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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04)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유소기는 여전히 자기 견해를 견지하면서 가르침을 받겠다는 듯이 물었다. “그 ‘파(派)’라는 걸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소. 자본주의노선을 걷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소. 그러나 자산계급을 이미 모두 소멸됐잖소. 어찌 무슨 파(派)라고 까지 할 수 있겠소? 파를 얘기한다면 사람이 너무 많아야 될 것이오. 그럼 도처에 깔린 게 모두 적대적 모순이란 말이잖소. 석탄부, 금속 제련부 어디에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당권파가 있다는 말이오?”

 

 

모택동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이 말했다. “장림지(張霖之)가 바로 그요!” 유소기는 감히 다시 묻지 못했다. 당시 상황에서 모택동이 누군가를 지명하면 그 사람은 타도되어야했기 때문이었다. ‘문혁’이 시작되자마자 장림지는 맨 먼저 재난을 당했다. 비참한 고문과 혹형을 당했고 문혁 당일 새벽에 북경에서 몰매 맞아 죽었다. 문혁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문혁’이 진행되는 와중까지도 유소기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소. 우리가 하는 것은 사회주의‘교육’운동이오. 너 죽고 나 살자는 사회주의‘투쟁’운동이 아니잖소. 무조건 적대적 모순을 찾아 몽둥이를 휘두르며 사람을 때려죽일 수는 없지 않소.” 이 말이 정답이다. 이 말이 본질적으로 모택동과 유소기가 엇갈리게 된 요점이다.

 

이해하기 힘든, 고민해봐야 할 것이 있다. 위에서 거론한 바가 있는 1963년 사회주의교육운동을 발동하자는 회의석상에서 모택동은 교육을 강조하면서 “한꺼번에 잡아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하였고 ; 유소기는 대대적으로 ‘계급투쟁’(나중에 ‘인민내부의 계급투쟁’임이 증명됨)을 얘기했었다.

 

운동이 1여 년이 지난 후, 유소기는 오히려 ‘교육’을 강조하였고 모택동은 ‘계급투쟁’(적대적 모순의 계급투쟁)을 강조하였다. 기이한 도치다. 하나는 이성에서 광열로, 하나는 이성에서 현실로 다가가고 ; 하나는 온도가 상승하는 것과 같고 하나는 온도가 내려가는 것과 다름없음이니. 너무 희극적이지 않은가?

 

여기에서 반드시 양 극단의 중요한 차이를 정리해둬야 하리라.

 

유소기가 말한 계급투쟁의 대상은 관료주의분자(官僚主義分子)와 관료특권계층이었다. 등급 분화, 권력 이화에 기인한 변질분자였다. 반면, 모택동이 말한 계급투쟁의 대상은 바로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당권파(이른바 주자파〔走資派〕)”였다.

 

변질 분자 이외에도 일반적 빈부차이에 따라 계급 분화로 잘못 인식된 ‘신생자산계급(新生資産階級)’까지 포괄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지도 의식, 사상노선에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당권파를 포괄적으로 겨냥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유소기가 자신의 의견을 굳게 지키면서 반대하였던 이유였다.

 

 

유소기는 원래 소규모 회의석상에서 모택동과는 다른 의견을 제기했는데 오히려 생각지도 않게 모택동이 ‘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유소기는 그것을 피하려했다. 나중에 당한 일을 보면 유소기의 걱정이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된다. 유소기는 “중국 최고의 주자파”라는 죄명을 얻는다. 자신이 예견한 바가 사실이 되어 돌아왔다.

 

모택동의 잘못은 무엇일까? 절대 다수를 ‘당권파’로 몰아 ‘문혁’ 중 적든 많든 비판받고 타격을 받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억지로 적발해 비판하고 권력을 빼앗았으며 파면해 노동을 통하여 개조토록 만들었고, 원훈들이 재난을 당했다.

 

전국에서 억울한 옥살이가 그칠 날이 없었다. 모욕당하고 죽음에 이른 사람이 천천만만이었다. 중국 봉건왕조의 개국 황제가 전횡을 일삼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역사는 모택동이 황제처럼 군림하였고 유소기가 그런 것을 막으려 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1965년 1월 3일, 제3차 전국인대 국가주석 선거 당일, 모택동은 인민대회당에서 중앙 정치국 상위 확대회의를 소집하고 ‘사청(四淸)’ 상황을 보고받을 때 왕광미에게 통지해 참석하도록 하였다.

 

선거 결과, 유소기는 또다시 국가주석에 당선된다. 유소기가 북경청(北京廳, 인민대회당 내)에 도착하였을 때 현장에 있던 왕광미를 보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왕광미는 모택동이 주재하는 중앙회의에 처음 참석한 까닭에 긴장돼 있었다. 유소기는 맞은편에 앉아 왕광미를 보면서도 얘기조차 건네지 못했다.

