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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99)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셋째, 의견 분화로 ‘서안사변’ 후 장개석을 남경으로 호송했다.

 

중원 대전 몇 개월 후, ‘통일 촉진’, ‘중앙 옹호’로 개세의 공로를 세운 장학량은 결의형제인 장개석의 모든 것을 듣고 따랐다.

 

그때, 일본군은 동북지방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위협 정도가 나날이 강해져 갔다. 그런데 장개석은 풍옥상 등 지방 군벌의 위협을 제거한 후 전력으로 남방 중공 홍군에 대처하고 있었다.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내부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국책(國策)’을 충실히 실행했다.

 

장학량의 부친인 장작림은 일본군에 의해 폭사했다. 국가를 책임지고 있으면서 집안의 원한을 품고 있던 장학량은 원래부터 일본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실행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장개석에서 “일본의 침략 정책을 직접적으로 저항하는 등의 요구”를 제시했으나 장개석은 비준하지 않고 일본과의 담판을 주장했다. 『고유균(顧維鈞)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위원장은 현실주의적인 정치가다. 그는 반드시 일본과 담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개석은 일본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중앙정부는 적극적인 저항을 주장하는 장학량의 출병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9.18사건’ 터지고 동북지방이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장학량과 화북에 남아있던 10만 동북군은 그저 망연자실 고향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1933년 화북지역의 승덕(承德)이 일본군에게 넘어가고 열하(熱河)의 항전이 실패하자 장학량은 장개석을 대신해 잘못을 뒤집어쓰고 사직했다. 그리고 출국해 버린다.

 

1년 후, 귀국한 장학량은 예악환(豫鄂皖, 하남, 호북, 안휘) 3성의 ‘초총'(剿總, 초비총사령부) 부사령관과 서북 ‘초총’ 부사령관에 임명돼 총사령관 등 직책을 대행하면서 중공 홍군과 전투를 시작했지만 연전연패한다. 장개석은 그의 군대의 손실을 보충해주지도 않았다. 차도살인이 분명했다. 직계가 아닌 부대를 정리하려는 속셈이었다.

 

장학량의 사상이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장개석에게 간언하며 내전을 끝내고 함께 항일에 힘쓰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거절당했다. 그렇게 두 사이에 틈이 생겼고 만나기만 하면 언쟁을 벌였다.

 

1936년 12월 12일, 장개석에게 시위 학생들에게 총을 쏘지 말 것을 간곡히 부탁했으나 호되게 야단만 맞은 장학량은 화가 난 상태에서 ‘병간'[兵諫, 신하가 무력(武力)을 사용해 임금을 위협하고 간(諫)한다는 뜻으로 무력으로 압력을 가함]하기로 결정해 버린다. 서북군 장교 향호성(楊虎城)과 함께 독전을 위해 서안으로 온 장개석과 그 수행원들을 생포해 연금시킨다. 이것이 ‘서안사변’이다. 세상을 놀래게 만들었음은 자명하다.

 

다년간 군정계를 질타했던 장개석이 처음으로 영어의 몸이 돼 목숨이 경각에 달린 신세가 됐다. 생사의 결정은 장학량의 손에 달려 있었다. 100만 군사를 이끌고 있는 일국의 원수가 “어찌하겠는가 소리만 지르는 신세”가 돼 버린 것이다.

 

장학량은 본래 많은 사람들이 없애버리면 시원하겠다고 여기는 장개석을 죽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항일전선으로 총부리를 돌리기 위한 것일 따름이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대포와 같다고 얘기했다. 잠시 창고에 두고 잘 닦고 손질하면 더더욱 빛을 내게 되는 것처럼 장개석도 더더욱 빛을 발할 것이라고. 그리고 그는 또 강조했다. 자신과 장개석이 다른 것으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방법에 대한 것이라고. 장개석은 “내부를 안정시키고 외적을 물리치자”고 하는 반면, 자신은 “외적을 물리치고 내부를 안정시키자”고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오래지 않아, 중공까지 참여한 각 진영의 협상아래 장학량은 장개석을 석방하기로 결정한다. 장개석이 여전히 협정서에 서명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동북군과 서북군의 간부와 중공이 극렬히 반대하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자신이 직접 장개석을 남경으로 돌려보냈다. 장학량은 그 이유를 이미 진흙으로 만든 보살(장개석)이 쓰러졌으니 그저 다시 일으켜 세울 뿐이라고 했다.

 

장학량의 바람은 간단했다. 서안사변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지위나 이익과 관련된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자신은 권력을 가졌었고 부귀를 누렸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치 않다. 그렇기에 장개석도 자신을 용서할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난 1990년, 그는 여전히 회고하면서 말했다. “나는 과거에 여러 번 얘기했다. 나는 군인이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내가 남경으로 간 것은 사죄하기 위해서였다. 그 사죄에는 총살당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떠날 때 내 집을 내 학생에게 넘겼다. 그는 군단장이다. 부친은 나를 군인으로 교육했다. 군인이 된 후 나는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돼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나는 내전을 지극히 혐오했다.”

 

 

장개석은 가까스로 지옥문을 넘어 안전하게 남경으로 돌아갔다. 원흉은 장학량이지만 아무 탈 없이 무사히 제자리로 돌아가게 한 것도 장학량이었다. 장학량은 장개석이 다시 태어나게 하는데 큰 은혜를 베풀었다고 할 수 있다.

 

생각해 보자. 승리하면 왕이 되고 패하면 도적이 되는 일이 성행하는 곳이 군정계가 아니던가. 장학량은 마음이 어질고 손길이 물러 그런 것이 아니었다. 결의를 맺은 형제로써의 개인적 정을 고려한 것도 아니었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장개석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었다.

 

중국의 역사를 새로 쓰고 국민당 내외의 장개석에 대한 원한을 해결하고 그를 대신해 원수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몇 십 년 전제하면서 인생을 화려하게 마감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장학량은 그리 하지 않았다.

 

장학량이 세 번이나 태산 같은 은혜를 베풀었지만 장개석은 남경으로 돌아가자마자 장학량을 구류해 하옥시킨다. 다만 다른 정적들을 대한 것과는 달리 평생을 가둬놓고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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