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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회] 할머니의 일생 ... 살아남은 자식을 위해 모진 목숨 다하는 날까지 숙명

할머니는 100여 년 가까운 세월을 이승과 저승 드나들 듯 살다 가셨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제주의 크고 작은 민란들이 준비되던 1898년에 태어난 할머니는, 제주도 수난사의 축소판처럼 그렇게 사셨다.

 

두 살 아래인 할아버지와 열네 살에 결혼한 할머니는 국권 뺏긴 조국의 이지러진 역사처럼 모진 삶을 이어가야 했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으나 큰고모와 큰아버지를 대동아전쟁에 잃었고, 할아버지와 둘째아버지도 ‘4·3’사건에 뺏겨야만 했다.

 

당시의 삶이 그러했을 텐데 누가 가족 잃은 할머니의 상실감과 허망함을 위로라도 했겠는가. 그럼에도 살아남은 자식들을 위해 아픔을 삭이며 살아온 지난 세월, 할머니는 험난한 세월의 산등성이를 넘고 또 넘어야 했다.

 

길손이 먹장구름 속을 뚫고 나온 햇살을 반기듯, 할머니는 장손인 나의 탄생에 환호했고, 늦게나마 찾아준 삶의 위안에 기쁜 눈물 흘렸으리라. 젖이 갖 떼인 나를 품안에 재웠고, 휘어진 등에 업고선 자랑스럽게 동네를 돌아다녔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나는 할머니 젖가슴을 만지며 잠을 청하곤 했다.

 

할머니는 밤에도 잠을 물리치려고 이 일 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잠에 대한 짙은 두려움이 배어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병치레 한 번 하지 않았던 할머니는 밤만 되면 뜻 모를 비명을 지르며 입에 거품을 물곤 하였다. 그럴 때면 깊은 잠에 빠졌던 우리 가족들은 모두 잠을 설쳐야 했다.

 

병원에 가자는 아버지의 강권에도 할머니는 당신 병은 당신이 안다는 묘한 말씀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잠자리에 까지 따라 다니던 그 한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것이 할머니의 일상이고 숙명이었다.

 

할머니는 밤이면 손자들을 옆에 재우고는 제주 전설인 마탱이 얘기를 들려주었다. 철모르는 손자들은 무심히 듣다가 잠에 떨어지기가 일쑤였고. 그런 날이면 할머니는 더욱 외로운 상념의 밤을 혼자 지새웠으리라.

 

누구 덕에 사느냐는 부모 질문에 부모덕도 크지만 배꼽 밑의 선금 덕에 산다고 얘기한 셋째 딸을 부모는 내쫓는다. 훗날 부모덕에 산다는 딸들이 모두 거렁뱅이 거지가 된 반면 셋째는 부자가 된다.

 

그리고 삼신할망(출생을 관장하는 여신)의 노여움으로 봉사가 된 부모를 찾기 위해 셋째 딸은 큰 잔치를 벌인다.

 

그 많은 옛날 얘기들 중 하필 마탱이 전설(삼공본풀이)을 할머니가 수없이 들러준 이유는 무엇일까. 태어났으니 모진 목숨 다하는 날까지 살아야 함을, 살다보면 기쁜 날도 만날 수 있음을, 가족 잃은 아픔을 이겨내려는 의지를 감추고 있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보릿고개 시절 할머니는 먼동이 트기도 전에 바닷가로 줄달음쳤다. 가족이 잠에서 깰 즈음 돌아온 할머니의 손에는 어김없이 바닷 고기가 들려 있었다. 풍랑이 드센 겨울 바다가 뭍으로 올린 고기들을 할머니는 잘도 주워왔다.

 

 

그런 날이면 우리 가족은 오랜만에 고기로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새벽녘에 차례를 지낸 동네 제삿집에서 보낸 음식을 우선 나에게 듬뿍, 동생들에게 조금씩 나눠주곤, 당신은 아주 조금 입에 넣고 오래오래 씹으시던 모습도 어제 일인 양 눈에 선하다.

 

초등학교 가기 전 해에 나는 몹쓸 열병에 걸렸었다. 사색이 다 된 장손을 살려야 한다며 주저 없이 우영밭을 팔아치운 할머니는 제주시에서도 유명하다는 의사를 찾았다. 사지가 마비된 손자를 등에 업고 ‘남수각’의 가파른 언덕을 넘나들길 여러 달. 할머니의 지극정성으로 나는 마침내 두 발로 걸을 수가 있었다.

 

살아생전 할머니가 가장 기뻤던 순간이 언제였던가. 할아버지와 사각모 쓴 백부가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볼 때라고 들려주시던 나의 할머니. 그때마다 나는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할아버지와 백부가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나도 어서 커서 큰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겠노라고 할머니 앞에서 다짐하기 여러 번이었다.

 

고희가 훨씬 넘었어도 할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해초 따러 바다로, 밭일하러 들로 마냥 다니셨다. 그러면서도 평상심으로 살 수 있음이 내게는 외경 그 자체였다. 그때마다 나도 한 많은 삶을 이어가는 할머니에게 효도하려는 착한 아이로 크고 있었다.

 

이를 어여삐 여긴 할머니는 내게 이것저것 사람의 도리를 들려주곤 하였다. 그 리고 어린 내가 들어주어야 할 소원 하나가 있다고 하였다. 당신 죽기 전에 떡두꺼비 같은 증손자 하나 보게 해 달라고. 그럴 때면 수줍어 얼굴 붉히면서도 어른이 되는 미지의 세계를 나도 준비하고 있었던 게다.

 

젊은이 못지않게 건강을 유지하던 할머니가 팔십 두어 해에 자리에 들었다. 멀리 사는 친척들도 임종을 보려 왔고 수의도 장만되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기적처럼 일어나 이내 걸어 다니셨다. 어디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생겼는지 지금도 내겐 수수께끼이다.

 

그 사건 이후 종종 나를 바라보다 먼 곳으로 향하는 할머니의 눈길에서 나는 알 듯 말 듯 한 가슴앓이를 하나 갖기 시작하였다. 아흔 살이 됐을 때 비로소 나는 할머니 품에 우리 집 장손인 아들 녀석을 안겨 드릴 수 있었다.

 

증손자를 어르고 달래는 한편, 이젠 여한이 없다는 듯 허공을 향해 깊은 숨을 몰아쉬며 할머니는 지그시 눈을 감곤 하였다. 아마 할아버지를 비롯한 저 세상에 먼저 간 자식들을 떠올렸을 게다. 특히 백부의 얼굴을 나의 아들에게서 찾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가야 할 곳을 찾고 떠나야 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렇게 원하던 증손자를 보더니 이내 할머니의 건강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1991년 추석을 며칠 앞둔 깊은 밤에 나의 할머니는 한 많은 삶을 편안히 마감하셨다. 난생 처음 자동차를 구입하여 할머니를 태우려던 바람도, 어렵사리 장만한 아파트에 모시려던 소원도 이젠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기도가 되어버렸다.

 

할머니를 할아버지 곁에 모시고 돌아오던 날, 할머니 영정을 내 차에 모시고 상복을 입은 채 나는 차를 몰았다. 생전에 고생을 낙으로 삼으시며 험한 세상을 살아오신 할머니께 효도 한번 해드리려던 것이 할머니 초상을 차에 태우는 것으로 대신하다니.

 

돌아보면 손에 잡힐 듯 아득히 먼 세월, 고향 떠나 객지로 향하던 그때마다 나는 할머니의 사랑 넘치는 배웅을 받곤 하였다. 할머니의 육신은 가셨지만 나의 마음 깊은 자리에 할머니는 항상 계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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