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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94)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원인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다. 여기에서는 중국인들의 단편적인 몇 가지 관점을 나열해 참고할 수 있도록 한다.

 

첫째 의견 : 공산당은 손중산을 추앙할 뿐만 아니라 솔론(Solon) 등 노예주의 계급의 개혁가, 상앙(商鞅) 왕안석(王安石) 등 지주계급 혁명가와 개혁가, 워싱턴 나폴레옹 링컨 등 자산계급 혁명가에 대해서도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실제 평가는 차치하고 그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역사교과서에서는 그러하다. 그들이 무산계급혁명가들은 아닐지라도 당시의 역사 조건아래 진보적 성향을 띠고 있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산당원은 역사유물주의자인 것은 당연하다. 역사유물주의에서 역사 인물을 평가하는데 역사상의 인물들을 선악이라는 추상적인 잣대를 가지고 평가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역사 환경 속에서 고찰하는 것이다.

 

당시 해당 지역의 생산력이 어떠한 수준에 처해 있는가? 사람들의 의식주, 생로병사는 어떻게 해결했는가? 어떤 이익집단이 존재했는가? 고찰하는 역사 인물은 어떤 집단을 대표하는가? 그들과 적대적인 집단은 무엇이 있었고 어떠했는가? 피차간 주장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는가? 어떤 주장이 생산력을 해방시키는데 이익이 있었고, 진보적이었는가? 이런 관점을 종합해 평가한다.

 

역사유물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손중산은 분명 추숭할 가치가 있다 : 서태후, 원세개, 장훈(張勛)과 같은 제왕 장상의 들러리들과 비교해 볼 때 손중산을 추숭하지 않으면 그 누구를 추숭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현재의 중국 공산당은 왜 손중산을 추숭하는가? 공산당의 연속과 역사유물주의의 관성 이외에 민족주의 서사에 편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외에 주의해 둬야 할 일이 하나 있다. 현재의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의 장개석(蔣介石)조차도 무시하지 않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를 위해 역사상 저질렀던 떳떳하지 못한 일까지 숨기려고 하고 있다. 왜 그럴까? 깊이 얘기하지 않아도 아실 테고.

 

 

둘째 의견 :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역사, 법통(法統), 통전(統戰, 통일전선) 세 방면에서 중국 공산당이 손중산을 추숭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보자.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 공산당 초기 성립은 손중산의 ‘연아용공(聯俄容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아용공’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소련과의 연계, 공산당 용납”이다. 손중산이 만년에 실행한 것이다. 소련을 끌어들여 정치 훈련, 군사 및 재무 원조를 받아 중국 국민당의 정책에 도움을 구했다.

 

대혁명 이전 중국공산당, 국민당, 소련, 공산국제(共産國際, 코민테른) 간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됐고 복잡한 관계망을 형성했다. “소련과의 연계, 공산당의 허용”은 손중산이 1920년대 이후 완성한 것으로 대립돼 있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이고 서로 보완하는 관계를 갖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그렇게 연합해 농민 노동자를 원조하는 손중산의 ‘신삼민주의(新三民主義)’ 기치아래 공산당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초기 공산당 당원은 국민당 당원이었다. 동지였고 형제였다. 이런 관계가 북벌(北伐)까지 이어졌고 장개석이 ‘청당(淸黨)’ 정책을 실행하면서 흩어지게 된다.

 

만약 초기 공산국제가 중국공산당의 아버지라고 한다면 손중산은 중국공산당의 양부(養父)라 할 수 있다. 당시 손중산은 국민당 내부에서 여럿 의견을 강력하게 물리치고 공산당을 부양했다. 그렇다면 도의상 중국공산당은 ‘효도’로써 양부 손중산을 추숭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법통이란 관점에서 보자. 중국공산당은 처음부터 끝까지 중화민국의 제2대 왕조 국민당 정부의 합법성을 부정해 왔다. 원세개의 북양정부를 전복시킨 것은 손중산의 기치 아래 국공(國共)합작의 공동 결과물이라 주장한다.

