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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96)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조보 : 국민당 군대 내에 ‘정공'(政工, 정치공작) 부서는 아무런 역할을 못했는가?

 

고화 : 국민당 군대 중에 정치부는 줄곧 군사 주관아래의 막료 기구였다. 1944년 6월에 내전이 발발했을 때 미국의 압력을 받아 국민당은 미군체제를 배워 처음으로 군에서 당부를 철퇴하고 군위회(軍委會) 정치부를 공보국으로 고쳤으며 그 외에 국방부 감찰국과 민사국을 뒀다. 정치부 직능을 세 분야로 나눈 것이다. 당부가 군대에서 퇴출된 후 정공 인원은 군대에서 지위가 높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엉터리 약을 파는 곳’이라 보면서 군대 내부에서는 더더욱 응집력이 없었다. 왕정균(王鼎鈞)의 회고에 따르면, 내전 후기 국군 관병들이 국군 실패를 논할 때 다른 사람의 일을 얘기하듯 했다고 한다. “타인의 불행을 즐긴다”고나 할까. 모두 해방군의 포로가 될 때까지 그런 태도를 가졌다고 했다.

 

국군의 외형은 강대하게 보였으나 내부는 실로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해방군에게 기회로 작용했다. 1945년 10월 25일, 중공 중앙 서기처는 「국군 공작부 성립에 관한 지시」를 보내 각 중앙국과 분국, 군위와 대군구와 야전군, 각 종대와 사단, 여단, 연대 정치부 및 군 분구 정치부 모두 국군 공작(工作) 기구를 세워 국군과 관계를 맺고 있는 간부를 선발해 훈련을 거친 후 국군 내부로 잠입하도록 하달했다.

 

국군과 친구를 맺고 여러 경로를 이용해 제1선의 국군과 국민당에 편입된 위군(僞軍)에 대해 모반을 선동하고 그들이 전장에서 봉기할 수 있게 책동하도록 했다. 이후에 벌어진 사실을 보면 그 책략은 완벽하게 선공했다.

 

내전 후기, 특히 해방군이 장강을 넘은 후, 국군은 아니나 다를까 밀물처럼 봉기하거나 대대적으로 투항했다. 많은 기간, 해방군은 거의 전쟁을 치를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군군을 받아들여 재편성하면 됐었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

 

조보 : 교수님이 방금 웅향휘(熊向暉)를 말한 적이 있는데, 국민당이 정보 분야의 실패가 전쟁보다 못지않다고 보입니다.

 

고화 : 40년대 후기 내전 상황에서 국민당의 정보 실패는 전장의 승부를 결정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8년 건국 후 정보 공작 업무를 책임 맡았던 양상곤(楊尚昆)이 이극농(李克農)을 기념하는 글에서 말한 적이 있다. “해방군이 전국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우리 정보 공작 인원은 국민당의 기밀 결정 지휘기구 내에 잠입해 시기적절하고 정확하게 당 중앙과 군사위, 그리고 각 지구에 전략과 추세에 관한 중요한 군사 정보를 제공했다. 당 중앙과 모 주석이 전반적인 전세를 연구한 후 해방 전쟁의 전략 방침을 제정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됐다. 우리 군이 해방전쟁 중 적들의 주요 정보를 제 손금을 보듯 훤하게 알고 있어 시종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중일전쟁 이전 국민당 반공정책의 환경에서 ‘비법'(非法) 상태에 처했던 중공이 국민당 당, 정, 군 계통에 대규모로 침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장비(錢壯飛) 등은 다른 사례다. 그 이후, 그와 유사하게 성공한 사례는 많지 않았다.

 

중공 정보 공작이 전면적인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다. 국공합작으로 인해 중공의 정보 공작에 대단히 넓은 활동 공간을 마련해 줬다.

