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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03)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여기서 그해의 장면을 회고해볼 필요가 있다. 모택동과 유소기는 40년을 알고 지냈다. 세인들이 인정하는 대혁명가이며 계급투쟁 이론과 실천에 있어 거장이며 사표였다. 회의장을 가득 메운 각급 간부들은 거의 모두 계급투쟁의 전문가였고 계급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특출한 인물들이었다.

 

그들 앞에서 충심으로 “경제 건설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방침을 옹호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 분명하였다.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기란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경제대혁명’의 참패, 그 충격은 결국 견딜 수는 없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패배의식에 빠져있는 바로 그때, 계급투쟁을 재삼 강조해 나오니 함께 목숨 걸고 혁명하였던 인물들 모두 더운 피가 끓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사람들을 향하여 호소하며 분발시키고 있는 인물이 바로 그들을 “승리에서 승리로” 이끈 모택동이 아니던가. 일호백낙할 게 분명하였다.

 

당시는 국제적으로 내우외환이 겹친 상태였다. 위기감이 고조되어 있었다. 각 부처 책임자들은 상당히 민감해져 있었다. 그리고 장기간에 걸쳐 간부들 사이에 군중과 괴리된 경향, 관료주의 작풍이 나날이 심화되고 있었다. 더욱이 3년 고난 시기에 부패가 만연해졌고 하루가 다르게 심해지고 있었다. 그 당시 지도층이 보기에는 용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싶을 정도였다.

 

이 점에 있어 모택동과 유소기는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나쁜 일이나 나쁜 사람을 원수처럼 증오했으니, 공동의 적에 대하여 다함께 적개심을 불태우는 건 당연하다. 회의장을 가득 매운 노혁명가들은 오랜 기간 모택동의 사상과 이론에 물들어 있었다. 부패하고 변질돼있는 부류에 대하여 돌격을 외치니, 군중의 감정은 일치되었고 격앙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모택동이 ‘계급투쟁’이란 의제를 선택하자 그 누구도 반대하지 못했다. 반대할 방법도 없었다. 역사의 경험은 늙은 혁명가들에게 계급투쟁의 책략을 옹호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계급투쟁은 그들이 존재하는 근거였다.

 

당시 유소기는 두 가지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다. 첫째, 모택동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하면서도 모택동의 명망과 형상을 해쳐서는 안됐다. 둘째, 경제조정사업을 우선으로 진행하면서도 계급투쟁을 반대할 수 없었다. 경제 조정과 계급투쟁을 대립시키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어쩌면 제2의 ‘여산회의(廬山會議)’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면 재앙으로 이어질 것이 뻔했다.

 

‘여산회의’란 무엇인가? 1959년 7월 2일부터 8월 1일까지 열린 중국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와 제8차 팔중전회(8월 2일~16일)를 말한다. 팽덕회(彭徳懐) 등이 대약진운동의 문제점을 비판했다가 실각하였다. 팽덕회는 “‘삼면홍기(三面紅旗,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정책)’ 중 총노선은 옳았지만, 조급하게 일을 진행해 목표달성에 실패하였다”는 편지를 모택동에게 보냈다.

 

팽덕회의 비판이 실추하고 있는 자신의 권위를 더욱 떨어뜨릴 것으로 판단한 모택동은 회의에서 그의 비판을 토론에 부쳤다. 모택동이 편지 내용을 “부르주아의 동요성”이라는 말로 강력히 비판하고 나서면서 회의 초기에 팽덕회를 지지하던 출석자들이 지지입장을 철회한다. 팽덕회 등은 직무에서 해임되었다. 회의가 끝난 뒤 당 내에서 반(反) 우파 투쟁이 전개되면서 365만 명이 우경기회주의자로 낙인 찍혀 직무에서 해임되었다.

 