 

북벌 승리 후 장개석이 혁명의 가치를 부정하고 ‘청당(淸黨)’ 정책을 실행한 후 성립된 국민당 정부는 이미 손중산의 혁명 정통성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공산당 자신들이 바로 손중산 혁명의 의발(衣鉢)의 계승자라 자처하고 있다.

 

이는 나중에 소비에트(Soviet) 정부, 해방구,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합법성에 대한 합리적이고 하나의 계통을 이루는 법통 계승 체계가 된다. 그리고 공산당이 국민당 정부를 전복시키는 데에 합법적이라는 핑계(?)가 된 것이기도 하다.

 

현재 중국의 대중들에게 통속적으로 암묵적으로 통하는 말이 있다. “중국공산당이 장개석과 전쟁을 벌인 것은 한 왕조가 다른 왕조를 전복시킨 것과는 다르다. 북벌 이후의 천하는 우리들이 함께 만들었다. 당시에 양부(손중산)는 우리들에게 반반씩 나누어 갖자고 응답했었다.

 

너희들(국민당)이 뒤통수를 쳐서 우리를 핍박하니 어쩔 수 없이 정강산(井岡山)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저 우리들에게 배당된 반을 회수하려 했을 뿐이었다. 결과는? 그대들은 지금 바다 건너 섬으로 피한 것일 따름이다.” 이러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도의상 중국공산당은 손중산을 ‘의리’로써 존중할 수밖에 없다.

 

통전(統戰, 통일전선)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봐야 할까? 손중산은 해외 화교와 홍콩, 마카오, 대만 지역에서 90년대 이전까지 높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모택동과 장개석은 그 영향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아니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에 해협양안(海峽兩岸, 양안관계, 중국 대륙과 대만 사이를 아우르는 말)은 중국 정통의 지위를 놓고 명분 싸움을 벌였다. 손중산의 지위는 높아질 대로 높아졌고 신격화까지 될 정도였다. 스스로 자신들이 손중산의 계승자라고 공언했다.

 

무엇 때문일까?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지구 전체에 퍼져있는 화교들의 지원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상대방의 민심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속셈도 작용했고. 그렇다면 도의상 손중산을 추앙하는 것은 ‘정(情)’으로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총괄하면, 죽은 후 신격화된 어떤 사람도, 배후에는 자신의 이익을 쫓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사악한(?) 이기심이 존재한다.

 

 

셋째 의견 : 손중산은 중국 민주혁명(자산계급 혁명)의 선구자다. 철저한 반봉건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중국 인민의 혁명 사업에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공헌을 했다.

 

말년에 ‘신삼민주의’를 내걸고 소련과 연합하고 공산당을 용납했으며 농민 노동자를 원조하는 정책을 폈다. ‘신삼민주의’와 중국공산당이 말하는 민주혁명단계의 강령은 기본적으로 일치하는 것이었다.

 

중국공산당이 이끈 민주혁명은 또 “신식의 특수한 자산계급 민주혁명”, 즉 신민주주의 혁명이라도 칭한다. 무슨 말인가? 무산계급 정당도 자산계급혁명을 이끌었다는 뜻이다.

 

중국공산당이 이끈 신민주주의혁명은 중국 민주혁명의 일부분에 속한다. 구 민주혁명과 근본적인 차이는 ‘어떤 계급’이 혁명을 이끌고 권력이 ‘누구의 손’에 가는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손중산은 중국 민주혁명의 선구자다. 아니 창시자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공산당이 손중산이 발동한 자산계급 민주혁명이 미완성으로 끝난 단계를 이끌었고 ; 그 단계에서 공산당 강령이 손중산의 이념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면, 중국공산당과 손중산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당연하지 않는가, 계승 발전시키는 관계다. 부정하거나 대체시키는 관계는 될 수가 없지 않는가?

