 전적총지휘에 임명됐다. 호남 독군 자리에 환계(皖系) 장경요(張敬堯)가 앉게 되자 오패부는 자신은 허명밖에 없다면서 비분강개하며 휴전할 것을 권하는 서신과 통전을 보냈다.

 

오패부는 일반 군인들과는 달리 평소 관우(關羽)와 악비(岳飛) 둘을 숭배했다고 한다. 그는 “득의할 때 청백을 마음에 담고 처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재물을 쌓지도 않을 것이고 음주하고 시를 쓰며 서생의 본모습을 잃지 않을 것이다. 실패하면 끝까지 굴강해 밖으로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계에 들어서지 않을 것이며 옹관을 품고 갑옷을 벗어던져 귀거래 하리라”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1919년 5․4운동이 벌어지자 오패부는 연거푸 통전을 보내 파리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중일밀약을 취소하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북경에서 체포된 학생들을 석방해주시길 대총통에게 올리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본질적으로 ‘애국군인’이었다. 그러나 오패부는 공산당이 이끄는 노동자 농민 운동을 적대시했다. 1927년 경한(京漢)철로 공사 때 노동자들이 파업하자 그는 ‘2․7참안(參案)’(유혈 진압으로 노동자 40여 명이 피살되고 200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60여 명이 체포됐고 1000여 명이 해고됐다)을 일으켰다. 파업하고 있던 노동자 및 공산당원에게 독수를 펼쳐 파업을 주동했던 임상겸을 사살했다.

 

1924년 9월, 제2차 직봉전쟁이 일어나자 오패부는 ‘토역군(討逆軍)총사령’이 돼 출전하나 봉천군과 풍옥상의 국민군에게 패했다. 1925년 10월, 절강(浙江) 독판(督辦) 손전방(孫傳芳)이 봉천군 반대 전쟁을 일으키고 1926년 여름 북벌 전쟁이 일어나자 오패부는 북방에서 전방으로 내려가 독전하지만 악남(鄂南) 정사교(汀泗橋), 하승교(賀勝橋) 전투에서 연전연패했다.

 

10월 북벌군이 무한(武漢)을 점령할 때 오패부 주력군은 전멸 당했다. 그 이후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1927년 5월, 오패부는 잔여부대를 이끌고 사천으로 가 군벌 양삼(楊森), 유존후(劉存厚)에게 의지했다.

 

 

1932년 북경으로 돌아가 8여 년 동안 ‘우공(寓公)’ 생활을 한다. 8년의 세월 속에 오패부는 ‘우공’이 됐지만 다른 사람이 감히 하지 못하는 말을 서슴없이 했고 타인이 간언할 수 없는 것도 스스럼없이 간언했다. 시종일관 숭고한 민족 기상을 유지했다. 장개석이 통전을 보내 그와 남경에서 만나자고 했지만 오패부는 “조수불가여동군鳥獸不可與同群”(새와 짐승과 무리지어 함께 살 수는 없다)이라며 나서지 않았다.

 

왕정위(汪靜衛)가 일본과 협력한 후 세객을 보내 오패부에게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과 ‘북평 정치위원회 위원장’의 직함을 맡아줄 것을 부탁하자 오패부는 매섭게 욕을 하며 “왕정위와 협력하는 놈은 분명 야비하게 될 것이다!”고 하면서 문천상(文天祥)의 『정기가正氣歌』를 꺼내주며 가지고 가 왕정위에게 전하라고 했다.

 

왕정위는 거절당했지만 단념하지 않고 직접 북경의 그의 집으로 찾아가 방문했지만 오패부는 “얘기 나눌 적당한 곳이 없다”는 이유로 만나지 않으니 왕정위는 북경에서 보름을 허비했다.

 

‘9․18사변’ 후 일본은 동북의 만주를 침략하고 동시에 화북5성을 자치지역으로 삼아 중국 침탈 계획을 세운다. 오패부는 일본인이 볼 때 이용하기 좋은 금색으로 두른 간판이었다. 일본 특무대는 거액을 마다않고 ‘오패부 공작’을 진행한다.