 

1938~1939년, 중공이 국민당에 대대적으로 침투하는 시기였다. 주은래, 동필무(董必武), 섭검영(葉劍英), 이극농 등의 조종과 포석아래 장로평(張露苹), 웅향휘(熊向暉), 왕초북(王超北), 심안나(沈安娜)……등 많은 정보요원들이 국민당 당, 정, 군 계통으로 투입돼 장기간 잠복했다.

 

중공은 또한 되돌아오고 싶어 하는 탈당했었던 인물들과 이전에 ‘전변'(轉變)했던 인원들에게 사상과 감정 감화 활동을 진행했다. 그들로 하여금 다시 중공을 위해 정보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당원 명부는 주지 않았다.

 

1948년 중공 서안 정보처에서 지시가 내려왔다. “정보 공작을 전개하기 위해 반드시 대담하게 각계의 인사들을 포섭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기존 방침이다. 당신이 일하는 곳의 간부 중에서 당을 이탈했었거나 당을 배반했었거나 혹은 특무이거나를 막론하고 그가 우리 당을 위해 일하기를 원하기만 하면 모두 이용하라.”

 

조보 : 1938년 이후 어찌해서 많은 사람들이 중공을 위해 일한 것인가? 명리를 위한 것을 분명 아닐 텐데.

 

고화 : 중공의 항일 형상이 중국 전체에 알려지게 된 것은 ‘평형관전역'(平型關戰役, 중일전쟁 시기 중원으로 들어오려 일본군과 ‘평형관’에서 벌인 전투를 말한다. 중국 군대가 화북 전장에서 주동적으로 적을 맞아 전멸시키는 첫 번째 승전으로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신화’를 깨뜨린 전투다. 그 전투로 중국 국민들에게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게 됐고 공산당과 팔로군의 명망을 높였다)의 영향이 대단히 컸다. 그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중공 팔로군을 높이 평가했다. 중공은 첨렴결백하고 분투한다는 인상이 있었으나 국민당은 관료주의적 색채가 농후했고 항전시기 이후 부패가 만연해 많은 사람들이 중공을 높이 평가했다 ; 중공은 민주적 형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신민주주의로 소련식 색채를 벗었다. 반면 국민당은 “하나의 주의, 한 개의 당, 한 명의 영수”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가졌다. 중공은 오히려 매력 있다고 인식됐다 ; 중공은 평민적 인상이 있었다. 근거지에서 사회개력을 실시하여 명망을 얻으면서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저층 민중에 대해 동정하고 배려하는 정서를 만족시켰다.

 

조보 : 장개석 곁에도 ‘스파이’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고화 : 그랬다. 남경 전신국에 ‘군화전용대'(軍話專用臺)가 있었는데 전문적으로 총통부, 국방부 등 중요 부서에 전화를 돌려줬다. 모두 9명이 업무를 담당했다. 그중 7명이 중공 지하당원이었다. 장개석은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않았다.” 반면 모택동은 “고도의 경계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풍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런 장개석의 특성을 주은래와 동필무가 확실히 인지했다. 특히 그와 그가 중용한 부하 호종남 등에게 자로 재어 몸에 딱 맞게 한 듯한 꼭 맞는 정보공작원을 그들에게 붙였다. 국민당 정치국에서 여려 차례 보고를 했지만 장개석과 호종남은 자신들이 신임한 인물들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중 참모차장 류비(劉斐)가 중요한 예이다.

 

오랜 기간 장개석의 의관(醫官)을 지낸 웅환(熊丸)이 토로한 적이 있다. “당시 총통의 황포로 관저에 지도실(地圖室)을 만들었는데, 지도실에는 3대 거두인 총통, 주국촌(周菊村), 류비(위장, 爲章)가 남경에서 ‘서방회전'[徐蚌會戰, 서주(徐州), 방부(蚌埠)에서 치른 전투. 공산당이 ‘회해해역'(淮海戰役)이라 부르는 전투를 국민당이 사용한 용어]을 지휘했다. ……그때 모두가 장개석이 내리는 명령을 어떻게 공산당이 다 알고 있었을까 희한하게 생각했다. ……나중에 모든 사람들이 류위장을 의심했지만 장개석은 듣지 않았다. 그러자 아무도 감히 직접적으로 장개석에게 알리지 못했다. 최후에 그 사실이 증명됐을 때까지 장개석은 아무런 의심도 갖지 않았다.”

