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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종선 침몰 ... 대포항 조난사건 이어 창천항, 표선지역 참사

 

1912년 조선우선주식회사가 목포-제주간 월 9회, 부산-제주간 월 5회 운항, 대판 기점 부산 경유 제주도 일주 월 2회 운항, 목포 경유 제주도 일주 월 3회 운항의 항로를 개설하면서부터 제주 바닷길이 본격적으로 열렸다.

 

이후 1922년에 제주상선회사가 발족되어 부산-제주 간 항로 개설에 이어 제주-대판 간 직행 항로를 개설했고 이때부터 제주와 일본(대판지역)과의 직교류가 급증했다.

 

1928년에는 고순흠이 기업동맹을 결성하여 1500톤급 순길환호를 대판-제주 항로에 취항시켰고, 같은 해 김문준, 김달준, 문창래 등이 동아통항조합을 결성하여 1200톤급 복목환을 취항시켰다. 복목환은 제주인 스스로 일본에 진출하는 제주인을 돕기 위하여 설립된 것이다. 이에 따라 3개 회사의 무한 경쟁 체제에 돌입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도내에는 이 배들이 정박할 수 있는 규모를 가진 양항(良港)이 없었기 때문에 이 배들이 먼 바다에 정박하면 종선(從船)으로 승객들을 날랐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명사고가 발생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1928년 대포항(大浦港)에서 일어난 조난 사건이다.

 

이십칠일 오후 네시경 전남 제주도 대포(大浦)에서 조선우선회사의 긔선 함경환(咸鏡丸)을 타고 저 사십여 명의 승객이 종선을 타고 긔선으로 향하야 가든 도중에 돌연히 폭풍이 일어나며 적은 종선은 고만 물결에 부듸치어 업더지고 승객 전부가 그대로 바다 가운데 빠저 일대 혼란을 일으켯는데 그 중 반수가량은 다행히 건저 내엇스나 이십이명은 급한 물결에 밀리어 간곳을 모르게 되엇다더라(동아일보 1928.10.29).

 

재작 이십칠일 오후 네시경 전라남도 제주도 대포 항구에서 승객 약 사십여명이 그날 서해바다로 향하야 출발하는 조선우선회사의 긔선 함경환(咸鏡丸)을 타기 위하야 종선 한척을 타고서 그 긔선으로 향하야 드러가든 중 그만 중도에서 폭풍을 맛나 바다물이 거칠어 오르면서 종선이 무참하게 뎐복되어 그중에 스물두명은 그만 행방불명이 되고 남어지 십여명만 경우 구조되엇는바 남어지 사람들은 아마도 조난된 듯 하다러라(조선일보, 1928. 01. 29).

 

1928년 1월 27일 오후 3시경 대판행 조우(朝郵) 소속 함경환(咸鏡丸)호가 대포항(大浦港)에 입항하여 승객을 태우려 할 때 때마침 불어온 강풍과 비에 승객을 가득 태운 종선이 침몰하여 삼십이명이 익사했다.

 

첫 종선은 무사히 본선인 함경환에 승객 모두를 운반하였으나 두 번째 종선은 승객 오십명이 갑작스런 돌풍에 비가 퍼붓기 시작하자 서로 본선으로 올라가려고 애 쓰던 중 종선이 침몰하여 오십명 중 십팔명은 생명을 구제하였으나 나머지 삼십이명은 순식간에 익사했다. 이 와중에서 모선(母船)인 함경환은 승객들을 구제하지 않고 떠나 버렸다고 한다.

 

별항 사건으로 최후의 생명을 구제한 오윤진(吳允眞)은 당시의 정황을 알에와 가티 말하더라.『원악 손을 만히 실은데다가 일긔 관계로 그리 되엇다고 할지라도 본선에서 뽀트를 나리다가 그대로 올려버린 것은 넘우도 무성의하다고 아니 볼 수 업슴니다. 만약 뽀트만 그대로 내리어 보내엇드면 단 몃사람이라도 더 구제할 것은 명백함니다. 하물며 그러한 광경을 보면서 한시간도 지체업시 떠나버린 것은 도뎌히 무책임하다고 할 수 밧게 업스며 심지어 다리판문까지 다치고 잇습데다』(동아일보, 1928.02.07.).

 

대포항참사사건 유족단(遺族團)에서는 즉시 진상조사에 착수하여 여러 방면으로 증거를 수집한 결과, 그 책임이 간부측에 있다고 판단하고 다음과 같은 항의 이유와 항의 조건을 제시하였다.

 

항의 이유는 부선 침몰 즉시 구명대를 상용하지 아니한 것, 보트를 강하(降下)하지 아니한 것, 대참사임에도 불구하고 신호의 기적(汽笛)이 없었던 것, 일시간(日時間)도 지체(遲滯)하여 구제하지 아니하고 즉시 출발한 것 등 4개 조항이다.

 

항의 조건으로 직접책임자인 함경환 선장을 면직시킬 것, 대포항 취급주를 경질(更迭)할 것, 유족(遺族)의 금후 생활상태를 참작하야 충분한 위자료를 제공할 것, 각 신문지를 통하여 천하에 사죄할 것 등을 제시했다.