 

일본 대본영 특무부장 도이하라 겐지(토비원현이土肥原賢二)는 처음 고위직과 막대한 금액으로 유혹하려 했다. 오패부의 측근 제섭원(齊燮元) 등을 세객으로 삼아 여러 번 찾아갔으나 오패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이하라는 친히 오패부를 만나기를 희망했으나 오패부는 표면적으로만 대답할 뿐이었다. 결국 도이하라를 만난 후 그를 데리고 가 ‘오패부 영당(靈堂)’을 보여줬다. 안에는 관만 안치돼 있고 ‘무위장군 오패부의 영위(靈位)’라는 목패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도이하라는 오패부에게 거절당하자 오패부가 ‘중일강화(中日講和)’를 주장한다는 통전을 위조해 대외에 발송했다. 오패부는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날카롭게 맞서 미국 UPI 통신사의 명의로 “이른바 일본의 중임은 모두 위조된 것이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한다.

 

1939년 1월, 도이하라는 온갖 수를 다 짜내 특무대와 군경이 참가하는 중국과 외국 기자회견장을 마련하고 오패부를 초청했다. 그리고 오패부를 위해 연설 원고를 미리 준비했다.

 

오패부는 기자회견장에 나타나 자신이 연설할 차례가 되자 원고를 물리고 즉흥적으로 연설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산을 나오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꼭두각시는 되지 않을 것이요, 일본은 반드시 산동에서 철군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면서 도이하라의 의도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렸다.

 

 

오패부는 일찍이 ‘만강홍(滿江紅)’이라는 사패로 『등봉래각登蓬萊閣』을 지었다.

 

북쪽으로 만주를 바라보니 발해에 풍랑이 크게 이누나! 길림, 요녕, 흑룡강 인민들이 안락했던 그때를 생각하노라.

 

장백산 앞에 울타리를 쳤고 흑룡강 변에 성곽이 늘어섰어라. 지금에서는 왜구들이 종횡하니 음습한 풍운이 일고. 갑오년에 땅을 할양하고 갑진년에 주권은 땅에 떨어졌나니.

 

산천은 의구한데 어지러이 오랑캐만 날뛰는 구나.

 

어느 때에 명을 받아 정예부대를 이끌고 한바탕 전투를 벌여 옛 강산 회복할까! 그런데 귀거래 하여 영원한 봉래산 유객이 됐으니, 아미타불.

 

(北望滿洲,渤海中风雨大作.想當年,吉江遼人民安樂.長白山前設藩篱,黑龍江畔列城郭.到而今,外寇任縱橫,風雲恶.甲午役,土地削;甲辰役,主權堕.江山如故,夷族错落.何日奉命提銳旅,一戰恢復舊山河.却歸来,永作蓬莱游,念彌陀.)

 

오패부는 또 통전을 보내 부의(傅儀)가 위만(僞滿)의 꼭두각시가 된 것을 성토하기도 했다. 일본이 그를 끌어들이려는 노력에 대해 끝까지 마다하며 일본에게 체면을 구기게 했으니 일본인들의 미움을 샀다.

 

어느 날, 오패부가 치통을 앓자 일본 의사가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이빨을 뽑았다. 오패부는 참을 수 없는 통증을 호소했고 얼굴 반쪽이 부어올라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가 됐다. 독일 의사가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으나 그는 ‘조계(租界)’로 가지 않겠다는 신조를 깨뜨릴 수 없어 조계의 병원에서 치료하는 것을 거부했다.

 

일본 특무와 오패부의 측근이면서 일본과 협력을 하던 제섭원이 일본 치과의사를 데리고 진료하러 왔다. 일본 의사가 수술용 칼을 입속으로 넣으니 오패부는 갑자기 큰소리로 고통을 호소하다 피를 뿌리고 죽었다. 그때가 1939년 12월 4일이다.

 

오패부가 갑자기 죽자 사람들은 그의 사인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일본 치과의사와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어떤 사람들은 제섭원이 일본 특무대와 공모해 오패부를 독살했다고도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오패부가 이빨을 뽑을 때 패혈증에 감염됐거나 독이 신경으로 들어가 치료할 수 없게 돼 죽음에 이르렀다고 하기도 한다.

 

어쨌든 일본 치과의사가 마취도 않고 이빨을 뽑았고 수술 당시 수술용 칼을 입속에 넣자마자 오패부가 소리를 지르며 피를 뿜어내고 죽음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볼 때 일본인과 관련이 전혀 없다고는 못한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오패부. 잘잘못이 무엇이든 비명에 간 것만은 사실이다. 어쩌면 중국 근대를 살아왔던 필부나 영웅이나 모두 오패부와 같은 인생역정을 걸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터. 동아시아의 비극일지니...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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