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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마을 조기축구 ... 마을공동체적 의미와 상징[61화] 일제강점기 제주 축구 ... 일제에 대한 항거와 무언의 표현
진관훈 박사  |  adel@jejutp.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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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10  09: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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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 일이다. 서울대를 나와 일본 츠쿠바대학 대학원에서 체육학 박사과정을 다니던 연구원이 조사차 제주를 방문했다. 그 연구원의 관심사는 일제강점기 제주지역 마을 조기축구였다.

마을 조기축구를 통해 일제강점기 제주도민의 문화와 정서, 일제에 대한 항거와 무언의 표현 등을 살펴보고자 했다. ‘축구는 일제강점기 제주도민 모두를 하나로 뭉치게 하고 스스로 살아있음을 깨닫게 하는 마을 공동체적 경기다’는 것이 그 연구원의 가설이다.

1925년 7월 21일 제주축구단이 조직되었다.

제주도에는 오육년 전부터 청년 소년단을 통하야 축구(蹴球)가 성행됨에 불구하고 청년 풋볼팀이 하나도 엄슴을 유감(遺憾)으로 사(思)한 사계(斯界)의 유지 이십여 명은 대표적 팀을 조직하야 축구시합에 응(應)하는 동시에 차(此)의 지도 발전을 목적하자고 지난 십이일 제주향교(濟州鄕校)서 제주축구단(濟州蹴球團)을 조직하엿다는데 동단(同團)에서는 창립 기념 제일회 사업으로 팔월 초순을 기(期)하야 청년축구대회(靑年蹴球大會)를 개최하리라(동아일보, 1925.07.25).

제주축구단을 조직하엿는데 임원은 좌(左)와 여(如)하다러라. 강기찬(康箕贊) 김치용(金致鍾) 고원종(高遠鍾) 고창섭(高昌燮) 유성백(劉成伯)(조선일보, 1925.07.26).

제주축구단이 결성되기 전인 1923년 12월 23일 제주체육협회가 조직되었고 그 산하에 야구, 정구, 국제경기부 등과 같이 축구부를 두었다.

제주면 유지 제씨(諸氏)의 발기로 제주체육협회(濟州體育協會)를 조직코자 거월(去月) 이십삼일 오후 이시부터 제주부인야학회(濟州婦人夜學會)내에셔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제반 토의가 잇슨 후 임원을 선정하얏다.

회장 김태민(金泰旼) 부회장 이한철(李漢哲) 총무 김철준(金哲埈) 서무부장 장태돌(張泰突) 부원 김평관(金平寬) 오규삼(吳奎三) 국제경기부장 김택수(金澤銖) 부원 양창보 송임생(宋壬生) 야구부장 한상호(韓相鎬) 부원 이동빈(李東彬) 홍순일(洪淳日) 정구부장 이창빈(李昶彬) 부원 박찬택(朴燦宅) 이남식(李南植) 축구부장 박교훈(朴喬壎) 부원 양원창(梁元昌) 조대수(趙大秀)(조선일보, 1924.01.05).

당시 축구대회를 취재한 신문기사를 보면 선거포고, 동원령, 개전, 회군 등 엄숙하다 못해 비장한 감이 든다.

거(去) 십이월 삼십일일에 조천군(朝天軍)으로부터 수양군(修養軍)에 대하야 선전포고(宣戰布告)가 유(有)하기로 수양군이 동원령(動員令)을 발(發)하야 당지(當地) 사립명신학교(私立明新學校) 광정(廣庭)에서 개전(開戰)이 되얏는대 사오시에 긍(亘)하도록 승패를 미결(未決)하얏스나 수양군의 성적이 우량(優良)하얏고 후일을 기(期)한 후 각기 회군(回軍)하얏다더라(동아일보, 1923.01.10).