 

대만으로 철군한 후 진성(陳誠)은 대단히 후회했다. 그는 원래 설악(薛岳)으로 하여금 서주(徐州) 방면을 맡도록 장개석과 상의 후 결정했는데 류비가 “이간질하여 사람을 바꿨다”고 했다.

 

류비는 건국 후 전국 정협 부주석을 역임했다. 곽여괴(郭汝瑰)의 말에 따르면, 그는 처음에는 류비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했다. 류비가 무슨 건의만하면 곽여괴는 꼭 반대했었다고 한다. 나중에 공산당 조직에서 곽여괴에게 사람을 보내 류비와 좋은 관계를 맺으라고 하면서 적에게 이용당하지 않도록 유념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그제야 류비가 공산당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바로 류비와 같은 인물들이 국민당 핵심 내부에 잠입해 있으면서 공산당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다. 장기간 국민당 군대 내에 잠입해 활동했던 인물들로는 한련성(韓煉成), 하기풍(何基沣), 장극협(張克俠), 요운주(廖運周) 등이 있었다. 모두 군대를 지휘하는 주요 장교들이었다.

 

그들이 해방군과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고 있다가 중요한 시기가 도래했을 때 진두지휘해 봉기하기도 했고 국군을 해방군 포위망 속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인데, 장개석이 어떻게 패배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조보 : 대만으로 철수한 후 장개석은 국민당의 실패에 대해 어떻게 회고하고 있나?

 

고화 : 중화민국이 망할 때가 되자 사람들의 마음이 해이해졌다.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당시 장개석은 모택동을 원망하지 않았다. 첫째 미국을 원망했고, 둘째 ‘계리'[桂李, 계림(桂林)파 이종인(李宗仁)]를 원망했다. 장개석은 미국을 향해 수수방관하면서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다고 책망했다. 1949년 1월 31일 장개석의 일기에 따르면, 당시 공비토벌 혁명의 실패는 공산당에게 실패한 것이 아니라 소련 스탈린에게 패한 것이며 ; 더 나아가 소련 스탈린에게 패한 것이 아니고 미국의 마셜(Marshal)에게 패했다고 했다. “미국은 후회 막급할 것이다. 마셜은 반드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장개석은 자기도 속이고 남도 속이듯이 자신이 강압에 의해 하야하지 않았다면 공산당이 승리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1949년 5월 「상월반성(上月反省)」에서 “이종인이 기회를 틈타 사리사욕을 취하고 정권을 탈취했으며 염치없이 뻔뻔하며 배은망덕하다(계리투기취교,쟁권탈리,과렴선치,망은부의(桂李投機取巧,爭權奪利,寡廉鮮耻,忘恩負義)”라고 욕을 해댔다.

 

물론 장개석도 자신이 과실이 어디에 있었는지 자세히 알고는 있었다. 1949년 2월 1일, 고향 계구(溪口)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20년 동안 정치를 하면서 사회 개조와 민중 복리를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다. 당정 군사교육을 맡은 인원도 삼민주의 실행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이후 모든 교육에 민생을 기초로 해야 하리라. 양을 잃은 후에라도 서둘러 울타리를 수리하면 그래도 늦은 편은 아니리니.”

