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관덕정연가] 잠수 2000회 SSU 송무진 전 대령 ... 천안함.세월호 구조도
제주해군기지 갈등관리 10년 ... "돌아보고 싶지 않은 군, 내 인생 바꿔놨다"

 

제주에서 태어나 학창시절을 제주에서 보내고, 학사 장교로 해군에 들어갔다. 그 후 20년이 넘는 세월, 해군 장교란 이름으로 바다에서 살았다. 제주섬에서 태어난 바다 사나이였다.  

 

하지만 그는 고향 제주에서 아픔을 얻고 바다도 등졌다. 제주에서 얻은 마음의 짐으로 수십년간 몸 담았던 군도 멀리하게 됐다.

 

해군 대령까지 올랐던 그는 경력을 살린 방산업체 취업도 마다하고 엉뚱(?)하게도 도배사의 길을 걷고 있다.

 

예비역 해군 대령, 현 인테리어업체 대표 겸 도배사 송무진(52)씨.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진정 많은 말을 털어놨다. 고난의 행군사다. 하지만 그의 고난엔 제주현대사의 또 다른 아픔이 배어난다.

 

◇대한민국 해군 최고의 잠수사 … 제주해군기지로 가다

 

그가 대학생이던 1980년대 말, 제주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진로는 사실 막막했다. “바다를 사랑했다”는 마음으로 눈길은 해군으로 향했다. 그는 제주대에서 해군ROTC로 해군에 처음 발을 디뎠다. 1991년이 군생활 시작이었다.

 

해군에서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해군 해난구조대(SSU)다. SSU에 들어가기 위해 복무연장도 신청했다.

 

'훈련강도 최고'로 꼽히는 게 사실 군에선 SSU다. 훈련소에선 장교와 사병의 구분도 없다. 계급장 떼고 강도높은 훈련을 받는다.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교육생이 열 중 넷은 된다.

 

송씨는 그 SSU를 1등으로 수료했다. 그 후 그는 2000번 이상을 바다에 뛰어들었다. 1993년 10월 서해 페리호 침몰사건 때에는 장교 중에서 유일하게 잠수장비를 지고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송씨는 그 때를 떠올리며 “장교 중에서 시신인양을 한 것도 해군 역사에서 내가 처음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페리호 때의 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천안함 폭침 사건 때에도, 세월호 침몰사고 때에도 그는 산소탱크를 짊어지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사명감뿐이었다. 한 친구라도 더 부모의 품으로 돌려보내야겠다는 그런 마음가짐이었다.”

 

그러던 그가 어울리지 않던 옷을 입은 때가 있다. 잠수만이 전부였을 것 같은 그의 군생활에서다. 송씨는 그 ‘어울리지 않는 옷’을 그의 군생활 3분의 1에 가까운 세월 동안 입었다. 바로 제주해군기지에서였다.

 

제주해군기지 추진 사업과정에서 그가 담당한 일은 갈등해소. 사업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각종 갈등을 적절하게 해소하는 것이었다. 그 갈등관리 업무를 맡았던 그 시기를 그는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회상했다. 말이 갈등관리 업무지 고향 제주에서 그는 사실 '치욕의 나날'을 보냈다.

 

◇발넓은 분위기 메이커 해군장교, 갈등관리 전문가로

 

2002년이었다. 그 시절 서귀포시 화순항 개발계획에 해군기지가 들어가면서 논란이 일었다.

 

제주도민들은 ‘우리들도 모르게 화순에 해군기지 건설 계획을 세웠다’며 거세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그는 해군소령 계급을 달고 편대장으로 서귀포시에 있었다. 친화력이 좋아 많은 사람들과 사귀었다. 서귀포 지역유지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좋은 관계를 맺는 것만큼이나 부대관리도 잘 됐다. 지역주민들도, 송씨를 알았던 사람들도 송씨는 ‘능력 있는 사람’으로 남았다.

 

그 평판 탓(?)이었을까? 제주에서의 복무기간을 마치고 해군교육사로 갔지만 다시 제주로 불려왔다. 2005년이었다.