   
 

한때 제주지역 고등학교 응원문화가 유튜브를 강타했던 적이 있다. 매스게임이나 카드섹션, 덤블링, 웃통 벗고 온 몸을 내 던지며 쉬지 않고 함성을 지르는 제주지역 고교생들의 응원 열기가 이를 처음 본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고 소름이었을 것이다.

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를 보며 전 세계가 경악했다. 하지만 응원가를 연속 200번 이상 부르고 쉴 틈 없는 파도타기와 격렬한 응원동작을 눈 감고도 했던 나는 붉은 악마를 보며 그리 새삼스럽지 않았다. 다들 그 정도는 하는 거 아닌가?

전제주 소년축구대회는 거월(去月) 이십구일 삼십 양일간 제주공보운동장(濟州公普運動場)에서 개최 된 바 참가단체는 일구이삼(一九二三) 조천소년(朝天少年) 명신학교(明新學校) 소년돈목(少年敦睦) 화북학교(禾北學校) 함덕전진(咸德前進) 소년용진(少年勇進) 신촌소년(新村少年) 소년탐흥(少年耽興) 영흥학교(永興學校) 조천학생축구(朝天學生蹴球) 합(合) 십일팀이엇다.

제이회 예선전은 명신학교 대 화북학교 간에 개최되엿는대 남녀 학생의 응원은 창가(唱歌) 혹은 박수 등으로 기세(氣勢)를 노도와 일진 일퇴하는 광경은 지못 관광자(觀光者)를 긴장케 하얏스며 최후 승리는 명신학교군(明新學校軍)에 귀(歸)하엿다(동아일보, 1923.08.08).

모슬포지역에서도 인근 지역 축구단끼리의 축구대회가 열렸다. 상예, 중문 대정 등등. 지금도 초등학교 축구부가 활발한 지역이다.

제주도 모슬포 소년돈목회(敦睦會) 주최로 거(去) 일월 이십오일에 축구대회를 모슬포친목회운동장에서 개(開)하얏는데 참가단은 대정공보단(大靜公普團) 대정소년단(大靜少年團) 중문용진단(中文勇進團) 상모소년단(上慕少年團) 상예소년단(上猊少年團) 일과소년단(日果少年團)이 필승을 상전(相戰)하다가 최후 승리는 중문용진단에 귀(歸)하얏다(동아일보, 1924.02.02).

제삼회 전제주축구대회는 예정대로 지난 칠팔 양일 남성외광장운동장(南城外廣場運動場)에서 열니엿는데 정각전 팔시에 참가한 십칠개 단체가 영흥학교교장(永興學校校場)에 모히여 입장식을 거행하고 화북(禾北) 함덕악대(咸德樂隊)를 선두로 경기장까지 가는 길에 선수 응원단 관중은 오리(五厘)이상 거리를 연(連)하엿섯는데(동아일보, 1925.08.22).

당시 대회 규정을 보면, 소년부가 신장이 오척 이촌 이하, 즉 158cm 이하로 제한했음을 볼 수 있다. 아마 당시에는 지금처럼 학령층이 일정하지 않아 나이로 제한하기 보다는 신장(伸長)으로 제한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사회 전제주축구대회를 오는 삼십일부터 사일간 당지 광양운동장(光陽運動場)에서 개최하리라는데 벌서 인기는 비상(非常)히 비등(沸騰)하엿스며 선수는 염천(炎天)임을 불구하고 맹렬(猛烈)한 연습을 하야 대성황을 정(呈)하리라하며 참가규정은 소년부 신장 오척 이촌(五尺 二寸)까지(동아일보, 1926.07.27).

축구경기 보러가서 축구는 못 보고 응원만 하며 응원가를 목 터지게 불렸던 경험은 제주에서는 흔한 일상이다. 죽어라고 응원하고 학교에 돌아갔는데 ‘목이 안 쉬었네’, ‘애교심이 부족 하네’, ‘응원 똑바로 안 했네’ 라며 선배들에게 꾸중 들었다. 나는 단지 반 친구들보다 성대가 좋아 목이 안 쉬었던 것뿐인데...

