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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회] 조합장.반장 학살, 곱은재우영 학살 사건 ... 후손들이 잊지 말아야 할 아픔

4·3 광풍은 우리 마을에도 휘몰아쳤다. 나의 할아버지와 셋아버지도 허무하게 삶을 마감해야 했다. 고향집 한쪽에 굴을 파 조부와 함께 숨었던 5촌 당숙은 당시의 사연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호루라기를 불며 나타난 경찰은 산사람이 피신한 집이라 여긴 곳에 불을 질러댔다. 아침밥을 짓던 우리가문 장손댁은 얼른 방으로 가 어린 아들을 등 뒤에 숨기고 있다가, 경찰이 쏜 총에 비명횡사하였고, 이불속에 숨었던 아들은 지금 80이 넘은 나이가 되었다.

 

당시 장손 집에 있던 팽나무 거목이 불에 타 주인과 명을 다했다. 훗날 그 자 리에 새싹이 나와 종손댁의 보호수가 되어, 당시를 무언으로 증언하고 있다.

 

팽나무 후손목은 나이가 70에 접어들고 있는 셈이다. 나의 조부 일행이 들은 호루라기 소리는 학살 광풍의 전주곡이었을까. 이후 우리 마을에는 11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일명 ‘조합장·반장 학살 사건과 곱은재우영 학살 사건’ 등이 벌어져 공포의 나날로 이어졌다.

 

1948년 11월 토벌군인들에 의해 우리 마을의 반장과 가신 이들을 잊지 않기 위해 마을 단위에서는 처음으로 주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4·3위령탑이 우리 마을 외곽지에 건립되었다.

 

여기에는 제외하여 마을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간 조합장·반장 사건과 곱은재우영 사건의 아픔을 기록하고 있다. 엄청난 집단학살을 겪으며 4·3으로 인해 돌아가신 수많은 영령을 위무하는 추모비가 1998년 마을 주민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것이다.

 

① 반장·조합장 학살 사건

 

1948년 11월 19일 오전 9시경, 제9연대 12중대 군인들이 우리 마을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마을에 들어오자마자 공포를 쏘며 주민들을 공회당으로 모이도록 했다. 주민들 중 일부는 돼지우리나 소꼴 더미에 피신하기도 하였다.

 

주민들이 공회당 앞에 모이자 군 지휘관이 '한동리 경찰관 모친 피살사건에 이 마을 청년들이 포함돼 있었으며, 이 마을에서 산사람들에게 협조하고 있다.'라며 마을 청년 수명과 반장과 조합장 등을 앞으로 나오라 했다.

 

그리고 곧바로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했다. 토벌 군인들은 마을 주민들에게 만 세삼창까지 강요하는 등 반인륜적인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이북 사투리를 쓰는 서북청년단들이 주축이 된 군인들은 약 세 시간동안 마을을 휘저어 다니며 숨어있던 주민에게도 총격을 가했다.

 

이날 희생된 행원리 마을 주민들은 강원현 등 28명이다. 학살 현장인 옛 공회당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며, 그 자리에는 마을회관이 들어서 있다.

 

② 곱은재우영 학살 사건

 

전국적으로 알려진 월정리 바닷가 근처에 있는 ‘곱은재우영’은 밭 모양이 기역자로 굽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반장·조합장 사건이 벌어진 이후 행원리 주민들은 공포 속에서도 마을을 경비하는 등 토벌대의 지시에 따라야 했고, 일부 젊은 청년들은 도피입산 하기도 했다.

 

반장·조합장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1948년 12월 13일, 이웃마을 월정리에 주둔하던 서청(서북청년) 특별중대가 들이닥쳐 주민들을 곱은재우영에서 학살했다.

 

이날의 학살사건은 주민들이 마을 남쪽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연대봉 아래쪽으로 성을 쌓으며 보초를 서던 중, 추위를 이기기 위해 불을 지핀 것을 봉화 신호라는 이유를 달아 자행한 것이었다.

 

전날밤 산사람들이 대(竹)삐라를 뿌리며 토벌대를 자극한데 대한 보복 성격도 짙었다. 강태일 등 20여 명이 죽어야하는 이유도 모른 채 총살을 당하고 말았다.

 

또 1949년 1월 18일에도 토벌대는 행원리는 빨갱이 소굴이라며 고득보 등 4명을 곱은재우영에서 학살했다. 기역자 모양의 밭은 그대로이나 당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후손들이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공회당과 곱은재우영 등지의 학살터에 그 흔한 표지판 하나 없음이 안타깝다. 후손된 내가 먼저 나서서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아닌 가 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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