당시에는 그랬다. 공산당 내의 많은 동지들이 모택동이 직접 경제를 장악하는 것이 두려우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모택동의 지도력과 권한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모택동 자신도 경제 분야에 대해서는 의기소침했지만 묻어버리지 않으면 안됐다. 계급투쟁은 모택동의 특기 중의 특기가 아닌가? 모택동은 계급투쟁에 전력을 다하면서 당을 장악하여야했다. 당의 권력을 장악해 부패를 일소하고 경제조정하면서 난관을 벗어나야했다. 일거양득인데, 어찌 계급투쟁을 강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소기도 최대한 노력한다. 자아비판을 하는 동시에 ‘서루회의’와 ‘오월회의’의 정확성을 옹호한다. 북대하 회의와 당의 8차 중전회를 총결할 때 그는 강조하였다. “이번 회의에서 계급과 계급 간 투쟁을 토론하였다. 계급투쟁을 하자면 그 연계 고리가 너무 광범위해진다. 구분하기도 무척 어렵다. 모든 것을 계급으로 연관시켜 분석하게 돼 버릴 수 있다.” 따라서 17급 이상 간부들에게만 전달하고 하급 간부들에게는 전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모든 당의 역량을 계급투쟁에 쏟아 붓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유소기는 강조한다. “소수가 계급투쟁에 나서면 충분하다. 모든 당이 계급투쟁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 계급투쟁에 간섭을 받아 업무가 방해 받아서는 안 된다.” 모택동도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계급투쟁을 너무 강조해 경제 업무를 소홀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업무가 우선이다”라고 동의하였다. 유소기는 ‘중심’ 업무를 유지하면서 “계급투쟁을 강령으로 한다”는 방침을 받아들였다.

 

모택동과 유소기가 의견일치를 보면서 갈등은 봉합된다. 결국 경제조정업무는 유지된다. 잘못을 바로잡아 과오를 고치면서 실행하게 되자 여러 정책들이 효과를 보게 된다. 경제는 급속도록 호전되기 시작한다.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모택동도 다시는 경제방면에 대하여 의견을 개진하지 않았다. 중국 국민경제는 비교적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경제조정의 기본방향은 유소기가 말한 “물러남(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일반적 단계를 벗어난 체제와 행위를 현실에 적합하도록 물러선다는 기조아래, “대대적으로 몇 년 안에 공산주의로 들어서자”는 미친 듯한 몽상에서 벗어나 “신민주주의 질서”로 물러섰다. 물론 “충분히 물러선다(退够)”는 데까지는 미치지는 못하였지만, 신민주주의로 회귀하면서 실천해 일정 부분 성공을 거뒀다. 모든 분야에서 귀한 경험을 얻었다. 10여 년 후 개혁개방의 실제적 토대가 되었고 체험적 근거를 제공하게 된다.

 

물론 모택동이 강조한 “계급투쟁을 강령으로 해야 한다”는 방침도 여러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1963년에 개최된 중앙공작회의에서 모택동은 강조한다. “우리 간부들은……절대 다수가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는데 우리는 교육을 받지 않고 있지 않는가.” “사회주의 교육을 확실하게 받아야 한다. 사회주의 교육, 간부 교육, 군중 교육을 한꺼번에 진행하여야 효과가 있다.” 유소기도 강조한다. “늘 입으로 계급투쟁을 얘기하면서도 실행하지 않는다면 옳지 않다. 지금 정식으로 부서에서 계급투쟁을 실행하여야 한다. 투기모리배, 탐오(貪汚)와 절도, 그리고 지나친 겉치레와 재물 인력 낭비, 엄중한 변질과 변절, 법과 기강을 어지럽히는 행위, 엄중한 분산주의가 대상이다.” 여기에서 주의하여야 할 것이 있다. 모택동이 강조한 것은 ‘교육’이고, 유소기가 제기한 것은 ‘계급투쟁’이다. 대상은 경제 영역의 부패이고.

 

 

그 회의에서 모택동과 유소기는 공동으로 전국에 ‘오반(五反)’과 ‘사청(四淸)’, 즉 사회주의 교육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한다. 먼저 도시에서는 ‘오반’, 곧 탐오 반대, 투기모리배 반대, 겉치레와 낭비 반대, 분산주의 반대, 관료주의 반대를 발동하였고 ; 농촌에서는 주로 ‘사청’, 즉 빚 청산, 재고 청산, 재무 청산, 노동 점수 청산을 진행하였다. 이 운동이 나중에 가서는 거의 모두를 ‘사청’이라 칭했다.

 

이른바 “깨끗하게 해야(淸)”할 내용은 전후로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처음에는 경제 영역에 한하는 것이 기본이었으나 나중에 정치, 경제, 조직, 대오에까지 확대되었다.

 

이 사회주의 교육운동은 “계급투쟁을 강령으로 한다”는 데에서 비롯됐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성질, 목적과 방법에 대하여 모택동과 유소기는 자신만의 생각이 있었다. 겉으로는 일치하는 듯 보이나 따지고 보면 실제는 달랐다.

 

겉으로는 같은 것 같지만 속으로는 각자 딴마음이 있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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