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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04)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1963년 4, 5월, 유소기는 부인 왕광미(王光美)와 함께 동남아 순방을 떠난다. 곤명(昆明)에 도착하였을 때 ‘사청운동’을 지도하는 문건 『현재 농촌 사업 중 약간의 문제에 관한 결정 초안』(통칭 전십조前十条)이 이미 정해져 나왔다. 문건은 “현재 중국 사회에는 엄중하고 첨예한 계급투쟁 상황이 출현하였다”라고 명확하게 표명하였다.

 

농촌의 ‘사청운동’과 도시의 ‘오반운동’은 모두 “자본주의 세력이 흉포하게 사회주의를 공격하는 혁명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에 대하여 타격을 주고 분쇄하여야 한다”는 데에 있었다. 유소기는 ‘전십조’에 대하여 이의를 달지 않았다.

 

일찍이 1961년에 유소기와 왕광미는 호남 농촌에서 44일을 머무르면서 기층에 복잡다단한 문제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더욱이 진실 된 말을 하지 않는 현상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적지 않은 지역의 지도기관은 보고에만 의지하고 업무를 지시하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형식을 중시할 뿐 실제 효과는 경시하고 있었다. 눈속임과 거짓으로 중앙에서 파견한 인사들을 속이고 있었다.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군중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였다. 국가의 업무가 많은 관계로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유소기는 북경으로 돌아왔고 왕광미는 농촌에 가서 작업에 참가하면서 조사 연구하도록 남겨두었다.

 

유소기는 “뿌리가 깊고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등을 서로 맞대 있다”고 강조하였다. 진실 된 말을 들어야 하고 진상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나중에 “군중을 믿지 않고 신비주의에 빠졌다”고 비난 받는다.

 

1963년 10월, 중남해의 유소기가 속한 당 지부 요원들이 그를 말리고 있었다. 부인 왕광미가 농촌으로 내려가면 유소기의 건강을 관리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소기는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 수면제를 먹어야만 잠을 잘 수 있었다. 야간에 돌보는 사람이 없는데 수면제가 약간이라도 강하면 쉬이 쓰러질 수 있었다.

 

당 지부는 왕광미가 농촌으로 내려가는 것을 반대하면서 유소기에게 자신들의 제안들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다. 유소기는 진심으로 “지부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임무도 반드시 완수해야 하지”라고 말했다.

 

어떻게 했을까? 유소기가 방법을 찾아내었다. 땅바닥에 침구를 깔고 잠을 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서 지부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1968년에 병이 들어 위급한 상황에 이를 때까지 장장 5년 동안 땅바닥에 침구를 깔고 잠을 잤다.

 

 

왕광미가 처음 농촌으로 내려 간 것은 1963년 11월로 5개월간이었다. 하북 무녕(撫寧)현 노왕장공사(盧王莊公社) 도원대대(桃園大隊)에 있었다. 북경을 떠나면서 그녀는 유소기에게 무엇을 주의해 관찰하여야 하느냐고 물었다. 유소기는 한 마디 말을 건넸다. “틀만 보지 마소. 모든 것을 실제에서 출발하여야 하오.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아야 해결할 수 있소.” 왕광미는 매월 북경에 돌아와서는 모택동에게 보고한다.

 

모택동은 여러 번 “뿌리는 위에 있소”라고 지적해줬다. 왕광미는 그 말의 함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왕광미는 위에 있는 뿌리가 무엇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당연히 어떻게 뿌리를 캐야 하는지도 몰랐고.

 

7월 5일, 왕광미는 하북성위 공작회의에 결과를 보고한다. 『도원경험桃源經驗』 보고서다. 보고서의 용어는 무척 날카로웠다. 심지어 도원 당 지부를 “기본적으로 공산당이 아니다”, “양면의 정권”이라며 격렬하게 질책하였다.

 

그러나 공작조가 임무를 완성하고 철수하면서 한 번도 투쟁회의를 개최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비판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체포하지 않았다. 그저 지부 서기의 직만 철회하였을 뿐이었다. 그저 인민 내부의 모순으로만 대했다.

 

기타 잘못을 범한 간부는 검토 후 배상하게 한 후, 군중의 양해를 받았다는 이유로 업무에 복귀시켰다. 도원의 운동은 적들과의 고도의 투쟁이 아닌 교육 수준에 머물렀다.

 

모택동은 『도원경험』 보고서가 마음에 들었다. 그 보고서를 전국으로 돌려 많은 이들이 보게 한다. 그리고 강청(江靑)과 주변 인물들에게 읽도록 하였다. 모택동은 왕광미를 여러 번 격려하였다. 그녀에게 각지를 돌아다니며 강연하게 하였다.

 

중앙회의에서는 유소기에게 『도원경험』을 근거로 ‘전십조’를 수정하도록 하였다. 나중에 모택동은 진백달(陳伯達)에게 천진(天津) 소참으로 가 경험을 쌓으라고 했다. 진백달은 가자마자 세 가지 ‘반혁명 집단’을 색출해냈다.

