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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회] 가파도에 상륙한 영국선박 ... 세계정세에 어두운 조선사회의 자화상

 

바다를 건너는 것을 도항이라 하고, 바람을 동력으로 하여 도항하는 배를 움직이던 시대에 항로를 벗어나 조난되는 해난사고를 표류라 한다. 표류자에게는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 당시의 여러 나라의 통상적인 관례였다. 가파도와 우도는 표류의 역사도 간직하고 있다.

 

1794년 8월, 류큐인들이 표류하다 가파도에 상륙했다. 이들은 항해 중 갑자기 동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가파도에 표착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제주판관 홍이조와 역학(譯學) 홍덕용이 표착지에 갔으나 말이 통하지 않아 필담(筆談)으로 의사소통하였다.

 

배에는 11인이 승선해 있었으나 7명이 익사하고 1명이 병사했는데, 병사자는 가파도에 묻혔다. 남은 3인은 전라도 영암 이진에 보내졌는데,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는 제주통사 이익청을 동행하여 표착인들에게 실정을 묻고는 심문조서인 문정기(問情記)를 작성하였다. 이후 생존자는 북경을 거쳐 다음 해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1807년 7월 류큐인 6명이 탄 작은 배가 우도(당시 정의현 소속)에 표착하였다. 필담으로 조사한 결과, 그들은 류큐국의 순검관과 사관 일행으로 큰 배에 탄 인원은 모두 99명(여성 4명)이었다.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중국에 표착하였는데, 다시 출항하였으나 서남풍으로 다시 표류하여 정의현 우도에 표착한 것이다.

 

이미 제주에는 5년 전인 1801년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는 표착인 5명이 머물고 있었다. 류큐 표착인들에게 물어보니, 그들은 필리핀인 여송국(呂宋國) 사람이라 했다.

 

조정에서는 여송국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없어, 여송인들이 북경을 거쳐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류큐인들이 귀국할 때, 이들도 같은 배에 태워 필리핀을 경유해서 가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류큐인들은 타국 표류인들을 태워갈 수 없다고 하여 류큐인들만 배로 귀국하였다.

 

역사서에서는 바다 위에 출몰하는 외국배를 조선 후기 전에는 황당선(荒唐船), 조선 후기에는 국적을 알 수 없는 배인 미변선(未辯船), 조선 말기에는 이양선(異樣船)으로 부르고 있다.

 

이양선이란 무장한 서양함선으로 군사작전을 위해 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무장함대를 지칭한다. 그런 함대가 1840년 가파도와 1845년 우도에 나타난 것이다.

 

1840년(헌종 6년) 12월, 영국선박 2척이 가파도에 상륙하여 총을 쏘며 소들을 약탈하여 갔다. 그때 전라감사 이목연은 제주목사의 장계(임금에게 올리는 편지)를 비변사(備邊司)에 올려 대정현감 강계우를 파직하도록 하였다. 다음은 비변사에 보고된 내용이다.

 

야만인의 배가 바다에 출몰하는 것은 저들의 교활한 습성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를 막아야 할 병사들이 비록 훈련을 게을리했다고 책망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섬 주위의 포구와 항만을 굳건히 방어하고 경계하도록 살펴야 함이 본시 당연한 일입니다. 하물며 저들은 40인에 불과하였는데, 어쩐 일인지 먼저 겁을 먹고 도망가서 흩어졌으니 변방을 지킬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이들을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제주목사 구재룡도 함께 파직하소서.

 

당시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새로운 무기를 갖춘 영국군을 대항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임에도 그 책임이 변방장수에게만 있다고 하는 것은, 지도자답지도 장수답지도 않은 억지주장처럼 보인다. 세계정세에 어두운 조선사회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다.

 

1910년 7월에는 영국군함이 모슬포 서남쪽 해상 2마일 떨어진 지점(일명 홀에미섬)에 좌초되었다. 제주의 많은 선박들이 좌초된 군함을 인양하려 했지만, 끄떡도 않았다. 그래서 영국군은 좌초된 함선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인근 주민들은 배 갑판에 설치된 시설물들을 보고 놀라움을 금지 못했다. 군함 안에는 채소를 심는 밭도 있고, 닭·돼지·양 등을 사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군들이 두고 간 가축들을 인근주민들이 가져다가 종계(種鷄, 씨닭)와 종돈으로 삼아 키우니, 서양종 닭과 돼지가 가파도는 물론 인근 지방까지 널리 퍼졌고, 양은 사육하지 못하여 멸종돼 버렸다.

 

이때부터 가파도 산 영국종 닭을 영국댓닭, 백색 영국종 돼지는 양국도새기라 불 렸다. 영국함선이 좌초된 후 5년이 지나서 일본인 해양 전문가가 함선을 해체하였는데, 철판 두께가 7-8인치 가량 되었고, 해체 가능한 선체는 모두 분해해서 일본으로 실어갔다 전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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