 

 

그 시절 참여정부는 대선공약이었던 해군기지 반대 입장을 뒤집고 제주해군기지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그해 5월 해군사관학교 출신 공보장교가 제주에 내려와 제주해군기지 홍보업무를 맡았다. 하지만 그리 신통치 않았다.

 

“딱히 해군기지 추진과 관련해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사람들도 없었고, 공보장교는 언론인들과 공무원들만 만나고 다녔다. 그 와중에 일부 주민들이 내 이야기를 했나보다.”

 

송씨를 좋게 봤던 주민들의 말에 해군본부는 해군교육사에서 근무하고 있던 송씨를 제주도로 내려보냈다.

 

“처음에는 제주해군기지 추진 업무를 3개월만 도와달라고 했다. 그 3개월 동안 주말도 없이 주민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제주해군기지에 대한 여론을 바꿔놨다. 3개월이 지난 시점에 SSU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여론이 바뀌고 성과가 나오기 시작하니 날 제주에 붙잡와 놨다.”

 

그는 그렇게 갈등관리 담당으로 제주해군기지 추진 사업에 몸을 담게 됐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이었지만 그의 성격상 대충하는 것은 없었다.  제주해군기지 추진 사업에 대한 홍보책자를 만들고 매일같이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정해진 근무시간을 넘기는 일이 매일이었다. 사람들을 만나 식사와 술로 마음을 달래가며 밤 10시가 넘어 숙소로 돌아가는 일이 빈번했다.

 

“영업이나 보험판매를 그렇게 했으면 나는 아마 영업왕이나 보험왕이 됐을 것”이란게 그의 회상.

 

◇쉽지많은 않은 길 … 늘어가는 상처

 

해군기지 추진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우호적인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주민들에게 멱살을 잡힌 적도, 심지어 얻어맞기까지 한 것도 수차례다.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맞은 적도 있었다.

 

게다가 사비를 털어 일을 하다보니 빚도 늘어갔다. 해군기지 홍보라는 업무를 위해 사람들을 수없이 만나는 과정에서 쓴 돈은 말 그대로 스스로의 주머니에서 나갔다. 한 달에 수백만원씩, 나중 셈을 해보니 수천만원이 들어갔다.

 

 

잠수 실력을 살려 아예 직접 산소통을 메고 바다로 뛰어든 적도 있다. 강정해군기지 건설과 관련해 앞바다 연산호 군락 파괴문제가 터지자 반박자료를 만들기 위해 직접 산소통을 매고 새벽에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곤 곧바로 제주도청으로 달려가 기자들에게 해명자료를 내놨다.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그 때는 코피를 흘리면서 다이빙을 했다.”

 

가족과는 떨어져지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늘어가는 빚까지 더해지며 그는 이 시기 가족해체의 위기를 겪었다.

 

그런데도 해군이 그에게 해준 건 사실상 없었다. 주머니를 털어 쓴 돈에 대한 보상도 없었다. 물론 출장비는 꿈도 못 꾼데다 기껏 바닷속을 헤매고 다녔다한들 수당 한 푼 받지 못했다.

 

그 시절 해군기지건설을 추진하던 부대는 정식부대가 아니었고, 그랬기에 예산은 국회에서 대부분 깎였기 때문이다.

 

해군은 나름 꼼수(?)를 찾았다. 그를 제주방어사령부 예하 해병 부대에 배치했다. 그러나 그 덕에 일은 더 늘었다.

 

그가 해군기지 관련 업무를 하려 하면 해병부대에서는 해군기지 업무를 한다며 눈치를 줬고, 해군본부에서는 정작 해군기지 추진 업무에 소홀하다며 눈치를 줬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가 제주해군기지에서 잠시 떠나 있었던 2011년도와 2012년도에는 갈등상황이 눈에 띄게 증폭됐다. 때문에 그는 제주에서 벗어나도 다시 제주로 불려왔다. 그렇게 그는 10년 동안 제주에서 갈등관리를 했다.

 

 

◇"군대, 쳐다보지도 않으려 한다"

 

팔자에도 없는 일을 했던 10년, 그에 대한 보상으로 그가 원했던 것은 소박했다. 그저 해군에서 지난 10년 동안 고생했다는 표시만 해주기를 바랐다.

