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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회] 아버지 영전에 올리는 반지의 추억 ... 과묵한 아버지에 자상한 어머니

 

성산일출봉 근처의 시골식당에서 치루는 친지 결혼 피로연에 어머니와 함께 갔다. 베트남에서 온 색시가 반가운 표정으로 우리가족에게도 인사한다. 요사이 시골총각의 배필로 베트남 여성들이 인기짱이란다. 여필종부 하리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를 물었다. 다 알고 있는 얘기를 새삼스레 묻느냐고 모친은 반문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버지와 천생연분처럼 맺어진 일화들을 잘도 들려 주신다. 그때마다 나는 어머니 말씀을 귀 쫑긋 세워 듣는다. 그런 자식이 어머니는 좋은가 보다.

 

손아래 동생이 어머니 고향인 산촌 마을 쪽으로 차를 몰았다. 어머니에겐 고향하면 떠올리는 것 중 하나가 4·3이란다. 무장대의 최후 사령관인 이덕구가 고향청년들에게는 꽤나 유명했단다. 그를 따르다보니 많은 청년들이 산에 올랐고 희생자가 많았단다.

 

일본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해방 이듬해에 외할머니 따라 처음으로 고향땅을 밟았다. 우리말과 일본말이 유창한 어머니는 고향에서 4·3을 겪어야 했고, 할아버지와 중부(仲父)를 4·3에게 뺏긴 아버지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그 시절의 한 서린 사연들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으랴. 어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질 즈음 반지에 얽힌 사연을 물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부산 영도에서 두어 해 장사를 마치고 귀향하는 어머니의 보따리 속에는 아버지 손에 끼워줄 다섯 돈짜리 금반지도 들어있었다. 그 반지를 아버지는 바다 일 하던 중 잃어버린 것이다. 어떻게 장만한 반지인데….

 

어머니가 선물한 반지를 자랑스레 손에 끼고 나선 것이 화근이었다. 반지가 손에서 사라진 줄도 모르고 아버지는 바다 일에 열중했나 보다. 다음 날 새벽, 자식들의 잠꼬대에 잠을 깬 아버지는 어린 자식들의 이불을 덮어주는 어머니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고 버릇처럼 손을 만졌고, 이내 반지가 없음을 알았다.

 

한밤중에 아버지를 앞세운 어머니는 수돗가와 부엌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어디에선가 금방 나타날 것 같은 환상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쥐 잡듯 온 집안을 뒤졌다. 그러다 어머니는 전날의 바다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버지가 다녀간 지경을 꼬치코치 물었다. 반지 걱정으로 두 분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다음날, 동네사람들이 모인 바닷가에서, 반지를 찾아주는 사람에게 금반지 값의 반을 내놓겠다고 어머니는 울먹이며 선언했다. 톳 채취보다 반지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네사람들의 모습이 고마울 정도였다.

 

어머니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전날 아버지가 작업했다는 곳들을 찬찬히 살폈다. 반지를 잃은 곳이 이 근방 어디일 텐데, 조상신에게, 당신에게 기도하면서…. 누군가 반지를 찾아주기만 한다면, 남편에게 생전 처음으로 끼워준 사랑의 징표를 찾을 수 있다면 돈이 무슨 대수인가.

 

어머니는 물질을 못한다. 최고의 생계수단인 물질을 못하니 시집에서 반길 리 없다.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는 인생의 반려자가 되어 달라고 구애하고 또 구애했단다. 4·3의 아픔을 승화하듯 두분의 결합은 지고의 인연이었고 천륜이었다.

 

그날 아버지는 틈을 내어 작업장에서 조금 떨어진, 썰물에만 보이는 검은 여 근처에서 잠시 소라와 굴멩이를 잡기도 했었다. 이 말을 생각해낸 어머니는 이내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람의 출입이 뜸한 곳이라 어머니는 여기저기를 뚫어지게 살피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나선형처럼 소용돌이 친 모래 흔적이 잔잔한 파도 아래 어른거렸다. 순간 두 손으로 모래를 깊숙하게 퍼 올렸다. 바닷물이 모래를 씻어간 그 자리에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어머니는 심봤다라고 외쳤다, 반지 찾았다고 외쳤다, 목이 터져라 외쳤다. 이 소리에 바다 일 하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모래밭에서 그것도 바다에서 금반지를 찾은 어머니는 마을로 줄달음 쳤다. 그리고 막걸리와 안주를 바닷가에 질펀하게 차렸다. 내 걸었던 현상금으로 동네사람들에게 먹거리를 사와 대접한 것이다.

 

천우신조로 되찾은 금반지를 어머니는 집안의 보물로 간직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2돈을 더하여 7돈의 반지를 만들었다. 아름다운 문양도 새겼다. 그리고 아버지 손에 다시 끼워드렸다. 순간 어머니가 본 것은 영롱한 아버지의 눈물이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장롱 속 깊숙이 넣었던 반지를 꺼내 아버지 영전에 유품들과 가지런히 놓았다. 그리고 생전에 그랬던 것처럼 매일 음식을 올렸다.

 

아버지 1주기 날 어머니는 장남인 나의 손가락에 그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리고 예쁜 갑에 넣어 며느리에게 건넸다. 과묵한 아버지에 자상한 어머니, 나의 부모는 그런 사이였다. 속 울음으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애정을 표현하였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좋아하였다.

 

그 후 아버지는 친족의 결혼식과 같이 특별한 날에만 반지를 끼었다. 옷 근사하게 차려입고, 금빛 나는 반지 낀 아버지는 어디에서도 주목받는 분이었다. 그리고 곁에는 소박하게 차려입은 어머니가 있었다. 항상 아버지 주변에서 당신은 낮추고 아버지를 돋보이려 하였다.

 

그때마다 ‘피붙이 나 혼자 남앙, 몰락 직전의 가문을 일으켜 세운 것은 너네 어멍 덕이여, 이젠 조상님덜 뵐 면목이 섬쪄….’라고 평소 어머니를 은근히 자랑하던 아버지는 4·3 오는 길목에서 홀연히 가셨다.

 

후손들에게도 전해질 반지의 추억이 훈풍되어 가족들의 마음에 불어온다. 꽃은 필 때보다 질 때가 더욱 아름다워야 함을, 유훈처럼 남기고 떠나신 아버님이 오늘따라 더욱 그립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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