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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중산은 왜 ‘제2차 혁명’을 발동하려 했는가?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93)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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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15  09: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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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중산(1866년~1925년), 광동성(廣東省) 향산현(香山縣) 취형촌(翠亨村) 사람으로 어렸을 때의 이름은 제상(帝象)이고 뒤에 문(文), 중산(中山)으로 바꿨다. 자는 재지(載之)이고, 호는 일신(日新), 일선(逸仙)이다. 근대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가로 청소년 시기에 광동(廣東)인민투쟁의 영향을 받았고, 태평천국(太平天國)의 혁명 사업을 계승했다.

중화민국(中華民國)과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의 창설자이자, 삼민주의(三民主義)의 제창자이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후에 중화민국 임시대총통(大總統)이 되었다. 저서로 『건국방략建國方略』, 『건국대강建國大綱』, 『삼민주의三民主義』 등이 있고, 사후에 후인들이 『국부전집國父全集』을 여러 차례 출간했다.

1911년 ‘무창기의(武昌起義)’를 기점으로 손중산이 이끄는 신해혁명이 전국에서 폭발하면서 만청(滿淸) 왕조의 마지막 지푸라기를 잘라 버렸다. 이듬해 1월 1일, 손중산은 남경에서 임시대총통에 취임한다고 선언하면서, 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국인 중화민국이 정식으로 성립됐다.

1913년, 손중산 등 혁명당 당원들은 원세개(袁世凱)를 토벌한다는 명분의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2개월도 안 돼 원세개에 의해 탄압된다. 우담화(優曇花)처럼 잠깐 나타났다 바로 사라져 버린 이 전쟁을 ‘2차 혁명’이라 부른다.

손중산은 왜 ‘2차 혁명’을 발동했는가?

   
 

1913년 3월 20일 밤, 상해 호녕(滬寧) 기차역. 원세개의 초청을 받고 북경에서 개최하는 중화민국 제1차 국회에 참석하기 위해 송교인(宋敎仁)이 황흥(黃興), 료중개(廖仲愷), 우석임(于石任) 등을 대동하고 개표소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벌어진다. 개표소에서 총성이 탕 탕 탕 세 번 울렸다. 총소리와 동시에 송교인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일시에 뒤죽박죽 기차역은 난장판이 돼 버렸다. 흉수는 갈팡질팡하고 있는 사람들 속으로 뒤섞여 들어선 후 미몽의 밤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가까이 있던 철로의원으로 급히 운송돼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송교인은 이틀 후 한을 품고 세상을 하직했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송교인 암살사건’이다.

송교인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민주혁명의 선구자였다. 민국 초기 내각제를 창도했던 정치가였다. 그는 ‘정당 정치’, ‘의회 정치’, ‘책임 내각’을 주장했다. 국회 선거를 통해 책임 내각을 조직해 원세개의 권력을 겸제(箝制)하고, 총통의 명예는 존중하나 실제 권력이 없는 자리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 주장을 실현하기 위해 송교인은 1912년 8월 동맹회(同盟會)를 국민당(國民黨)으로 개편 조직했다.

개편 후의 국민당은 많은 관료와 정객을 가입시키고 국회의 제1당이 됐다. 그리고 1913년의 국회대선에서 승리를 거뒀다. 송교인은 바로 그때 북경으로 건너가 유럽의 ‘내각제’를 참고해 당수로써 조각을 하려했었다. 그러나 그의 원대한 포부는 실현되지 못했다. 중국 현대사의 새로운 시도였고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영웅의 피는 결국 중국을 파국으로 내닫게 만들었다.

송교인의 죽음은 손중산의 2차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던 꿈이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제1차 혁명인 신해혁명이 성공하자 손중산은 선서 후 임시대총통에 올랐는데 어째서 원세개로 변했는가? 그 몇 년 동안, 손중산은 어디에 있었는가?

원래 무창봉기 이후 청 정부는 원세개에게 정무를 총괄토록 권한을 주면서 군대를 이끌고 혁명을 진압하도록 했다. 원세개는 군사적 압박을 가하는 한편 혁명당과 접촉하면서 청 왕조의 황제를 퇴위시키는 조건을 내걸고 공화국 총통 직위를 요구했다.

서양 열강의 압박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혁명의 기치가 약화되는 것을 막고 “평화적으로 혁명의 공로를 인정받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손중산과 혁명당원들이 동의했다. 원세개가 전국 관련 부서에 공개적으로 전보를 보내 공화를 찬성한다는 공개 성명을 발표하자, 1912년 2월 14일 손중산은 임시참의원에서 임시대총통직을 사임하고 원세개에게 양위했다.