 

“해군기지 준공식을 앞두고 바랐던 것은 그래도 10년 동안 고생했다는 것에 대한 표시였다. 진급같은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갓 1년을 근무한 사람이 와서는 자기가 더 높은 사람이라고 자신의 치적을 더 치켜세웠다.”

 

세월호 사고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대원들은 7개월 동안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면서 구조작업을 펼쳤다. 이에 대한 노고를 인정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작은 포상하나 없었다. 당시 정권에서 우리 대원들을 사실상 소모품으로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쌓여간 상처들은 결국 그로 하여금 군대를 등지게 했다. 연금도, 군대 경력을 살린 방산업체 등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2년 전 해군을 떠나며 받은 퇴직금으로 제주에서 쌓인 빚을 청산했다.

 

새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30년 가까이 몸 담았던 군을 떠나 딱히 할 일이 보이지 않았다.

 

누나와 매형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수도권에서 인테리어업체를 하는 부부는 어느덧 그에게 동경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어깨 너머로 바라보며 배운 도배일이 슬슬 손에 감기기 시작했다.

 

그 일이 의외로 적성에 맞았다. 배우는 속도도 빨랐고, 솜씨도 남달랐다. 힘들었던 지난날을 청산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생활 속에서 그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혼자 묵묵히 도배지를 바르고 있다보면 묵언수행을 하는 느낌이다. 마음 속의 평화를 찾는 것 같다."

 

해군대령에서 도배사로의 변신,

 

힘들었던 지난날을 뒤로하고 그는 인생 2막을 시작하고 있다. 그동안 켜켜이 쌓였던 분노와 절망은 이제 그에게 어찌보면 새로운 희망이 싹트게 하는 에너지원으로 서서히 진화하고 있다. 

 

 

다음은 그와의 대화다.

 

▶해군 장교출신으로 2000번 이상 잠수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대단한 기록이다
"나는 대학까지 제주에서 지냈다. 제주대를 나왔다. 사관학교 출신도 아니다. 1987년도 6월항쟁이 있던 때에 학교를 다녔고 1991년도에 임관을 했다. 그 후에 SSU 훈련을 받았는데 그 훈련을 받고 싶으면 복무연장을 하라는 말을 들었다. 해군 입장에서 SSU훈련을 받았는데 전역을 해버리면 아까운 감이 있으니 복무연장을 SSU훈련이수 조건으로 내건 것이다. 그 후 SSU훈련에서 1등을 했다. 훈련이 끝난 후에는 장기복무를 신청했다.
 내 개념은 지휘관이라면 가장 앞에서 돌격을 해야한다는 입장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1993년도 서해 페리호 사건 때에는 장교 중에 유일하게 잠수를 했다. 장교출신이 수중에서 시신인양을 한 것은 내가 처음이었다."

 

▶잠수전문가인데 제주해군기지건설 당시에는 갈등관리담당 역할을 맡은 것으로 알고 있다.
"전역 직전에 평택함 함장을 하고 중간에 SSU대대장을 한 것 말고는 2005년부터 끝까지 제주해군기지 관련 일만 하다 나온 것 같다. 거의 10년 세월이었다. 2011년도와 2012년도 해군기지가 가장 시끄러울 때에는 내가 없었고 그 시기만 빼면 제주해군기지에 계속 있었다. 갈등관리는 마치 백조가 물 밑에서 발을 열심히 움직이는 것과 같다. 백조가 발을 열심히 놀리면 물위에서는 조용하게 떠다닌다. 하지만 발을 움직이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 갈등관리도 마찬가지다. 사실 갈등이란 것은 누가 맞고 틀리고가 없다. 상대방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서로 물러서지 않으면 갈등이 만들어진다. 해군기지도 그렇게 시작됐다."

