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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92)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손중산(孫中山, 1866~1925), 이름은 문(文), 자는 재지(載之), 호는 일신(日新), 일선(逸仙)이다. 중국 근대 민족주의혁명의 개척자, 중국 민주혁명의 위대한 선구자, 중화민국과 중국국민당의 창립자, 삼민주의(三民主義)의 창도자로 불린다. 『오권헌법五權憲法』을 창립하였다.

 

최초로 반제 반봉건의 기치아래 “공화(共和)를 이루어 이천 년의 봉건군주제를 종결시켰다”고 평가받는다. 광동성 향산(香山)현(현 중산中山시) 취형촌(翠亨村)의 농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신해혁명(辛亥革命) 후에 중화민국 임시대총통(1912년 1월 1일 ~ 1912년 4월 1일)이 되었고 1925년 3월 12일 북경에서 별세하였다. 1940년에 ‘중화민국국부’로 존칭되었다.

 

천지회(天地會), 청대 민간결사 중 하나로 홍문(洪門)이라하기도 한다. 속칭 홍방(洪幇)이다. 천지회 창립 시기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고 현재까지 정론이 없다. 그 구성원을 보면 최초에는 대부분 농민이거나 파산한 농민이 변한 수공업자, 행상인, 노점상인, 수륙교통을 이어주는 운수노동자, 그리고 기타 고정적인 직업이 없는 강호 유랑자들이었다.

 

이후 성분이 나날이 복잡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하층 빈곤 평민이 중심이었다. 천지회는 “청나라를 물리치고 명나라를 부흥시킨다(反淸復明)”, “하늘을 대신해 정의를 행한다(替天行道)”, “부자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한다(劫富濟貧)”를 구호로 삼았다. 당시 평민의 민족관념과 계급착취를 반대했음을 보여준다.

 

김용(金庸)의 무협소설이나 관련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청 왕조와 대립각을 세운 조직인 천지회(天地會)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멋을 알고 예법에 얽매이지 않으며 운치 있고 호방한, 탁월한 무공을 지닌 방주 진근남(陳近南)은 많은 사람들 마음속에 영웅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천지회’는 김용 소설 속 가공의 단체가 아니다. 역사 속에 존재했다. 그 교의와 종지는 소설 속에서 묘사된 대로 ‘반청복명反淸復明’(청나라에 반대하고 명나라를 회복시킨다)에 있었다.

 

그런데 만청(滿淸) 정부를 전복시키고 중국 봉건통치를 끝내 나중에 ‘민주혁명의 선구자’, ‘국부(國父)’라 존중받고 있는 손중산(孫中山)이 천지회 회원이었다면 믿겠는가? 어쩌면 애써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손중산은 천지회 해외 지부인 ‘홍문(洪門)’에 가입했었다. 소속된 방회(幇會, 원래 당구堂口)는 ‘치공당致公堂’(중국치공당의 전신)이었다. 그리고 손중산은 당구(방회)에서의 지위가 상당히 높았다. ‘홍곤(洪棍)’에 봉해졌고 ‘원수元帥’라 불리기도 했다. 방회의 형벌 대권을 장악한 인물이었다. 손중산도 홍문 치공당 성원들에게 ‘큰형님(大哥)’라는 존칭을 받았다.

 

그렇다면 손중산은 왜 방회에 가입했는가? 초기 손중산은 중국 내에서 혁명운동을 진행하면서 계속해 좌절을 맛봐야 했다. 처음에는 이홍장(李鴻章)에게 기대를 걸었다가 나중에는 또 강유위(康有爲) 일파와 함께 봉기를 기도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당시 상황을 보면 손중산은 자금도 없었고 세력도 없었으며 힘도 없었다. 활동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해외 화교들에게 기부금을 모집하는 방법이 유일한 출구였다.

 

그러나 1896년(갑오전쟁(甲午戰爭) 패전 후 ‘중일 마관조약(馬關條約)’ 체결한 이듬해), 손중산이 처음 미국을 방문했을 때, 현지의 보황당(保皇黨) 세력은 대단했었다. 손중산은 당시 화교 사회에서 홍문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해외 화교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자신의 활동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손중산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까지 북미대륙을 횡단했던 당시의 과정을 회고하면서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가는 곳마다 현지 화교들에게 혁명의 이치를 선전했다. 청 조정의 부패에 대해 알렸다. 조국이 열강들에 의해 분할될 위기에 처해 있다고 설명했다. ‘중화의 물력을 쓰면서 외국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부패한 청 왕조를 빠른 시일 내에 전복시키지 않으면 조국을 구하지 못하게 된다고 알렸다. 그러나 혁명가를 환영하는 사람들은 수십 명에 불과했다.”

 

1903년 손중산이 다시 (일본을 경유) 호놀룰루로 갈 때에는, 역사가 유구하고 동남아와 미주 국가의 화교들 중에 비교적 큰 영향력이 있는 해외 홍문 조식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다. 그중 당시 미주 화교의 8,90이 홍문 천지회의 각 방회에 속해 있었고 그곳 홍문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힘을 혁명의 궤도로 끌고 와야 했다. 해외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화교의 역량을 직접이든 간접이든 중국 국내 혁명운동에 참여하게 하거나 지원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홍문 조직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같은 해에 외삼촌 양문납(楊文納)의 건의에 따라 당시 홍문 대선배 ‘숙공(叔公)’ 종수양(鐘水養, 역사학자의 고찰에 따르면 종조양(鐘兆養)이라고도 함)에게 소개를 부탁해 1904년 1월 11일 의연히 현지(호놀룰루 치공당致公堂) 천지회 조직에 가입한다. 현지의 ‘국안회관’에서 가입 의식을 치를 때 ‘홍곤洪棍’(현재 원수(元帥) 직에 해당)에 봉해졌다. 이때부터 홍문의 인물들에게 ‘손대가孫大哥’(손 큰형님)라 불렸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입회 전에 보황파가 극렬하게 방해했는데 다행이도 종수양이 여러 의견을 강력하게 물리치고 환영했다고 한다. 종수양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홍문의 종지宗旨는 ‘반청복명’이다. 손선생은 비록 홍문에 가입하지 않았었지만 이미 여러 해 동안 홍문의 종지를 실행했다. 그와 같은 사람을 힘써 받아들어도 모자랄 판인데, 어찌 가입을 거절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하면 홍문의 종지를 위반했다는 조롱을 받지 않겠는가?”