 

모택동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많은 공작대가 한 게 뭐 있소. 소참(小站)은 진백달(陳伯達) 혼자만도 다 했는데.” 얼굴을 돌려 유소기를 보면서 말했다. “당신, 안원(安源)에 혼자 있었소?” 유소기가 말했다. “군중이 있었습니다.” 이어 모택동이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번쇄철학(煩瑣哲學, 표면적인 현상만을 시시콜콜 따지는 사유 방법이나 업무 풍조), 인해전술(人海戰術)”, “깊게 뿌리를 내려 서로 연계돼있고, 신비화를 조장하고 있군.”

 

그때 모택동은 자신이 “공작대 지도 운동”과 “역량을 집중해 적을 섬멸하라”는 조문을 직접 수정하면서 강조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모택동은 유소기를 비판한다. “타인의 우경(右傾)을 반대하다가 결국 자신이 우경이 되었어!” 그러면서 또 반드시 군중과 직접 만나고 광범위하게 군중을 동원해 신속하게 국면을 타개하라고 강조하였다. 앞에서는 유소기를 ‘인해전술’을 쓰며 좌(左)에 치우쳤다 비판하고 나중에는 또 유소기를 우경이라 비판하니, 사람들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모택동의 이런 비판이 유소기가 ‘좌경’이라는 것을 규정하는 데에서 출발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반감 때문에 이랬다저랬다 했는지 아직까지 알 길은 없다. 그러나 몇 년 후 모택동은 중앙공작회의에서 미국 작가 스노우(Snow)와 환담하면서 당시에 바로 유소기를 타도할 결정을 했다고 털어놨다.

 

 

모택동과 유소기의 언쟁이 그런 지경까지 이르게 되니 사람들이 급해지기 시작한다.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안자문(安子文)은 개국 원훈들에게 화해시키도록 부탁한다. 도주(陶鑄)와 안자문은 또 유소기의 자택으로 가 의견을 물었다.

 

유소기는 전반적인 국면을 고려해 주동적으로 주덕(朱德), 하룡(賀龍), 진의(陳毅), 임표(林彪) 등을 찾아가 의견을 구하고 당의 생활회(生活會)를 열어 비평을 듣겠다고 하였다.

 

정치국 회의 때 유소기는 반성하면서 모택동에게 존중을 다하지 못하였다고 말했다. 모택동이 말했다. “이것은 존중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요.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주의의 문제요. 원칙의 문제에 있어 나는 결코 양보해본 적이 없소.” 갈등은 계속해서 적대시 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강 위의 두꺼운 얼음은 결코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지 않는 법. 오랜 기간 누적된 것일 터이니. 어쩌면 그 때 모택동이 비로소 마음을 도스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유소기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이제까지 얘기한 부분을 다시 한 번 더 개괄해보자.

 

활기찼던 ‘사회주의 교육운동’에 대하여 모택동과 유소기는 엇갈렸다.

 

첫째, 모택동이 강조한 것은 계급분화(당시 생산은 모두 공유화되어 있었다)에 따라 발생한 자산계급이나 주자파를 타도하는데 있었던 반면, 유소기가 강조한 것은 등급분화(어느 때나 권력이화의 위험성이 있다)에 따라 발생한 관료특권계층을 소멸하는 데에 있었다.

 

둘째, 모택동이 반대한 것은 자본주의부활(중국은 무자본주의 발전 단계에 있었다)이고, 유소기가 반대한 것은 봉건주의부활(중국은 몇 천 년의 봉건사회의 유풍이 남아 있었다)이었다.

 

셋째, 모택동이 해결하려하였던 것은 적대적 모순이었고 유소기가 해결하려하였던 것은 인민 내부의 모순을 주로 한 여러 가지 모순으로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넷째, 모택동은 적들을 향하여 대립면(모순적 통일체에서 서로 의존하면서 서로 투쟁〔대립〕하는 두 측면)을 타도하고 소멸시켜 한 움큼(一小撮)을 고립시키는 “너는 죽고 나는 사는” 투쟁을 주장한 반면, 유소기는 모두 자기사람(자기편)으로 교육을 확대하고 단결해 대다수를 해방시키는 “광범위하고 깊이 들어가는” 교육을 주장하였다.

 

모택동은 유소기가 진행하고 있는, 즉 대대적으로 “봉건의 꼬리를 자르는” 교육을 전개하자는 운동을 “큰 조각(一大片)을 타격”(좌 형식)하는 것으로 보았다 ; 모택동 자신이 정한 적들을 타도하고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었기에, 유소기가 “한 움큼(一小撮)을 보호”(실제는 우〔右〕)하려고 했다고 보았다. 그래서 모택동은 유소기를 “형식은 좌(左)이나 실제는 우(右)”라고 질책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지도사상에 있어 모택동과 유소기는 본질적인 면에서 남원북철 하였다. 천양지차가 있었다. 그 결과는 참담하게 끝을 맺는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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