 

▶해군에 몸을 담은 후 어떻게 제주해군기지까지 오게 됐나?
 "제주해군기지가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2002년이다. 화순항 개발계획에 해군기지가 들어가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사실 1993년 해군 전략기획서부터 제주해군기지에 대한 언급은 나왔었다. 그 당시에 대략적으로 필요성이 대두됐었는데 2002년에 본격적으로 개발계획에 들어갔다. 그걸 도민들이 알게되면서 터졌다
나는 SSU 부대에서 근무를 하다가 제주해군기지가 처음 문제가 될 쯤 서귀포에 있는 부대에서 편대장으로 근무했다. 그 당시 서귀포시의 왠만한 유지들이나 주민들하고 친분을 유지했다. 내가 친화력이 좀 좋은 편이다. 거기에 더해 부대관리도 잘했다고 자부한다. 당시 받은 표창도 꽤 된다. 그러다보니 평판이 좋았나보다. 서귀포시에서 근무를 마치고 해군교육사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해군본부에서 ‘3개월만 도와달라’며 나를 제주로 보냈다. 그게 2005년 7월이었다."

 

▶제주에서는 어땠나?
 "2005년 당시는 노무현 정부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당시에는 해군기지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는데 사실 안보를 무시한 대통령은 있을 수 없다. 필요성이 대두돼서 추진이 시작됐고 처음에는 공보담당 장교가 내려갔다. 하지만 성과가 없었다. 해군에 도움을 주겠다는 이도 없었다. 해군기지 부지는 화순에서 시작했다가 위미를 거쳤는데 그 당시에는 반대여론이 80%였다. 그 때쯤 내가 투입됐다.
3개월만 도와달라고 해서 갔고 3개월만에 여론을 바꿔놨다. 빨리 SSU부대로 복귀하고 싶었고 그래서 열심히 일했다. 하루에도 수도 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고 오후 10시나 자정까지 일하는 경우가 이어졌다. 토요일에도 일요일에도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강정마을 같은 경우는 마을사람들 이름도 모두 외우고 다녔다. 특히 해녀 아주머니들과 엄청 친해졌다. 아마 그런식으로 외판원을 하고 보험을 했으면 난 아마 연봉으로 3억 정도는 받았을 것이다. 영업왕이나 보험왕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일을 해서 2005년도 말에 여론을 뒤집었다. 당시 여론이 아마 찬성과 반대 6대4쯤 나왔을 것이다. 그 이후에 완전히 제주에 붙잡히고 말았다. 성과가 나오니 잡아놓은 것이다."

 

▶ 그 시기가 힘든 시기였다고 들었다.

 

 "주말도 없이 마을주민 등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5년 동안 출장비 등으로 해군에서 10원도 받은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업무에 대한 압박은 들어왔다. 제주에 있으면서 업무때문에 사람들 만나러 다니면서 생활자체가 안될정도로 돈을 많이 썼다. 홍보전단지 배포 등으로 아르바이트를 쓰는데 그 돈도 모두 내 사비로 들어갔다. 한달에 수백만원씩 들어갔다. 1년 동안 쓴 게 수천만원이었다. 모두 영수증을 가지고 있다. 이걸 가지고 윗사람에게 보고를 하면 ‘무슨 말이 많아’라며 핀잔을 들었다. 인사고충상담관에게 이야기하니 ‘덩어리가 너무 크다’며 받아주질 못하겠다고 했다. 돈 때문에 와이프와도 엄청 싸웠다. 한번은 연산호문제가 언론에 나오니 빨리 반박해야 한다고 해서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물속에 들어가고 아침 9시에 도청에서 브리핑을 했다. 잠 3시간 자고 코피를 흘리면서 잠수를 했다."

 

▶ 군에서 하는 국가사업이었다. 관련 예산은 없었나?
 "당시 있었던 곳이 정식부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산이 없었다. 국회와 정치권에서 예산을 동결시켜 돈이 나오질 않았다. 때문에 이와 관련해 호소를 하러 다닌적도 있다 2007년쯤에는 활동비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를 정식부대에 배치했다. 그러다보니 정식부대 일에 해군기지 일까지 하면서 업무가 늘어났다. 당시 해병대부대였는데 그 부대에서는 왜 해군기지 일을 하고다니냐고 눈치를 주고 해군본부에서는 왜 해군기지 일을 하지 않는냐고 눈치를 줬다. 그러면서 일을 했다. 결국 빚은 계속 늘어가고, 군하고는 모든 것을 단절하고 싶었다. 군에서 나오면서 빚을 남겨두고 연금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받을 거 일시불로 다 받고 모든 것을 정산했다." [제이누리=고원상 기자]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