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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회] 광해 임금이 오른 어등포 ... 수군방어소와 제주 방어시설

 

광해 임금의 제주 첫 기착지인 어등포는 제주 8개의 수군방어소 중 하나가 있었던 포구였다. 제주에서는 일찍부터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방어시설을 마련했다.

 

제주목·정의현·대정현에는 읍성을 쌓았고, 왜구의 피해가 잦은 화북과 조천 등지에 9진을 쌓아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왜구의 상륙이 예상되는 화북포·조천포·어등포·열운포·서귀포·모슬포·애월포·명월포에는 수군방호소를 설치하여 군대를 주둔시켰다.

 

수군방호소에는 전선 1척, 격군, 사표, 식량 3석을 비치하여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전선과 수군은 1664년(현종 5년)에 제주목사 이익한이 ‘제주는 풍랑이 심해 배를 관리하고 운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백성의 고통이 크다.’라고 건의함에 따라 수군을 없애고 배를 징발하지 않게 되었다.

 

왜구를 감시하고 위급 상황을 알리기 위해 해안가에는 38 개소의 연대를, 고지대에는 오름을 이용하여 25개소의 봉수대를 두었다. 봉수대에는 별장과 망지기, 연대에는 별장과 보초병이 배치되어 왜선을 감사하였다.

 

통신수단으로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했는데, 평시에는 1번, 적이 나타나면 2번, 경계에 접근하면 3번, 경계를 넘어 침입하면 4번, 전투가 벌어지면 5번으로 나누어 왜구 의 침입 상황을 알렸다. 제주 전역이 촘촘한 그물망처럼 읍성과 연대·봉수대와 진성과 수군방호소로 정비되어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지닌 어등포에는 제주의 역사문화의 원류처럼 볼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넘친다. 이러한 마을이 내 고향의 모습이다. 고향을 생각하면 나는 아련한 어린 시절로 돌아가 평온한 마음을 얻는다. 고향방문이 내게는 힐링의 시간이다.

 

제주시에서 월정리 버스 정류소를 지나, 구좌중앙초등학교로 가기 전 나타나는 고향 마을로 들어서는 어귀에는 杏源이라 새겨진 커다란 표지석이 서있다. 다음은 우리 마을을 소개한 글로 표지석 하단에 있는 필자가 작성한 내용이다.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30여 km 지점에 위치한 행원리에는 풍력발전단지·환해장성·육상양식단지·농공단지 등 볼거리로 넘친다. 전설 깃든 연대봉(煙臺峯)이 마을을 감싸듯 동서로 뻗어있고, 지근 거리에 조성된 4·3추모탑은 보는 이의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환상의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만나는 풍차들은 친환경 에너지를 생산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환해장성(環海長城)은 제주도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광해 임금의 유배를 제주섬에서 최초로 지켜본 역사의 증인들도 어등개(浦) 사람들이다. 우리 마을 옛 이름인 어등포(魚登浦)는 고기들이 바람에 밀려 포구로 들어온 데서, 어등포(御登浦)는 광해 임금이 강화도에서 우리 마을 포구를 통해 제주섬에 도착한 데서 유래한다.

 

구좌읍지(1979)에 의하면 1550년경 김해 김씨가 속칭 듬뱅이물에 최초 입주한 후 문.이.고(文·李·高)씨가 이주하여 마을이름을 어등포라 지었고, 1887년 행정구역 확장시 살구꽃이 지천에 피어 있는 마을이란 의미로 행원리(杏源里)로 개칭하였다.

 

연대봉 동쪽에서 바닷가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는 야트막한 돌무더기(머들)들 사이사이 살구 나무가 군락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우리 마을은 땅이 척박한 대신 포구가 발달되었기에, 이증(李增)은 제주섬 답사글인 남사일록(南 槎日錄)에 어등포구에는 큰 배와 상선을 댈 수 있다고 적었고, 이 형상은 탐라록(耽羅錄)에 어등포의 저녁 모습인 어등만범(魚登晩 帆)을 제주팔경 중 하나라고 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민가와 도갓집에서 행정이 이뤄졌던 구좌읍사무소의 발상지 역시 행원리이다. 그 뒤 한동리와 평대리를 걸쳐 4·3사건 이후 세화리로 옮겨 졌다고 한다. 살구꽃 피고 마음꽃 피는 아름다운 마을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제주를 찾는 이들에게 안내하기 위해 오늘 우리는 마을 어귀에 표석을 다시 세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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