제사회 전제주축구대회는 연사일간 폭염임에도 불구하고 관중은 무려 수천명에 달하야 열구(熱球)가 창공(蒼空)에 비(飛)하고 용사(勇士)의 건각(健脚)이 번적거릴 때 마다 응원대와 관중이 열광(熱狂)함은 실(實)로 형언(形言)키 난(難)하엿스며 예년(例年)과 여(如)히『풋뽈타임쓰』는 이채(異彩)를 정(呈)하엿는데

소년부는 최후로 소년선봉군(少年先鋒軍)과 소년탐흥군청년부(少年耽興軍靑年部)는 탐흥청년군용청년군(耽興靑年軍勇靑年軍)이 각기 필사의 력(力)을 다하야 진자웅(進雌雄)을 결(決)하다가 필경(畢竟) 승리의 영예(榮譽)는 선봉군 탐흥군에 귀(歸)하고 대회는 원만히 폐회하엿다더라(동아일보, 1926.08.07).

앞서 소개했던 연구원과 유수암을 찾아갔었다. 당시 유수암은 지금처럼 변하기 한참 전으로 커다란 팽나무 군락 옆에 마을운동장이 있고, 그 운동장에서 마을 청년들이 조기축구를 하고 있었다.

그 축구경기를 하는 청년들은 그 마을 출신이기는 하나 직장 관계상 제주시에 거주하면서 주말에 고향 유수암에 와서 동네 선후배들과 조기축구를 즐긴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연구원은 무릎을 치며, ‘내가 제주에 조사하러 온 목적이 바로 이것이다’라며 감동을 했다. 제주지역에서 축구는 단순한 운동경기 이상으로 마을공동체적 의미와 상징이라는 것이다.

제주학우회(濟州學友會) 주최 전 제주 청소년 축구대회는 거(巨) 사일 상오십시 제주청년회운동장(濟州靑年會運動場)에서...제일차로 소년팀 도두(道頭) 대 신명전(新明戰)으로 시작되어 청소년팀의 일회 예선전은 당일에 끗을 내이고 익(翼) 오일륙일은 마츰 우천(雨天)임으로 순연(順延)하얏다가 칠일에 재개하려는 차(次)에 당지(當地) 경찰서에서는 경관(警官) 배포(配布)치 못하겟다는 구실로 일시금지를 하얏스나 수차 교섭한 결과 재개하야 청소년 최후 결승전을 마치엇다더라(동아일보, 1928.08.14).

이러한 의미를 알아차림 것인지, 일제는 축구경기마다 경관을 임석(袵席)시켜 관중들을 감시했다. 그러다가 1930년대 초반부터는 아예 조기회를 포함한 제주지역의 축구대회를 전면 금지시켰다. 무엇이 두려웠던 걸까?

   
▲ 진관훈 박사.

제주도 성산포(城山浦)에서는 일반 소년게의 풍긔를 숙정하고 근면성을 배양시키려고 지난달부터 조긔회(早起會)를 조직하얏는데 그 성적이 자못 량호하야 일반부형도 크게 칭찬이든 중 성산포주재소(駐在所)에서 돌연히 본서의 명령이라 하야 조긔회를 금지하얏다는데 그 리유는 지도자가 불온하느니 또는 이와 가튼 단체생활은 사상이 악화하야 진다는 것인바 일반부형은 경찰당국의 무리한 간섭에 대하야 분개하고 물의가 분분하다 한다(동아일보, 1931.09.23).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제주대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고 동국대에서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2011) 학위를 받았다. 제주도 경제특보에 이어 지금은 지역산업육성 및 기업지원 전담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겸임교수로 대학,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등이 있으며『문화콘텐츠기술과 제주관광산업의 융복합화연구』(2010),『제주형 첨단제조업 발굴 및 산업별 육성전략연구』(2013),『제주자원기반 융복합산업화 기획연구』(2011) 등 보고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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