 

‘탈권(奪權, 정권 탈취)’, ‘흑방(黑幇, 반동 조직)’, ‘반혁명 수정주의 분자’ 등의 어휘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두 『도원경험』에서 도출해냈다. 모택동은 여러 번 표창하고 전국으로 확산시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모택동이 ‘준점(蹲點, 현장에 가서 실제로 작업에 참가하면서 조사하고 연구함)’을 제창하였고 유소기가 솔선수범하면서 호응하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유소기는 핑계를 대면서 농촌으로 내려가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불만을 표출하였다.

 

1964년 여름, 유소기는 고급 간부들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비평한다. 예를 들어 강소성 성위 제1서기 강위청(江渭淸)에게 말했다. “당신이 보따리를 매시오. 당신은 강소 사람이잖소. 성위 서기를 10여 년 역임하면서 스스로 강소의 상황을 잘 안다고 여길 것이오. 내가 보기에 당신이 알고 있는 상황은 10년 전보다도 적다 여기오. 많지 않을 거요. 10년 전 농민은 개인경제였기 때문이오. 농촌으로 내려가야 일반 백성들의 얘기를 들을 수 있소. 그러면 군중의 의견을 쉬이 반영할 수 있고. 10년이나 지났소. 당신은 계급투쟁 상황이나 군중의 상황, 사회 상황을 이해하는 바가 적을 게 분명하오.” 강위청은 그렇다고 인정하였다. 그러자 유소기 캐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농촌으로 내려가지 않는 것이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면서 난처하게 만들었다.

 

유소기는 또 중앙 조직부 부부장 안자문(安子文)에게 공문을 보냈다. “농촌으로 내려가지 않으면 중앙위원이 될 수 없소. 성이나 지역 위의 서기도 될 수 없소. 부장이나 국장도 될 수 없소.” 오래지 않아 180여 명의 정·부 부장, 1000여 명의 시국장 모두 농촌으로 내려간다.

 

모택동이 그 사실을 듣고서는 여러 성에서 얘기를 꺼냈다. “내가 여러 번 당신들에게 내려가서 실제 업무를 파악하라고 하였는데도 듣지 않더니. 유소기가 말 한 마디 하자마자 내려오는구먼. 역시 유소기가 대단하기는 해.”

 

 

유소기는 일관된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다. “인민 내부의 모순은 주로 지도기관과 인민 사이의 모순으로 표현된다. 더 엄밀히 말하면 인민과 지도기관의 관료주의 모순이다.”

 

그는 말했다. “때리면 때릴수록 적이 적어지는 것이 객관적이 법칙이오. 만약 타도하는데도 적이 많아진다면 분명 인민 내부의 모순을 잘못 파악하는 것이오.”

 

1964년 7월, ‘사청운동’이 대규모로 전개되었다. 유소기는 말했다. “‘사청’은 계급투쟁이오. 인민 내부의 모순이요, 인민 내부의 계급투쟁이오.”

 

만약 이런 말에서 성격이 확실히 규명되지 않는다면 다음 말에서 분명하게 파악해낼 수 있다. “우리 이번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임무, ‘사청’과 ‘오반’ 임무는 바로 많고 많은 인민 내부의 모순과 당내 모순을 해결하고자 함이오. 동시에 인민 내부와 당내에 숨어 있는 적대적 모순을 확실하게 찾아내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인민 내부의 모순을 처리하는 것을 위주로 하여서 “문제점이 있으면 그 문제를 해결하려”했다는 말이다.

 

‘사청(四淸)’의 주요 목표는 ‘사불청(四不淸)’ 간부들이었다. “‘사불청’의 간부(그들은 적이 아니다―원문)에 대하여 우리는 단결을 기대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비평과 투쟁을 통하여 새로운 기초아래 단결하도록 하여야한다.” 더 나아가 설명한다.

 

“사람을 적게 잡고, 한 명이라도 죽이지 않으며, 모순을 윗선으로 넘겨주지 않고, 10분의 1,2에서 간부를 처분하며”, 더욱이 “현(縣) 이상의 범위는 모든 공사의 백분의 1,2를 넘지 않는 비율이 되어야”하고 바로 백분의 1,2의 “잘못을 범한 간부들 절대 다수는 잘못을 고칠 수 있기 때문에, 일시에 잘못을 고칠 수 없더라도 그가 그저 손해를 입히지 않았다면 된다. 그도 단결하여야하는 대상이다.” 유소기의 뜻이 분명해진다. 간부들의 절대 다수는 인민 내부의 모순에 의한 것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유소기는 국가 정치 생활 중 적대적 모순을 주요 모순으로 삼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유소기는 ‘사청’을 교육운동으로 보고 있었다. “문제를 알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군중에게 광범위하고도 보편적으로 발동할 것을 요구하였다. 5년 동안 전국적으로 실시된다. 매해 하나하나씩 모든 촌락으로 확대한다. 간부들을 모두 하향하도록 하였다. 정책을 파악하고 운동을 지도하며 민정을 이해하도록 하였다.

 

모든 지역, 모든 간부들이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간부와 군중, 지도자와 피지도자, 공작조와 감찰하는 간부 모두 보편적 교육을 받았다. 이른바 ‘대병단작전(大兵團作戰)’이요 ‘인해전술(人海戰術)’이 그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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