 

그해 연말, 장개석은 대북(臺北) 초산(草山)의 혁명실천연구원에서 국민당 군대가 실패한 원인을 총결했다. “우리의 이번 실패는 공비에 의해 쓰러진 것이 결코 아니다. 실제는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쓰러뜨린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군대”는 “주의(사상)가 없었고 기율, 조직, 훈련, 영혼, 근본이 없는 군대”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군인”은 “신앙이 없었고, 염치, 책임, 지식, 생명, 기질이 없는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1949년 마지막 날, 장개석은 일기 중에 반성했다. “1년의 비극과 참상은 차마 반성하지도 못하겠고 감히 되돌아보지도 못하겠다.” 절통하고 늦은 후회는? “군인 중에서 작전에 참여해 전사한 자가 10분의 2요, 기회를 틈타 투항한 자가 10분의 2요, 전투를 피해 도망쳐 사라진 자가 10분의 5요, 대만으로 옮겨와 각 섬에서 훈련하며 남아 있는 자가 10분의 1일 따름이다.” 바로 이것이었다.

 

조보 : 영수인 장개석이 국민당의 실패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고화 : 장개석은 ‘당국'(黨國)의 중심이었다. 한 사람이 당, 정, 군을 이끌었다. 국민당의 군사상 실패한 것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장개석은 과도기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가 주로 활동했던 연대는 20세기로 그의 언행에 현대적 색채를 약간은 가지고 있지만 역시 수신제가(修身齊家)라는 송명유학의 전통사상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장개석은 여전히 서양의 ‘과학방법’과 중국의 전통사상을 결합시키려고 했다. 심지어 “쇠귀에 경 읽기”식으로 그의 세속화된 문무관원들에게 “반드시 철학과 수양 기초를 가지고 있으면서 성현을 목표로 하고 영웅의 기백으로 성현의 종지를 실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교육함에 있어 군사교육은 마땅히 ‘육예'[六藝, 중국 전통 교육과목,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 등 6종류]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사상은 황포군관학교에서부터 중경시기까지, 그리고 혁명 실패 후 대만으로 철군해서도 바꾸지 않았다.

 

1949년 8월 15일, 국민당 정권이 치명적인 재난에 봉작했을 때에도 장개석은 일기에서 자신의 관점을 피력했다. “자강 자립은 흥학(興學, 교육 진흥), 양렴(養廉, 청렴결백한 품격을 배양)보다 급하지 않다. 흥학의 핵심은 궁리치지(窮理致知), 실천독행(實踐篤行)에 있으며 양렴에서 먼저 힘써야 할 것은 절약근검(節約勤儉), 돈후소박(敦厚素朴)에 있음이며 ; 낭비를 경계하고 소비를 제거하고 ; 예의를 밝히며 염치를 중히 해야 한다.” 이러니 어찌 현실에 맞는다고 할 것인가.

 

힘을 중시여기고 지모를 추구하는 당시 중국의 현실에서 장개석의 사상은 낙후됐다고 할 밖에. 장개석의 군사학인 ‘육예’는 잘못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개변시켜 낡은 장개석을 타도하자”,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자”고 외치는 해방군에 어떻게 저항할 것이며 소멸시킬 수 있었겠는가?

 

 

일기를 보면 장개석은 1949년 눈사태처럼 밀려오는 해방군의 물결 속에 파묻힐 상황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했다.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각지로 돌아다니며 자신의 부하들을 독려했다. 그가 스스로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더라도 해야 한다. 나는 더더욱 그래야 한다”고 했던 것처럼. 당과 국가를 구하려는 그의 행동, 결국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노력했다.

 

그러나 국민당은 이미 세속화된 당이었다. 국민당 정권도 세속화된 정권이었다. 그의 군대는 더더욱 세속화돼 있었다. 당시 조건아래서 장개석은, 일반인 수준을 벗어났고 이상주의적 색채가 강한 중공과 해방군을 이겨낼 수 없었다. 국군의 실패는 피할 수 없었다.

 

장개석의 모든 노력과 고난은 허탕이 됐다. 대륙 강산은 주인이 바뀌었다. 어쩔 수 없이 대만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역사의 총부리는 다른 쪽을 선택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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