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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회] 일제 강점기 시절 제주해녀항쟁의 전개과정

 

제주출신 고희영 감독이 최근 제작한 영화 ‘물숨’은 우도해녀의 삶을 다룬 다큐이다. 고희영 감독은 물숨을 제작하기 위해 우도에 7년을 투자하였다 한다.

 

물속에서 숨을 참고, 욕심을 자르고, 욕망을 다스리며 살아가는 해녀들의 삶을 진솔하게 영상에 담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감독은 해녀들의 물질이 아무리 힘들어도 바다에서 위로받고 바다를 원망하지 않는 모습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명화를 우도학생들이 못 본다면 그것 또한 아픔일 것이다. 고희영 감독은 나의 고교 제자이다. 여러 여건이 충족되어 우도 학생 모두는 학교에서 그들의 할머니, 고모, 이모, 삼춘들인 우도해녀의 삶을 화면으로 감상하는 기회도 가졌다.

 

우도출신 강영수 수필가는 ‘바다에서 삶을 캐는 해녀’라는 제목으로 우도해녀의 삶을 소재로 작품화하기도 했다. 해녀들은 물때가 되면 바다 속에 있는 자그마한 여를 부여잡고 정직하게 삶을 캐어 올린다는 대목에선 공감하는 바가 크다.

 

제주해녀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제주도는 유네스코 등재를 신청했고, 드디어 2016년 11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가 결정되었다.

 

1965년 2만3000여 명이던 제주해녀 수는, 2015년에는 4377명으로 줄어들었다. 게다가 60대 이상이 전체 해녀의 78%이고, 10명중 4명 이 70대로 고령화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2006년 구좌읍 하도리에 해녀박물관이 개관됐고, 2009년 해녀문화 보존 및 지원 조례가 만들어졌다. 2013년에는 제주해녀문화를 유네스코 인류무형 유산 대표목록 등재 신청종목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제주해녀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가장 큰 이유는, 해녀문화는 물질을 한다는 행위와 함께 민속지식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온 문화유산이면서, 나눔과 배려의 공동체 정신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제주해녀가 2015년 국가어업유산 1호로 선정된 이유이기도 하다.

 

우도의 관문 중 하나인 천진항에 내리면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해녀항쟁기념비이다. 우도해녀항쟁기념비에는 1932년 해녀항일운동으로 잡혀간 우도의 선구자인 강관순이 작곡한 해녀가가 쓰여있다. 1930년대 당시 해녀가는 제주의 모든 해녀들의 애창곡이었다. 바다 밭을 일구는 곳 중에서도 우도에 해녀항쟁상이 설치된 배 경이 궁금하다.

 

일제 강점기 시절 제주산 전복은 일본뿐만 아니라 홍콩과 상하이 등지에서도 프랑스와 영국 등의 미식가들이 즐겨 찾는 메뉴였다.

 

감태는 공업용 아교와 화장품 원료로, 우뭇가사리는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과자의 원료로 팔려 나갔다. 당시 제주의 해안가에는 일본인에 의한 통조림 공장이 성시를 이루어 제주 해산물은 엄청난 경제적 가치가 있었다.

 

그럼에도 일제의 가혹한 수탈로 생산자인 해녀들의 삶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에 항거하여 1932년 일어난 해녀항일운동은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제주해녀들에 의한 정직한 저항운동이었다.

 

1932년 1월 7일, 구좌읍 하도리 해녀 300여 명이 호미와 빗창을 들고 5일장이 서는 세화리 장터로 향했다. 인근의 해녀들도 시위대에 합류했고,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불어나자 경찰도 어쩔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도리 출신 부춘화 해녀가 단상에 올라 다음과 같이 울분을 토했다.

 

우리 해녀들은 이 추운 겨울 바다 속에 들어가 전복이며 해산물을 캐옵니다. 그런데 일본은 시세와는 상관없이 터무니없는 헐값에 우리의 전복을 매수해왔습니다. 우리 해녀들은 더 이상 이와 같은 일본의 수탈에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위해 전복을 캡니까? 왜놈들 배불려주려고 전복을 캡니까? 우리가 목숨 걸고 바당에서 캐어 올린 전복이며 해산물을, 왜 일본인에게만 매수해야 합니까? 해녀조합은 당장 일본인 지정 매수를 철회해야 합니다. 해녀조합을 등에 업고 우리의 피를 빨아 먹는 일본인 니노미야를 몰아내고, 그 밑에서 우리의 피를 빨아먹고 있는 매국노도 몰아내고 우리의 권리 우리의 손으로 지켜냅시다, 여러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탈을 일삼던 일제는, 해녀들이 채취한 전복이며 해산물을 그들이 지정한 일본 사람에게만 판매하도록 했다. 악덕상인으로 악명을 떨친 니노미야라는 일본인이 해산물을 시세의 반도 되지 않는 헐값에 사들였다. 이에 해녀들은 제값을 쳐 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렇다면 사지 않겠다’ 하고 오히려 으름장을 놓으며 전복의 매수를 거절하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해녀들은 해녀조합[조합장은 일본인 도사(島司)였음]에 문제해결을 요구하는 사이 창고에 보관 중이던 전복이 썩어 버리자, 1월 7일 시위를 감행한 것이다. 5일 후인 1월 12일 ‘다구치 데이키’ 제주도사 겸 제주해녀어업조합장이 세화리를 첫 순시하는 날을 기해, 해녀들은 대대적인 연합시위를 벌임과 동시에 다구치 도사를 만나 담판을 짓자고 뜻을 모았다.

 

도사를 태운 자동차가 세화리 장터 근처를 지나가자 해녀들은 도사의 자동차를 에워 쌓기 시작했다. 1000여 명의 해녀와 가세한 구경꾼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던 도사가, 차에서 내려 주재소 정문에서 다른 차를 타고 빠져나가려 하자 해녀들이 다시 도사를 포위했다. 그러자 경관이 총 방아쇠를 당기고는 한 해녀의 목에 칼을 겨눴다. 그러한 긴장 속에서 칼끝에 목을 찔린 해녀가 입을 열었다.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 대하면, 우리는 죽음으로 대하겠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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