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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서울사람의 제주느낌표(!)
아무 것도 하지 않기 ... 여행의 출발점[서울사람의 제주 느낌표(1)] 휴식과 공존하는 생활속의 공간 제주
박헌정  |  portugal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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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13  10:3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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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수필가 박헌정의 ‘서울사람의 제주느낌표(!)’입니다. 박 작가는 서울서 태어나 한국의 386시대를 고달프게 살아온 전형적인 ‘서울공화국’ 국민입니다. 하지만 그가 청·장년기를 보낸 삶의 교훈은 ‘쉼표’입니다. 그리고 우리 산하에 대한 ‘느낌’입니다. 그의 ‘느낌’은 발길 가는대로 훌쩍 날아간 ‘제주도’란 공간에서 그 절정을 찾습니다. 그가 만난 제주의 산하, 문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주 안’이 아닌 ‘제주 밖’ 사람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 제주가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 주

   
▲ 이틀 동안 달게 자고 일어나 올라간 대수산봉. 제주를 모처럼 찾는 사람들이라면 “거기까지 가서 잠만 자고 겨우 야트막한 산 하나 올라갔냐?”고 할지 모른다.

4박 5일의 제주여행이라고 하면 그리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일정이다. 그런데 당일로 업무 보고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한 달 살기하는 사람도 있으니 어쩌면 매우 길거나 매우 짧은 일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만큼 여행이 다원화되는 것 같다.

제주의 날씨는 제주 사람들도 예측하기 힘들다고 하는데 나 역시 겨울에서 봄으로 이어지는 때에는 강풍에 고생했던 기억이 많았다. 바깥 기온도 낮지 않고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바람도 그렇게 차지 않은데 올레길이나 오름에서 느끼는 냉랭함은 서울 사람에게 참 낯설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는 특별한 이벤트를 가질 생각 하지 않고 토마스 하디의 소설 <테스> 상하권과 노트북만 가지고 내려왔다. 첫째날, 콘도에서 밥을 해먹고 책을 읽다가 잠들었는데 밤새 어찌나 잠이 잘 오던지, 최근 4~5년 동안 그렇게 달게 잔 적이 없다.

둘째날, 정확히 몇 시에 깼는지 모르겠다. 깨어나서 책 읽다가 자고, 배고프면 일어나서 밥 먹고, 책 보고, 자고… 중간에 아시안컵 축구 경기도 보았다. 제주는 잠의 섬 같았다.

   
▲ 지난 9월에는 교래자연휴양림에서 머물렀다. 장대비가 쏟아질 때 휴양림 안
<숲속의 초가>에서 ‘고립의 즐거움’을 아주 감미롭게 느껴보았다.

셋째날부터는 잠이 덜 와서 콘도 주변을 산책하고 시내로 나와 지인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많은 움직임을 갖지는 않고 며칠 더 있다가 서울로 올라왔다.

이번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제주의 풍광은 없었지만 잠을 잘 잤더니 보약을 한 첩 먹은 것처럼 기운이 난다.

뭍의 사람들이 제주를 접하는 단계는 ‘자연 비경 - 이벤트 공간 - 체험 공간 – 휴식처’ 순(順)일 것 같다.

나 역시 1980년대에 수학여행으로 처음 제주를 찾았을 때엔 만장굴, 천지연폭포, 정방폭포, 용두암, 한라산 같은 곳에서 우리 땅에 대한 감상적인 자부심을 느꼈다. 2000년대 초에 가족들과 두번째 찾았을 때엔 미로공원이나 초콜릿박물관 같은 곳을 찍으며 다녔고, 그 다음 단계에는 해변에서 아이들 튜브 불어주고 선크림 발라주는 아빠 역할에 충실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따라다니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제주에서 쉴 틈이 생겼다. 혼자 또는 아내와 오름에 오르고 올레길을 걷다가 해안에서 해녀가 직접 따온 해산물에 투명한 병의 한라산을 비우며 오래도록 바다만 바라본다.

점점 제주에 익숙해지면서 렌터카보다 버스를 편하게 이용하고 주택가 식당에서 몸국을 포장해다 저녁을 때운다. 그리고 제주에 올 때마다 그 느낌을 짜내거나 과장해서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써 올리는 일도 그만두게 되었다. 나 말고도 아웃 포커싱으로 제주의 모습을 규정해놓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 의무감에서 좀 벗어나도 되겠다.

   
▲ 초가의 처마 바깥으로 나가 빗물을 밟아보았다. 서울에서는 좀처럼 하기 힘든 ‘짓’이다.

그러다 보니 이제 제주의 자연풍광은 내게 그리 놀랄만큼 아름답지는 않다. 햇빛과 바람, 오름과 올레길, 맑은 바다 빛깔은 그 자체로 나를 이 곳으로 이끈 매력이지만 찬탄을 지속할만큼 경이로운 것은 아니다. 익숙해져서 그렇다. 생활 공간으로서의 제주가 눈에 보인다.

   
▲ 박헌정 수필가

한 번은 바다를 보고 있을 때 누가 전화를 해서 술 마시러 광화문에 나오라고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 성산인데?” 했더니 그쪽에서 “20분이면 오겠네?” 한다.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상대방은 서울 마포구 성산동인줄 알았나 보다. 이렇게 내게 제주는 특별한 여행지가 아니라 휴식과 공존하는 생활 속 장소가 되었고, 나는 제주를 '애용’한다.

굳이 재미난 것을 찾아다니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제주도의 햇살과 바람과 기운은 내 몸 속으로 들어오니까 제주까지 찾아온 본전은 챙겨지는 셈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기, 이게 나의 여행철학인데 그 출발점은 제주부터였던 것 같다.

박헌정은?
= 서울생. 연세대 국문과를 나와 현대자동차, 코리안리재보험 등에서 25년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50세에 명퇴금을 챙겨 조기 은퇴하고, 책 읽고, 글 쓰고, 여행하는 건달이자 선비의 삶을 현실화했다. 공식직함은 수필가다. 은퇴 후 도시에 뿌리 박혀버린 중년의 반복적이고 무기력한 삶에 저항하기로 했다. 20대는 돈이 없어 못하고, 30-40대는 시간이 없어 못하고, 60대는 힘과 정보가 없어 못하던 일들, 꿈만 같지만 결코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야 할 일들, 50대의 전성기인 그가 그 실험에 도전하고 그 과정과 결과를 인생 환승을 앞둔 선후배들과 공유한다. 직장생활 중 대부분을 차지한 기획, 홍보 등 관리부서 근무경험을 토대로 <입사부터 적응까지(e-book)>를 썼다. 현재 중앙일보에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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