 

당시 대포항조난사건을 접한 제주지역 각 단체에서는 당시 제주여자학술강습소(濟州女子學術講習所)에서 긴급히 회의를 개최하고 억울한 동포의 죽음을 애도(哀悼)하는 동시에 그들의 유족에게 조위금(弔慰金)을 모집하여 송부(送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제주경찰서에서는 애도식(哀悼式)만은 금지하고 조위연예회(弔慰演藝會)만을 개최할 것을 허락했다. 이에 따라 주최측에서는 어쩔 수 없이 18일 오후 7시에 공설시장에서 ‘대포리조난동포조위연예대회(大浦里遭難同胞弔慰演藝大會)’를 개최하였으며 그날 모금된 된 금액은 잡비를 제하고 즉시 유족에게 송부했다.

 

그런데 대포항 사건이 일어난 지 일년후 대포항과 가까운 창천항과 표선지역에서도 조난사건이 일어나 당시 지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지난 십일일에 제주도 중면 창천리(中面 倉川里)에 대판 항로의 군대환(君代丸)아런 긔선이 긔향하엿는데 그 당시에 종선에다가 뎡원 이외로 다수한 선객을 만재하고 륙디로 나오다가 풍량 때문에 배가 전복이 되면서 안중호(安重鎬)외 열명이 무참히 몰사 한일 대참변이 생기어서 해안 일대에는 처참하게 울고 부르짓는 친적 지긔의 애끈는 소리가 아즉도 처참한터이라는 바 이 참변의 책임자인 회조임자는 방금 제주경찰에 인치되야 취됴중이라더라(조선일보, 1929. 02. 26).

 

지난 이십일일 오전 일곱시경 제주도 동중면 표선리(東中面 表善里) 압바다에서 종선이 뎐복되어 일본가랴든 로동자 십일명이 무참히도 익사하엿다. 그 전날인 이십일에 긔선이 입항한다는 긔별을 듯고 십오리나 떨어저잇는 성읍리(城邑里) 경관주재소에서는 경관을 파견하야 왼종일 배오기를 고대하얏스나 종시 오지 아니해서 할 수 업시 그대로 돌아갓다는바 그 익일 일곱시경에야 입항하얏슴으로 동취급뎜에서는 도항허가증 업는 손님을 실코 본선인 군대환(君代丸)으로 향하는 도중에 선로가 꺽거지기 때문에 그다지 풍파도 업는 날이엇스나 그만 뎐복되고 말앗다.

 

본선에서는 이 광경을 보고 뽀트를 내려서 구급에 로력한 결과 십오명은 경우 구해내엇스나 남아지 십일명은 영영 어복에 장사지내고 말앗슴으로 당디 일반인사들은 동긔선의 뎡긔를 잘 안지키는 것과 취급뎜의 영리만 취하는데서 이러한 참사가 생겻다는 비난이 자못 높다(조선일보, 1929. 02. 28).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돈 벌러 일본으로 떠나는 형제친족들에 대한 지역사회의 한숨은 깊었다.

 

보라! 이것이 황금으로 인하야 자아낸 비극의 일막(一幕)이니 작년의 대포리(大浦里)의 참사가 아즉 우리의 두뇌에 상신(尙新)한 이때에 또 이 사건을 당하고보니 실로 가슴이 억색(抑塞)하다. 그래도 세상에서는 본도(本島)를 선전하야 극빈(極貧)도 업고 극부(極富)도 업는 이상(理想)의 낙원(樂園)이며 남선(南鮮)의 보고(寶庫)라 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정반대로 도일재류(渡日在留)한 동포 삼십만 중에는 오만의 제주도 형제를 포함하고 잇나니 실로 본도 총인구에 비교해보면 사분지일강되는 다수이다.

 

안가도 못살 경우(境遇)이니 가기는 가렴으나 어대간들 빈천(貧賤)이야 업스며 멸시(蔑視)야 업스랴? 그러나 왕년에 잇서서 중국 관헌의 재만동포(在滿同胞)에게 대한 의식적 압박! 현재 일본재유동포(日本在有同胞)의 비참한 생활 등을 청문(聽聞)할 때에 보내면서도 마음이 안 노힌다.

 

떠나는 이의 마음이나 보내는 이의 심정이 다 섭섭함이야 다름 업슬것이오 쓰림이야 마치 한가지일 것이다. 보내는 이의 설음! 가는 이의 설음! 이것이 백의족(白衣族)의 맛보지 아니치 못할 운명이오. 또한 공통의 규호(叫號)이다. 그러나 안전(眼全)의 엄연한 사실임에야 백번을 외치고 천번을 되풀이한들 가실 수야 잇스랴? 오즉 제군의 분투를 빌 뿐이다(동아일보 1929. 03. 06).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제주대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고 동국대에서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2011) 학위를 받았다. 제주도 경제특보에 이어 지금은 지역산업육성 및 기업지원 전담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겸임교수로 대학,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등이 있으며『문화콘텐츠기술과 제주관광산업의 융복합화연구』(2010),『제주형 첨단제조업 발굴 및 산업별 육성전략연구』(2013),『제주자원기반 융복합산업화 기획연구』(2011) 등 보고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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