 

가입 후 손중산은 적극적으로 홍문의 문호를 정리하는 것을 도왔다. 당시 미주의 홍문 조직은 26여 개나 됐다. 통일된 총부가 샌프란시스코에 설립돼 있기는 했지만 그 당시의 상황은 각각 분립해 있었고 명칭도 달랐을 뿐만 아니라 연락체계로 느슨했다. 조직과 조직 사이에 엇갈리기 일쑤였다.

 

더욱이 강유위(康有爲)가 수장으로 앉아 있던 보황회는 그들을 선동하고 잘못된 여론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줄곧 애국을 전통으로 하고 있던 홍문 조직은 자신들의 원래 종지인 ‘반청복명’을 거의 잊고 있었다.

 

그런 점을 고려해, 당시 미국 연락 회원 역할을 하고 있던 손중산은 광범위하게 홍문 인사들에게 홍문 성립의 연원과 투쟁의 역사를 설명하는 한편, 힘써 국내 혁명의 형세와 앞날을 홍보해 나갔다. 미주 치공당의 지도자(사도미당(司徒美堂) 포함)와 대다수 성원에게 자신들의 역사적 사명을 일깨웠다.

 

손중산은 홍문의 ‘큰형님’ 신분으로 현지의 홍문 선배들에게 당무와 조직을 개편할 것을 적극적으로 건의하고 각지의 분당 성원들이 등록하도록 했다. 그리고 미주 치공당의 위탁을 받아 자신이 직접 『미주치공총당팔십조공장(美洲致公總堂八十條公章)』 초안을 새로이 만들었다.

 

그 장정의 규정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먼저 미주 홍문 조직의 명칭을 치공당으로 통일한다. ; 둘째, “본 당은 만주족을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며 민국을 창립하고 지권을 균등하게하기 위해 분투한다”는 종지를 명확히 규정했다.

 

이 장정(章程)은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1905년(광서光緖31) 8월, 손중산이 일본 동경 동맹회 성립 대회에서 제기한 동일한 강령보다 1년 4개월이나 빠른 것이다. 그리고 해외 홍문이 나중에 민주혁명의 길로 들어서도록 커다란 영향을 줬다. 결국 해외 홍문 조직이 최종적으로 ‘개당위당改堂爲黨’(당堂을 당黨으로 바꿈)을 실현시켜 정당으로 변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됐다.

 

1911년 5월 손중산은 세 번째로 미국을 방문한다. 당시 미국으로 건너가 두 가지 일을 진행한다. 첫째, 현지 동맹회 분회 회원을 일률적으로 치공당에 가입토록 해 치공당과 합병했다. 둘째, 여러 차례 미주 치공당 수령 황삼덕(黄三德)과 구체적으로 연합하는 일을 상세히 협의하고 홍문 주향국(籌餉局, 급료 기획 조달 부서)을 만들어 국내 무장봉기하는 군인의 급여 및 보급품을 조달하도록 했다.

 

이때부터 손중산의 지도와 영향아래, 해외 각지 치공당 홍문 천지회의 성원들은 직간접적으로 손중산이 이끌고 시작한 반청 무장봉기에 참가했다. 그중 유명한 ‘황화강(黃花崗)사건’(1911년 신해혁명의 발단이었다고 평가한다. 10월 호북(湖北) 무창(武昌)의 신군 봉기로 이어졌다고 본다) 중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72열사 중 29명이 해외 화교와 홍문 인사들이었다.

 

 

경제 방면에 있어 해외 홍문 조직은 거액의 경비를 모아서 기부해 국내 혁명을 지원했다. 1910년부터 1911년 사이, 미주 치공총당은 국내 봉기를 위해 건물 다섯 동을 저당 잡아 수십만 달러를 혁명에 지원했다. 심지어 캐나다 홍문 치공당은 본당 건물을 저당 잡아 얻은 돈 전부를 중국내 혁명 투쟁에 헌금했다. 이렇듯 해외 홍문은 신해혁명에 거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에 손중산은 일찍이 “화교는 혁명의 어머니”라고 했었던 것이다.

 

해외 홍문 조직은 원래 “생존(生存) 자위(自衛), 협의(俠義)로 사악함을 물리치며 경제적으로 상호 협조한다”를 종지로 삼았다. 이후 손중산이 제시한 민주혁명의 정치 강령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국내 반제 반봉건 민주혁명의 거대한 물줄기에 투신했다.

 

신해혁명을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영향을 확대하고 조직의 응집력과 전투력을 증강시켰을 뿐만 아니라, 신해혁명의 세례를 받아 홍문 조직은 정치적으로 성숙하게 되면서, 나중에 중국 치공당 성립을 위한 조직과 지도부 구성을 기본적으로 완성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손중산은 천지회의 방회의 종지를 최종적으로 완성한 사람이 된다. 그가 이끈 신해혁명은 당시의 천지회 홍문이 지대한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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