이후 손중산은 전국을 순시하면서 ‘민생주의’, ‘사회주의’, ‘지권 균등’을 설파했다. 재야 신분으로 실질 방면에 성과를 얻기 위한 행보였다. 1913년 2월, 그는 또 ‘전국철로감독’이라는 신분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에서 그는 ‘국빈’ 자격의 성대한 환영과 접대를 받았다. 일본에서 학교, 공장, 철로를 시찰했고 일본 정치가, 기업가들과 환담하면서 일본의 선진 경험을 배워 중국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랐다.

2월 23일, 손중산이 귀국 길에 오르려 했을 때 송교인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세 발의 총성이 손중산을 비분에 빠뜨리고 평화적으로 중국의 미래를 건설하려던 꿈을 산산이 부셔놓았다. 원래 “혁명이 성공할 때까지 계속적인 동지들의 노력이 필요”하다지 않던가.

나타났다가 바로 사라져버린 ‘2차 혁명’

손중산이 급히 중국으로 돌아갔다. 상해에서 진기미(陳其美), 거정(居正), 대계도(戴季陶)등을 황흥의 거처에 모이도록 하고 송교인 사건의 해결 방법을 토론했다. 그러나 국민당 내부에서도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 황흥과 같은 부류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자고 했다. 임시조약을 파괴하지 않은 범위에서 합법적인 항쟁을 벌이자고 했다. “남방 군사력은 의지하기 어렵다. 일시에 반기를 든다고 해도 어지러운 국면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원세개를 암살하자고 주장했다.

손중산은 암살 방법에 찬성하지 않았고 법으로 해결하는 것도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무력으로 원세개를 토벌하자고 주장했다. “원 씨는 대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발호시령하고 병력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고 있소. 내 생각은 방심한 틈을 타 행동을 취해 허를 찔러 공격하자는 것이오. 번개 친 후 귀를 막을 틈도 없이 천둥소리가 울린다는 말이 있잖소. 먼저 빠르게 공격해 손쓸 틈 없이 움직이면 제압할 수 있소.”

서로의 의견 차이가 너무 커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그해 4월 26일, 국고가 고갈된 문제를 해결하고자 원세개의 북양정부는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5개 국 은행단과 차관조약을 맺었다. 국민당원들은 그 행동이 국회의 비준을 받지 않아 비합법적인 행위로 봤다.

국민당에 속한 강서도독 이열균(李烈鈞), 강동도독 호한민(胡漢民), 안휘도독 백문위(柏文蔚)가 차관을 반대한다는 내용을 전보로 알렸다. 6월, 원세개는 이 세 명의 도독 직위를 해임한다고 선포하고 북양군 제6사단 이순(李純)의 군대를 강서로 파견했다.

   
 

7월 12일, 이열균은 손중산의 지시아래 강서 호구(湖口)에서 군대를 소집해 원세개 토벌군 총사령부를 만들고 정식으로 강서 독립을 선포하고 원세개 토벌을 시작한다고 알렸다. 이열균의 선도 하에 강소(江蘇)의 황흥(黄興), 안휘(安徽)의 백문위, 상해(上海)의 진기미(陳其美), 호남(湖南)의 담연개(譚延闓), 복건(福建)의 허숭지(許崇智)와 손도인(孫道仁), 사천(四川)의 웅극무(熊克武) 역시 독립을 선포했다. ‘2차 혁명’이 시작됐다.

   
▲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그러나 ‘2차 혁명’은 군사 규모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원세개와 필적할 수 없었다. 정치적으로도 옹호를 받지 못했다. 많은 지역의 관원과 상회가 ‘2차 혁명’을 반대했다. 심지어 적지 않은 사람들이 ‘2차 혁명’은 국민당과 원세개의 권력다툼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원세개가 없어진 봉건왕조의 체제를 부활시켜 칭제(稱帝)한 것을 반대한, 가장 큰 세력을 보유하고 있던 운남(雲南)도독 채악(蔡鍔)도 당시에는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이것이 ‘2차 혁명’이 요절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한계였다.

7월에 발발한 후, 9월 1일에 원세개의 북양군이 남경을 함락시켰다. 각지에서 독립을 취소한다고 선포했다. ‘2차 혁명’은 실패했다. 원세개는 즉각 황흥, 진기미 등 다섯 명을 일등 전범으로 선포하고 손중산, 황흥, 진기미 등에 대해 수배령을 하달했다. 손중산 등은 어쩔 수 없이 다시금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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