 

그리고 중국공산당은 어떻게 신민주주주의혁명을 성공시켰으며 신중국 건국에 성공했을까? 공산당 내부의 지도자들의 뛰어난 점과 농민 노동자 계급의 피 흘린 대가 이외에 중국공산당이 가장 광범위한 혁명통일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산계급과 대자본계급은 가장 적은 수였을 뿐이다. 무산계급혁명이 성공을 거둔 것은 농민, 소자산계급과 기타 중간 계급의 지지를 쟁취했기 때문이다.

 

그 통일전선은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가?

 

구 민주주의혁명은 자산계급이 이끄는 자산계급혁명이고, 혁명의 대상은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였다 ; 신민주주의혁명은 무산계급이 이끌고 소자산계급 등 중간 계급과 연합해 진행한 것으로 제국주의, 봉건주의와 대자산계급(관료 자산계급)을 대상으로 진행한 신식 자산계급혁명임을 말한다.

 

신민주주의혁명은 모든 자산계급을 적대적으로 보지 않았음을 설명한다. 그것은 자산계급혁명의 새로운 단계이며 무산계급의 새로운 이정표였다. 이 혁명의 적대적 대상은 관료 자산계급이었다.

 

이런 통일전선의 형성은 신민주주의혁명을 완성하는 기초를 닦았을 뿐만 아니라 공산당의 총노선, 총정책의 중요한 부분이 되면서 결집력을 공고히 했고 어려움을 극복해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중요한 법보가 됐다.

 

 

마지막으로 관련 용어의 해석을 하나씩 나열하고자 한다. 용어 해석을 통해 관점을 다시 정리해볼 수 있기를…….

 

삼민주의(三民主義), 신삼민주의 : 손중산이 발표한 초기 중화민국 정치 강령으로, 민족주의(民族主義), 민권주의(民權主義), 민생주의(民生主義). 삼민주의는 건국 초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화민국 정치사상이며 중화인민공화국에도 영향을 줬다.

 

최초에 발표된 삼민주의와 손중산 사망 이전의 삼민주의,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각자 계승한 삼민주의에는 모두 특색이 있다. 변화되는 삼민주의에는 당시의 시대상과 각 파벌 노선이 반영된다.

 

1905년 초기의 삼민주의는 “구제달로(驅除韃虜, 만주족 축출), 회복중화(恢復中華), 창립민국(創立民國), 평균지권(平均地權, 토지 소유의 균등)”을 주장했다.

 

1919년 5.4 운동 무렵에는 반군벌, 반제국주의적 주장이 삼민주의의 민권주의 사상에 포함됐다.

 

1924년 중국국민당 전국대표대회의 경우에는 친소, 용공, 공농 지원의 내용을 지원했다. 원래의 삼민주의와 구별하기 위해 (공산 계열에서) 신삼민주의라고도 한다.

 

손중산의 사후, 삼민주의에 대한 좌파와 우파의 해석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는 국민당 계열과 공산당 계열 양측이 손중산의 삼민주의를 계승하면서도, 각자의 노선이 달라지면서 일어났다.

 

장개석은 삼민주의에서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부분을 배격하고 반공적 내용을 부여하는 보수적이며 유교적인 해석을 추구했다. 1931년 중화민국 헌법을 보면 민족주의는 오족공화론(五族共和論)으로 변화되고, 민권주의에는 직접적 민권이 부가됐으며, 민생주의에 자본 절제가 수용됐다.

 

민생주의에서 “경작지는 경작자가 토지를 소유한다”는 내용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수용됐다. 공산당의 모택동에 의해 신삼민주의(新三民主義)로 발전됐다. 2004년 후진타오 정부가 중국 헌법에 인권에 관한 사항을 첨가하였을 때 다시 제창했다.

