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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01)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유소기(劉少奇, 1898~1969), 호남성 영향현(寧鄉縣) 사람으로 중국공산당원이자 혁명가, 정치가, 이론가이다. 1920년에 중국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하고 다음 해에 소련 모스크바 동방공산주의노동대학(東方共產主義勞動大學)에서 학습한 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귀국 후 1925년에 제2차 전국노동대회에서 전국총공회(全國總工會)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927년에 중공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었다. 1931년에 정치국후보윈원(政治局候補委員) 중국중앙직공부(中共中央職工部) 부장, 전국총공회당단(全國總工會黨團) 서기 등을 지냈다.

 

1943년에 중공중앙서기처 서기와 중앙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이 되었다. 중공 성립 후에 중앙인민정부 부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국방위원회 주석 등을 지냈다. 저서로 『유소기선집劉少奇選集』이 있다.

 

중국학자들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유소기는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이고 중화인민공화국 개국 원훈이며 모택동(毛澤東) 동지가 중심인 공산당의 제1대 중앙 지도자 그룹의 중요한 구성원이다. 그렇다면 일찍이 전우였던 모택동은 왜 유소기를 죽였을까?

 

이전에 팽진(彭眞)과 양상곤(楊尚昆)이 유소기의 아들 유원(劉源)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모 주석이 왜 ‘문화대혁명’을 일으켰을까? 어째서 자네 부친을 무너뜨렸는가?” 정말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일이 아닌가! 이 질문은 바로 유원이 모택동, 유소기와 함께 전장을 누볐던 전우인 당사자들에게 묻고 싶었던 것이 아니던가. 그러면서도 감히 입 밖으로 내놓지도 못했었던 질문이기도 하였고.

 

사실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해답을 찾고자 하는 문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반복해 자문하였던 문제이기도 하다. 천고의 의문부호다.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문화대혁명’의 원인을 확실히 알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모택동과 유소기가 협력하고 서로 같은 분야에서 공동으로 힘을 합쳤다는 것은 많이 알려져 있다. 여기서 답을 구하고자 하는 것은 모택동과 유소기가 어떻게 분열됐으며 많은 노혁명가들이 무슨 까닭에 쓰러져 갔느냐 하는 문제다.

 

모택동은 왜 전 인민을 동원해 ‘천하대란’을 일으켰으며 자신이 건설한 ‘구세계’를 짓이겨 버렸는가? 분명한 것은 모택동과 유소기, 여러 노혁명가, 그리고 ‘구세계’와의 견해 차이와 갈등을 확실하게 규명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그 사실을 회피하거나 감춰버리면 동기가 아무리 아름답고 선하다하여도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문혁’이 처음 시작할 때 모택동은 「내 대자보」에서 명확하게 지적하였다. “1962년의 우경(右傾)과, 1964년의 형식은 좌(左)이지만 실제로는 우(右)”를 연상시켜 보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얼마 없어 또 유소기를 타도하여야 한다고 담백하게 말했다.

 

이 문장은 1962년으로 돌아가서 고찰해봐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정치학자들이 무의식적이나 의식적으로 탐구하지 않으려고 하는, 심지어 당시 사람들조차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는 ‘사청운동(四清運動)’의 처음과 끝을 고찰하고 모택동과 유소기의 갈등의 원인을 찾아보면서 천양지차의 사상의 분기점을 탐득하여야 한다.

 

원류를 찾아보면 ‘신민주주의제도(新民主主義制度)’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행동과 목적이 상반되었던 두 갈래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이념을 개괄해낼 수 있다.

 

그 차이가 바로 모택동이 책망하였던 “둘 갈래 노선(兩條路線)”이 아닌가? 모택동이 강조하였던 ‘노선투쟁(路線鬪爭)’이란 말과 부합되지 않는가? 논쟁할 필요도 없이 “결코 양보할 수 없는(從不讓步)” “원칙의 문제”(모택동 말)로 모택동은 유소기와 반수 이상의 노혁명가들을 타도할 결심을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생전에 퇴위를 강요당하여 “향응하는 자가 얼마 되지 않는데”,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겠는가?”(모택동 말) 탄식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저 겉으로 보기에 모택동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사령부를 포격하라(炮打司令部)”고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사와 실천은 암흑의 10년 동안 옳고 그름이 전도되어 버렸음이니.

 

‘문화대혁명’의 기원을 찾아보고 일의 전후 관계를 찾아보자.

 

60년대 초 중국은 광범위한 사회주의 교육운동이 전개되었다. 통칭 ‘사청(四淸)운동’이라고 한다. 명실상부한 군중 자아교육 위주의 운동이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으나 정치개혁의 귀중한 실험이었고 같은 시기에 성공한 경제개혁의 실험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특히 유소기가 중국 민주 과정에서 애쓰면서 후세를 일깨워준 행동은 역사에 빛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종착점, 의혹과 중대한 과제 등이 해답을 기다리고 있다. 모택동과 유소기의 운동지도사상의 차이가 그들이 어긋나는 근원이었다.

 

1962년 7월 상순 어느 날 오후, 햇빛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중남해(中南海) 수영장에서 모택동은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유소기가 잰걸음으로 다가가 모택동에게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유소기를 보고 모택동이 수영장 안에서 캐물었다. “뭐가 그리 급해요? 전열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뭐 땜에 지탱하지 못하는 건가요?”

 

유소기는 놀랐다. 말 건네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탈의실에 앉아 기다렸다. 모택동이 건너와 앞에 앉아서야 말을 건넸다. “진운(陳雲), 전가영(田家英)이 당 내부에서 의견을 말하고 있소. 조직 원칙을 위반하지는 않고. 그들이 당신과 얘기 나눌 방법을 찾고 있소. 분명하오.” 모택동이 말했다. “조직 원칙이 없이 말을 할게 무엇인가! 그들이 당신을 찾아갔잖소. 등자회(鄧子恢)가 그리도 오랫동안 떠들었는데. 서루회의(西樓會議) 때 암흑천지라 했잖소. 뭐가 급하오?”

 

 

쌍방은 분명 감정이 북받쳐 있었다. 모택동은 오랫동안 쌓아둔 불만을 털어놨다. 유소기도 하고 싶은 말을 서슴없이 뱉어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역사는 당신과 내가 했다고 쓸 것이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다고 기록할 것이라고!” 모택동이 말했다.

 

“삼면홍기(三面紅旗 : 사회주의건설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도 깎아 내리고. 땅도 나누어 줬고. 그래도 안정을 못시켜?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유소기는 냉정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대체적으로 삼면홍기도 꺾이지 않았고, 인민공사도 해산하지 않았으며 공용식당도 열지 않았다는 등등의 말이었다.

 

모택동도 평정을 되찾았다. 경제 조정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하였다. ‘문혁’ 초기 유원(劉源)이 아버지에게 모택동이 대자보에서 “1962년의 우경과 1964년의 형식은 좌이나 실제는 우인 잘못된 경향”이라 비판했는데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을 때 유소기는 이 1막이 그 시작이었다고 대답하였다.

 

‘대약진(大躍進)’운동과 곧바로 이어진 반우경(反右傾) 운동은 중국 전체를 혼란으로 밀어 넣었다. 수많은 인가가 초췌해졌고 많은 촌락이 스산하게 변해버렸다. 경제는 파국으로 내달았다. 인민은 기아에 허덕였다. 천만 목숨이 대가를 치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칠천인대회(七千人大會)’에서 당의 사상은 통일했으나 영수들의 사상은 일치시키지 못했다. 어떻게 난관을 극복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공통된 인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회가 끝나자마자 모택동은 무한(武漢)으로 떠나버렸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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