 

 

신민주주의혁명(新民主主義革命) : 1840년부터 1949년까지 중국 자산계급혁명(근대 민주혁명)이라 통칭한다. 그중 1840년~1919년을 구 민주주의 혁명시기라고 칭한다.

 

이때의 모든 혁명은 모두 소자산계급 혹 자산계급이 이끌었다. 1919년~1949년을 신민주주의혁명시기라고 칭한다. 이때의 혁명은 무산계급과 그 정당이 이끌었다.

 

그렇다면 신, 구 민주주의혁명의 구별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표준은 지도계급이 누구인가, 권력을 누가 장악했는가에 있을 따름이다. 이처럼 신민주주의혁명을 무산계급이 이끈 것이라면 그 혁명은 응당 무산계급 사회주의혁명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다.

 

신민주주의혁명은 무산계급이 이끌고 인민 대중의 것으로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이다. 바로 신식의 특수한 자산계급 민주혁명이다. 간단하게 줄여 ‘민주혁명’이라 한다.

 

더 나아가 가장 광범위한 혁명통일전선을 건립한 것은 중국 혁명이 승리하는 기초가 됐다. 중국 신민주주의혁명의 대상은 지극히 잔혹하고 흉악한 계층이다. 그리고 무산계급과 지주 대자산계급 모두 전 인구의 소수에 불과했다.

 

가장 광범위한 인민은 농민, 도시 소자산계급, 그리고 기타 중간 계급이었다. 따라서 무산계급이 혁명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반드시 광범위한 중간 계급과 연합해야 했다.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 : 중국공산당을 줄여 중공이라 한다. 1921년 7월에 성립됐다. 1949년 10월부터 현재까지 노동자계급을 대표해 노동자 농민 연맹과 통일전선을 이끌면서 중국 대륙에서 인민 민주 전정을 실행하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유일한 집권당이다.

 

중국 노동자 계급의 선봉대, 중국 사회주의 사업의 영도 핵심, 중국 각 민족 인민의 이익의 대표자다.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 레닌주의, 모택동 사상, 등소평 이론, ‘3개 대표’ 중요 사상과 과학 발전관을 자신들의 행동 지침으로 하고 있고, 최후 목표는 공산주의사회제도를 실현하는데 있다.

 

통일전선(統一戰線) : (2015년 4월 30일,중공중앙정치국이 회의를 개최하고, 『중국공산당통일전선공작조례中國共産黨統一戰線工作條例(시행試行)』를 심의 통과시켰다. 이것이 중국공산당의 통일전선 공작과 관련한 제1 당내 법규다.)

 

통일전선은 광의로 말하면 다른 사회 정치역량(계급, 계층, 정당, 집단 내지 민족, 국가 등을 포괄)을 특정한 역사 조건아래서, 특정한 공동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공동 이익을 추구한다는 기초아래 구성된 정치 연맹이다. 간단하게 말해 통일전선은 특정한 사회 정치 역량의 연합이다.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 ‘중화(中華)’는 곧 중국(中國), 화하(華夏)의 뜻이다.

 

‘인민(人民)’은 정치개념이다. 적대적 관념이다. 당대 중국은 사회주의와 조국통일을 옹호하는 계급, 계층, 사회집단을 모두 인민의 범위에 넣고 있다. 인민은 전체 사회주의 노동자, 조국 통일을 옹호하는 애국자,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애국자를 가리킨다.

 

‘공화(共和)’는 영어 (republic, 라틴어 respublica)에서 왔다. 공화는 일반적으로 공동으로 권력을 향유하고 공동 치리(治理)한다는 의미를 포괄하고 있다. 단지 다른 나라, 다른 역사 시기에 공화의 권력 주체가 포함하는 범위가 달랐다.

 

현대적 의의에 있어 공화는 모든 공민이 국가 법률제정, 정책 제정과 집행에 참여하는 것을 강조한다. 직접참여와 간접참여를 포괄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공민 표결, 내의제 등이 그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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